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과 믿음의 공명共鳴
마가복음 2:1-11
찬 송 620, 435
디모데 후서에서는 마지막 때의 일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과 교만이 넘치고, 비방하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않고,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며 조급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딤후3:1-5)
문학가이자 영성가인 제임스 앨런은 “생각하는 데로 살지 않으면, 사는 데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연어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돌아갈 고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살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됩니다. 우리도 믿고 생각하는 데로 살고, 행하지 않으면 환경에 떠밀려 다니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가 악하고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어떤 이들은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가슴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우리는 말씀으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반드시 배의 엔진이어야 합니다. 만약 배가 물결에 의해 움직이고 물결을 따라 움직이게 되면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소문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고, 인산인해人山人海로 동네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며칠이 지나’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 가셨는데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목마름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학설이 아니라 단순한 삶의 언어를 통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가슴을 담은 말씀 이었고,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기에 그것 만으로 충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 듣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네 명의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데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 때문에’(4절)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무리’라고 번역되는 단어는‘오클로스’입니다. 힘이 없는 민초들입니다. 밟으면 밟히고 뺏으면 뺏기고 억누르면 눌려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그들은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 않는 군중들이고, 상황에 따라 그들은 처신을 달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주님의 말씀을 더해보기도 하고 빼 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궁금증이 증폭되어 마치 암울한 현실에서 세상을 뒤엎어 버릴 영웅으로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이라는 장벽에 막혀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그 무수한 사람들이 장벽이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共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들은 중풍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교리에 사로 잡혀 있어서 아픈 사람의 큰 아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를 메고서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면 고침을 받고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네 명의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어쩌면 주님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길이 막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 지붕을 걷어 내고 중풍병 환자를 예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마음에 공명(共鳴)이 열정을 가져옵니다. 사방이 가로막혀 사면초가와 같은 때 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처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무리와 그 네 명의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중풍병 환자가 죄인이라는 통념의 틀 속에 가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아온 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에 공명하고 아픈 이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픈 병자와 어떤 관계이기에 이토록 아픔에 공감하고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장벽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사랑을 말하지만 현실의 장벽 앞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말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한하며 현실에 수긍하곤 합니다. 하지만 중풍병 환자를 데려온 이들은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고 그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장벽이라도 넘어설 용기가 있었고 비난과 손가락질을 감수할 각오가 서 있었습니다. 사랑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5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중풍병 환자를 ‘작은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는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쓰는 말인‘얘야’, ‘아들아’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는 그 중풍병 환자에게 친근하고 다정한 표현을 쓰고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렇게 부르셨을 것입니다. 병의 고통으로 인해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를 더욱 다정하게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실 뿐 아니라 무어라 하십니까?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합니다. 용서하는 분은 누구 십니까?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다 뭐라 말하던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여겨 주셨습니다.
네 사람의 믿음의 결과는 중풍병자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좋아서 자식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둡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은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가를 통해 교리의 틀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구원은 고통과 절망에 빠진 사람을 향한 간절함을 통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남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믿는다고 그와 다른 내가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단독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애절한 마음으로 드린 나의 기도와 삶의 노력은 구원받아야 할(아직은 받지 못한) 그 누군가를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 앞으로 서도록 이끄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위대하신 구원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고, 사로잡힘의 경험,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체험을 통해 구속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 신앙을 있게 한 또 하나의 힘은 바로 다른 누군가의 중보요 신앙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아파하는 심정으로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애통하며 연민을 가지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부르짖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민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딤전2:4)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 나아가 만물의 구원을 위해 부르짖으며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무모한 시도 같아 보여도 남이 아파하는 곳에서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그 아픔을 치유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병자 본인의 믿음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따지고 판단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네 사람, 그들의 믿음이 죄 사함의 원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말씀을 통해 타인을 위한 우리의 공감(共感)과 공명이 분명히 하늘 아버지의 마음과 잇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금주 공과는 지난 주일 임진생목사님 설교 요약)
질 문 1. 중풍병자가 고침 받게 된 기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 우리 주변에 중보기도하고 있는 이웃이 있습니까?
기 도 1. 항상 말씀에 공명하여 순종하게 하소서
2. 전도의 달에 태신자 전도를 위해 기도합니다.
광 고. 1. 10월은 전도의 달입니다. 매주 토요일은 월명산 공원 전도에 동참합시다.
텃밭별로 태신자 전도합시다.
2. 10월 3일은 지방회 전 교인 체육대회에 참가 바랍니다.
3. 2월 중 예배와 행사 그리고 예배위원 미화위원 숙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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