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6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고전 15:9-11 한량없는 은혜 감사
언젠가 한번 소개한 바 있는 예화를 다시 기억하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1608년 아직 미국에 청교도인들이 오기 전 헌트라는 함장과 일단의 영국 무역상들이 신대륙 미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왐파나옥(Wampanaog)인디안 족을 만나 무역을 거래하는 척하다가 그들을 포로로 잡아 스페인에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그런데 인디안들 중에 스콴토라는 청년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한 친절한 사제에게 팔려 교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의 인도로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자기가 노예로 팔려 왔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다고 확신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늘 세 가지를 기도하였습니다.
첫째는,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고향에 돌아가면 자기를 잡아간 백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백인들과 협력하여 고향 땅을 스페인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고, 셋째는, 자기 평생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스콴토는 사제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기독교인인 영국의 존 슬랜니(John Slaney)라는 사람의 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슬랜니의 도움으로 고향을 떠난지 10년 만인 1619년에 미국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고향에 왔을 때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약속한 그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소수의 남은 자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해 청교도들이 그곳에 도착합니다. 스콴토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 유창한 영어로 청교도들을 환영하고 청교도들이 그곳에서 정착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청교도 인들은 스콴토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고 그 이듬해 11월 셋째 주일에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림으로 추수감사절 예배가 시작 되었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을 인도한 지도자 브래포드(William Bradford)목사는 그의 일기에 “스콴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준비된 특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는 우리에게 옥수수를 어떻게 심는 것과, 낚시를 어떻게 하는 것과, 땅을 어디에 어떻게 개간하는가를 가르쳤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인도했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수년 후 스콴토가 열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 그는 청교도 지도자 브래포드 목사에게 “자기가 천국에 편히 갈 수 있게 기도해 달라는 것과 부디 이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기 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기도는 “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땅을 축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00년이 지난 오늘 미국은 세계에 가장 막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들이 “스콴토를 기억하자”는 켐페인을 대대적으로 벌리며 마치 예수님의 오실 길을 미리 세례요한을 통해서 길을 열 개 하셨듯이 청교도 인들이 미국에 오기 전에 스콴토 그 한 사람을 택하여 준비시켜 주셨음을 추수감사절 때가 되면 미국의 교회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한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할 때에 감사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지난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각가지 고난과 역경 이러저러한 손해가 많았다고 불평하며 하나님의 은혜 받은 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과 역경 온갖 고생 중에도 살아나올 수 있었다는 것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다면 그는 충분히 승리할 것입니다.
삼하 22:2-3에서 다윗은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 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이렇게 찬양을 하였습니다.
월남전이 치열하던 1970년 3월 18일, 맹호부대 2대대 독수리 1호 작전이 안케 계곡 근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제일 먼저 부상을 당한 장병이 맹호 기갑연대 6중대 화기소대 통신병이었습니다. 네 군대나 총탄을 맞고 실신한 이 장병은 즉시 헬리곱터 편으로 후송되면서 기내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그의 가슴에는 총탄이 군복을 찢고 관통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군의관이 심장을 관통한 것으로 판단하고 급히 군복의 상의를 벗겼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있는 가슴 부위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깨끗하였습니다. 군의관은 엉덩이 좌퇴부를 비롯한 두 군데의 관통상을 찾아 지혈을 하면서 의식을 잃어버린 장병을 회생시키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군의관은 다시 한 번 총탄을 맞아 찢어진 군복 상의를 살폈습니다. 즉, 탄환이 군복을 흉측스럽게 뚫었는데도 가슴에 아무런 상처가 없어서 탄환이 어느 방향으로 관통했는지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군복 상의의 주머니 속에 조그만 포켓 성경이 있었는데 그 성경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군의관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이 장병의 심장을 향해 날아온 탄환은 한 발이 아닌 두발이 성경을 뚫고 성경 뒤에 있었던 얇은 파월장병 수첩사이에서 멈춘 것이었습니다. 마치 두 발의 총알을 성경이 꼭 붙잡아 둔 것 같았습니다. 두 발의 탄환을 손에 쥔 군의관은 이 기적의 사건을 후일 누가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사단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사실은 다시 미국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국내에는 전우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합니다. 바로 이 분은 KBS 제주방송총국 기술국에 근무하고 퇴직한 이영진 씨 입니다. 그는 그날 그 순간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준, 그 포켓 성경은 월남 파병을 앞둔 당시 어느 날 동료 사병 이흥부 이병으로부터 성경과 찬송가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는 이흥부 이병과는 파월되기 전 1사단 58포대에서 같이 근무해서 교회에도 항상 같이 다녔습니다. 어느 날 이흥부 이병이 "낯선 이역만리 전쟁터로 가는데 식사도 한 번 대접 못하고, 또 여비도 한 푼 못 보태주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대신 성경과 찬송가를 각각 한 권씩 선물로 드립니다. 전투에 나갈 때는 꼭 이 성경과 찬송가를 양쪽 포켓 속에 넣고 다니기를 바랍니다."라며 성경, 찬송가를 건네주었다 합니다. 이영진 씨는 자신의 생명을 건져준 그 성경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으며 탄환을 맞아 찢어진 군복 상의도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나의 방패가 되시고 피할 바위가 되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던지 모르던지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고 계십니다. 제가 빵을 좋아하는데 뚜레쥬르 베이커리 빵을 좋아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뚜레쥬르라는 프랑스 말이 뭔가 정감어린 말처럼 들려 좋아서입니다. 뚜레쥬르리는 말의 뜻이 매일매일이란 의미입니다. 뚜레쥬르, 매일매일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켜 주신다고 생각하니 그래서 뜨레쥬르 빵 맛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제 인생에 몽굴 몽굴 솟아나옵니다.
습 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여기서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이란 다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면서 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였습니다.
시 5: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 하시리이다.”
‘방패로 함같이’(캇친나)는 ‘가시나무’(욥5: 5)를 나타내는 말(첸)에서 유래하여 원래는 ‘가시 울타리’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시 울타리가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전신 방패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삼상17:7 ;겔38:4). 이 방패는 전신을 가리는 방패입니다. 방패는 크고도 긴 방패로 싸움하는 자의 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마치 전쟁터에서 적군의 창과 화살을 막아내는 방패와 같이 튼튼하고 완벽하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찬양은 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 시인은 다윗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일평생 동안 수많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왕으로 부름을 받기 전에는 양을 치는 목자로서 광양에서 양을 지키기 위하여 사나운 맹수들과 사투를 벌린 지 안두번이 아니 였습니다. 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는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계속 ?아 다녔습니다. 또 왕이 되어서는 수많은 전쟁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안전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해하지 못 하였습니다. 사나운 짐승도, 사울 왕도, 그 어떤 대적들도 다윗의 목숨을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전신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 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디 시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습니까? ‘주께 피하는 자는 다’ 이러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은 영영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성도여러분은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니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다닐지라도 결코 그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일생 다하도록 지켜주고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어찌 말로다 감사하다는 말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감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만큼 감사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그 만큼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는 그 믿음의 척도입니다. 감사가 없음은 믿음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매일매일 하나님의 전혀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고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하십시오‘
그런데 어떤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무감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그냥 성의 없는 말로 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마치 자기와는 관계없는 남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남자가 여행 중에 어는 시골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시골교회에서 들은 목사님의 설교 얘기를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처음에는 아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그 다음에는 여자들이 울었고 마침내 남자들까지도 눈이 촉촉해 졌다네” 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자네도 울었나?' 했더니 '아니, 난 그 교회 교인이 아니잖아....'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시골교회의 감동적인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은혜가 충만하였음에도 이 남자는 전혀 은혜 받지를 못하였습니다. 마치 잔치 상 앞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하나도 먹지 못한 사람과 같습니다. 방관자 구경꾼 교인입니다. 은혜는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은혜는 은혜 받을 그릇을 준비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그릇에 가득 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나에게 은혜주시기를 원하는데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왜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감사하지 못하면 은혜가 없습니다. 감사는 은혜의 그릇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은혜가 넘칩니다. 예배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면 어린아이가 설교를 하더라도 은혜를 받습니다. 가정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면 보리밥 냉수 한 그릇으로도 충만한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불평과 원망과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있다면 진수성찬 앞에서도 배가 고플 것이고 금은보화를 보고도 돌로 보여 길바닥에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는 말할 수 없는 감사에 주시는 넘치는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홍해 바다 앞에서 ‘어찌하여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모세를 비난하고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망덩어리요 불평덩어리라 하겠습니다. (출14:10-12) 홍해를 건넌 후에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다음에도 바위가 터지고 샘이 솟아났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불평불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죄의 모양은 바로 불평으로 나타나며 원망으로 보여 집니다. 불평은 죄의 원인이요 원망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들은 만나 앞에서 감사가 없었고 바위가 갈라지고 생수가 솟아나도 감사가 없었습니다. 이 처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감사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은혜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 새로운 은혜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가자마자 길갈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을 불평하지 맙시다, 세상을 원망하지 맙시다. 불평은 마귀의 체질입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낙심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에 베푸신 한량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제사를 드립시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베푸신 한량없는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시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주시고 내 일생 다가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한량없는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시다.
말씀 처음에 스콴토 인디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스콴토는 비록 노예로 잡혀 갔지만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며 그 감사를 자신의 종족에게 알려 주기위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마침내 처음 미국으로 건너 온 청교도인들이 정착하도록 도움으로 추수감사절 예배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함으로 이는 나 한사람에게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로 다가가서 감사의 지경이 넓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감사가 너의 감사로 또 다른 사람에게로 감사가 퍼져갑니다. 그러나 나 한사람 불평하면 너의 불평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로 불평이 퍼져 갑니다. 그러면 감사의 주인공이 되어 축복의 사람이 될 것입니까? 불평의 주인공이 되어 멸망의 사람이 될 것입니까?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고 하였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조베아흐 토다)’ 직역하면 '감사함으로 회생 제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희생제사란 어떤 희생시킬 동물을 끌고 오는 그런 의미 보다는 감사함을 희생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돈 얼마 생색내는 걸로 감사 다 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일생 모두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감사를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에 한없는 감사의 제사를 드림이 마땅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미국에 아주 특별한 상이 있습니다. “최고 영향력 강사”Master of Influence라고 하는 상이 있습니다. 이 상은 미국 강연가 협회에서 그해에 미 국민에게 강연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유명한 대중 연설가라고 인정받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입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er)라는 사람이 상을 받았는데 그는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책들이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75세때 자신의 일생을 뒤돌아보면서 자서전을 썼는데 그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감사뿐이었다. 감사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는 그러한 일생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일생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신은 혼자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천사가 나를 늘 지켜주셨다' 하는 것을 거듭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한 가족들에게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그 딸과 그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준 귀한 동반자였다'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그 이웃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내게 고마운 분들이다. 감사하고, 감사 외에 다른 말이 없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일생이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의 일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지그 지글러의 말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한마디r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목회 43년을 살아오면서 저는 어디서나 스콴토 인디안처럼 섬기며 목회하여 온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나운복음교회에서 10년 그리고 여러분 대부분과 23년을 지내왔는데, 그동안 사랑하는 몇 명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에 보내 드렸고, 몇몇 성도들의 가정도 이루게 하였고, 출생과 돌잔치 예배를 드린지가 엊그제 같은데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 가고... 그동안 여러분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온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이 한량없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고난도 있었고 가슴 터지 듯 아픔도 경험 하였으며 오해와 곡해로 변명도 해명도 못한 채 그저 내 죄가 크도다 회개하며 가슴앓이로 하나님께 몇 날을 엎드려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 새 힘을 받아 살아 온 것을 생각하며 참으로 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어찌 저에게만 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의 일생은 오직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왔음을 오늘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다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심장병동에 가면 지은이의 이름도 없는 무명의 詩가걸려있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2014년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날 구원하신 하나님, 날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나의 생명을 지켜주시며 나의 일생 다가도록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에 더욱 감사의 제목이 풍성한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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