제 47과 자비로우신 하나님
성 경 누가복음 1:46-56
찬 송 490 549
결혼은 모든 민족과 인류에게 있어서 중요한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약혼과 정혼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세 단계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약혼(約婚)은 당사자들이 어릴 때 신랑과 신부의 아버지들 사이의 합의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같이 당사자들의 맞선은 없습니다. 정혼(定婚)은 약혼한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정혼이 이루어지면 서로 결혼한 사이로 간주되어 남편과 아내로 불리게 됩니다. 이 사실은 결혼 전에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부른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마 1:19). 그래서 정혼이 깨어지면 이것을 파혼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혼이라 불렀습니다.
당사자들은 신부 측 집에 모여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로 간에 서약을 하였으며 신랑은 신부에게 정혼 예물을 주었으나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까지는 함께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 1:18에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이라고 합니다. 결혼은 정혼한지 보통 1년이나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 집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의 요구대로 경건하게 정혼 기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기치 않는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이 임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이 소식에 너무 놀란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겠습니까”(34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7절)라고 천사가 대답합니다. 너무도 놀라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이 사실 앞에 어찌하지 못합니다. 사촌 엘리사벳의 임신소식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위로를 얻었는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하고 고백합니다.
우리 속담에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마리아에게는 너무도 난감하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고 또 알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율법에서는 이러한 일을 돌로 쳐 죽여야 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지낼일도 아이를 낳아 키울 일도 너무도 위험스러운 일이고 작은 여성의 몸과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고난과 어려운 일들 앞에 자신이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를 묻곤 합니다. “주님 왜 하필 나입니까?”
천사의 방문이 끝난 후, 마리아는 마음을 수습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와 위로를 얻기 위해 그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자비'는 '사랑'과 함께 대표적인 기독교적 용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자비하신 분으로 말씀합니다. 사랑이 있기에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자비란 말이 다소 낯설기도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비는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자비'를 뜻하는 '라하밈'은 '자궁'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자비란 어머니가 자식에게 대해 가지는 마음과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에서 '자비'를 뜻하는 단어 '엘레오스'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긍휼'(compassion)을 뜻하는 또 다른 헬라어는 '내장'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창자가 꼬이는 듯 한 아픔을 느끼는 것이 긍휼이고 자비입니다. 함게 아파하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내장이 깨어지고 찢기는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까지 내어 주시며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내어 주신 그 사랑, 그 긍휼하심, 그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3개월 동안 엘리사벳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충분한 준비의 시간을 보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눅1:46-50)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그분의 아픔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죄와 죽음 가운데 빠져 사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마치 창자가 뒤틀리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 아픔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망각하고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마치 태중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태어날 한 아기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기를 받아 안아 키울 사람으로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 여성들은 임신을 하면 '혹시나 내 안에 있는 아이가 메시야가 아닐까?'라는 꿈을 꾸어 볼 정도로 메시야에 대한 바램이 간절했습니다. 마리아는 비정상적인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당할 일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자신이 얼마나 큰 영예를 입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같은 영예를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도, 이유도 마리아에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깨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항상 깨어지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피십니다. 어두운 곳, 냄새나는 곳, 허름한 곳, 누추한 곳에 더 깊은 관심을 두십니다. 가난한 사람, 병 든 사람, 세상에서 밀린 사람, 실패한 사람,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렇게 편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같은 편애로 인해 그분의 마음은 늘 깨어집니다. 하지만 그분은 고집불통이십니다.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 깨끗한 곳보다는 누추한 곳에 먼저 찾아가십니다.
우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만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피하하고 낮은 곳으로 가기를 싫어합니다. 겉으로 볼 때 대단한 것이 없어 보이면, 무시하거나 등을 돌리려 합니다. 그늘지고 냄새나고 불편하고 추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외면하려 합니다. 가난한 사람, 병 든 사람, 실패한 사람, 뒤쳐진 사람들과 상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당할까 염려합니다. 그들과 어울려 보았자 손해 볼 것 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한 다음, 계속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팔로 임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이는 자를 놓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51-53절)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그 자비에 힘입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고 그 자비에 기대어 살아갈 사람입니까? 오늘 노래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답합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0절)
'두려워하다'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 그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나 피해 숨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죄악을 털어버리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열망을 심어주는 감정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그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면 하나님의 마음은 함께 찢어지고 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기쁨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의 아픔으로 인해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면, 그리고 그 자비를 구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질 것은 ‘잣대’와 율법이 아닙니다. 긍휼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그분을 닮아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진생목사 지난 주일 설교 요약)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