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30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벧후 3:11-18 사모하는 믿음
歲月如流 세월여류라 세월(歲月)이 개울물과 같이 빠르게 흐른다하니 벌써 2014년도도 앞으로 한 달 성탄의 달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兔走烏飛 토주오비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토끼가 뛰어가고 까마귀가 날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은 연말이라 한해를 마감하느라고 매우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한해의 마감으로 바쁘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오는 새해를 준비합니다. 달력에 보면 한 주간이 일월화수목금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는 일요일이 마지막 일곱 번째 날입니다. 그런데 왜 일요일을 한 주간 첫 날로 기록하였을까요. 그것은 일요일은 주일 곧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로부터 주님과 함께 한 주간을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12월은 한 해의 끝 달입니다만 성탄의 달이기에 앞으로 오는 새해를 주님으로부터 주님과 함께 출발하는 첫 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Advent) 또는 대림절이라고 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이제부터 성탄을 준비하는 예비일입니다. 대강절은 옛날 초대교회 때부터 지켜 오는 교회 절기로, 성 안드레 순교일 부터 가까운 주일을 대강절로 지키는데, 11월 30일보다 늦지 않고 12월 3일 보다 빠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예수님의 사도이시고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의 순교 기념일입니다. 안드레 사도는 맛디아 사도와 함께 터키 북쪽지방과 그리스북쪽 지역에서 전도 활동하다가 AD69년 11월 30일 파트라스지방 총독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엑스X자 십자가에 달려 순교를 당하였는데 “그리스도 예수여, 내가 뵈옵고 내가 사랑하고 당신 안에 있는 나를 받으소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라고 말하며 운명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이 지금 그리스 파트라스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데 그 시신의 일부가 영국 스코틀렌드의 성 안드레 교회에도 있다고 합니다. 그해서 안드레 사도를 기념하여 영국국기를 보면 이 안드레의 엑스X자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화면:영국국기)
대강절은 성탄절을 기다리고 준비할 뿐만 아니라 새해를 주님과 함께 시작할 것을 준비하며 앞으로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보며 그 날을 사모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멀리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듯이, 오늘 11월 마지막 날 지금 이곳에 서서 12월 한 달 건너편 새 하늘 새 땅이 있는 새해를 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건너띄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괴로움도 있지만 이것을 훌쩍 건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시편 23편 기자는 매우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지만 푸른 풀밭과 잔잔한 시냇가를 훌쩍 건너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에 있다하더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오늘에 집착하지만 그래서 걱정도 많고 두려움도 많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오늘을 건너 새 하는 섀 땅을 소망하며 살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아람어로 마라나타(Maranatha)라고 합니다. 이 마라나타 고백이 오늘 대강절을 맞이한 우리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주님을 만날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날을 사모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모한다고는 하는데, 정말로 간절히 사모하는가에 우리는 대답을 못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간다고 하면 이것저것 준비하며 여행갈 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만난다고 하는 데에 우리는 무슨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자만 만나 주십니다. 성탄절을 사모하는 자에게만 아기예수님은 그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자가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할 때에 예수님은 그를 만나 평안을 주십니다. 세상 중에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그를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만을 예수님은 휴거하게 참여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사용된 동사가 있는데, 14절에 힘쓰라, 17절에 삼가라, 18절에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라는 동사입니다.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듣고 순종하여 지켜 행하는 동적인 종교입니다.
첫 번째로 무엇에 힘쓰라고 하였습니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최선을 다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하라는 말은 너의 베스트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엔 적당히란 말이 없습니다. 오직 열심, 이 말도 성에 안차, 예수님은 열심히 특심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는 바로 틈을 노립니다. 열심히 식어지는 틈을 노립니다. 죄는 바로 믿음의 온도가 조금이라도 식어지는 바로 그 순간 믿음의 온도가 내려가면 죄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순종의 온도가 낮아지면 불순종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겸손의 온도가 낮아지면 교만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신뢰의 온도가 낮아지면 의심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감사의 온도가 나아지면 불평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사랑의 온도가 낮아지면 미움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온도가 높아져 있습니까? 높아져야 할 것이 낮아지고 낮아져야 할 것이 높아져 있다면 이는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에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의 온도가 낮아지고 죄의 온도가 높아집니까? 바울선생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처 복종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흠과 티가 심령 가운데에 암 균처럼 끼어 있어 선의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이 무슨 엄청난 죄 덩어리가 아닙니다. 어쩌면 먼지 보다 더 작은 죄의 알맹이들이, 아주 작은 죄 알맹이가 촘촘히 박혀있어 우리의 심령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심령의 암균을 죽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들어가야 이 죄의 암균을 제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죄 씻음 받기를 무엇보다 힘써야 합니다. 그 죄의 암균 때문에 심령이 썩어져가니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세상의 더러운 죄 가운데 빠져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는 날마다 흠과 티를 씻기 위하여 회개하는 마음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베드로 사도 당시 초대교회에 수많은 이단 사설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들이 돌아다녔습니다. 사도들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면 뒤 따라 이단자들이 살며시 들어와 이미 믿는 교인들을 미혹하여 이단에 빠지게 합니다.
사실 일반 성도들은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 설교말씀도 이해 못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복음 신학교 학부에서 4년 동안 64개 과목을 공부합니다. 대학원과정에서 24과목을 배웁니다. 합치면 88개 과목을 배웁니다. 왜 이런 많은 과목을 배웁니까? 성도들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도 부족합니다. 이 88개 과목으로 다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단의 교주들은 무엿입니까? 대부분 신학교 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들입니다. 다만 마귀가 준 얄팍한 거짓 지식으로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현혹하니 사탕발림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끌려가고 있습니다. 왜 목사님들이 그 많은 공부를 합니까? 양떼들을 마귀에게서 지키고 살찐 꼴로 진리의 말씀을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목사님들은 공부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종인 거짓 선생들이 가장 잘 아는 것처럼 가장하여 엉터리로 성경을 말하고 양떼들을 훔쳐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런 얘기를 듣지도 말고 물리쳐야 합니다. 마약중독자들을 보면 호기심으로 대마초 담배 한 목음 빨다가 중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이 도는 지역엔 애시당초 접근도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분명하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으려는 베드로를 향하여서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단의 병은 전염이 빠릅니다. 요즈음 아프리카에 에볼라라는 전염병으로 수 만 명이 앓고 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극히 일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 날 뿐입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는 이단 사설 적그리스도 거짓 선생 그리고 우상종교에 눈도 돌리지 말고 귀도 기울이지 말고 오직 삼가야 합니다.
세 번째로 은혜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문제는 은혜를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심었으면 물을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심겼으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라가게 됩니다. 믿음은 은혜의 비를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다.
영국에서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학회가 열렸습니다. 신학자들은 여러 종교들의 특색들을 논의 하고 그러면 기독교의 특색이 무엇이냐에 대해 토론을 하였습니다. 한 학자가 말하기를 아마도 그것은 ‘성육신’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이야 말로 기독교의 가장 독특성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가 반론을 제시하기를 물론,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요소들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마는, 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나타났다, 이런 얘기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없지 않아 있다고, 또 누군가 말하기를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에 있지 않겠느냐? 부활신앙도 기독교의 독특성이죠. 그러나 또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얘기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종종 있다고,
이때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 평신도 신학자요 문학가였든 유명한 씨에스 루이스 교수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 대답은 의외로 쉽습니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은혜입니다. ‘은혜’ 이 말 앞에 모두가 다 동의를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 은혜가 뭡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사랑, 자격이 없는데,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주시고 용납하고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이것이은 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다음에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해보려고 노력해도 아무리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그것으로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 스며든 죄를 없에는 일은 오직 예수의 보혈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값없이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시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보혈을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고 사는 우리에게 허락하시니 이 은혜가 크고 놀라우시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것입니까? 그 뿐 아니라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힘주시고 위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맛보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가 귀하다고 은혜를 간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구원 귀하다고 나 구원 받았네만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사랑 귀하다고 나를 향한 사랑 크셔라고 노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능력 귀하다고 자기욕심 부리는 데만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받아 간수하였다가 다 썩어 버리게 된 것처럼, 은혜를 받았으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합니다. 오래 교회를 다니는데 믿음이 안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은혜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넘치는 은혜를 받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을 나누기 위해 이웃에게 전도하고, 사랑을 받았으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능력을 받았으면 이웃을 섬기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고전적인 예화가 있지요. 옛날에 완행열차가 있었습니다. 특히 호남선 완행열차는 언제나 승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수원에서 기차를 타서 보니 좌석이 없어 서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 의자를 보니 한 부인이 커다란 보따리 두 개를 의자에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주머니 이 보따리를 선반위에 올려놓으면 안됩니까?”하고 물으니 “안 됩니다”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몇 번 말해도 아예 창밖을 내다보고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목사님은 그렇게 서서 가게 되었습니다. 기차는 천안역에 도착하였습니다. 한 여인이 기차 안에 들어와 두리번거리다가 “아이구 이 권사님 반갑습니다. 어디 갔다 오십니까?” 자리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김집님 아니시니까?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여기 이 보따리를 선바위에 올려놓고 여기 앉으세요” 그래서 천안에서 탄 김 집사님이 그 보따리를 선반위에 올려놓으려니 힘들어 하면서 “아저씨 이 보따리를 선반에 올려 주세요” 목사님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아무 소리도 안하고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김 집사가 이 권사에게 묻습니다.“권사님 어디 갔다 오세요” “예 오산리 기도원에 갔다 옵니다.” “은혜 많이 받았겠네요” “암요 목사님이 얼마나 신령하신지 은혜가 철철 넘쳤답니다” 이 권사님이 진정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때마다 일마다 넘치게 주시는 은혜를 받고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니 그 믿음이 쑥쑥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왜 은혜를 받았으면서 헛되게 받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믿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달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배시간 빠지지 말고 말씀에 청종하고 심령가운데 새겨 넣어 말씀이 내 영의 충분한 양식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랍니다. 말씀 듣고 깨닫지 못하면 백년하청이라 믿음이 자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대강절을 맞이하여 우리 주님을 열심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심령 상에 흠과 티가 없도록 뜨겁게 회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단 사설 거짓선생을 삼가고 나의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진리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그래서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보며 기쁜 성탄과 복된 새해를 맞이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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