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칼럼 >
  • 칼럼
2014년 10월 5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전병호 2014-10-05 추천 0 댓글 0 조회 659

2014105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롬 7:22-25 수치와 영광

 

 

노래 한곡을 듣겠습니다.

------------------

조용남씨가 부른 시인 윤동주의 서시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1940년대의 많은 문인들이 친일의 길로 빠져버리는 부끄러운 일들이 생갸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둠의 시절을 밝힌 '등불 같은 시인들'이 있었눈대 바로 윤동주라는 시인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19411120일에 無題로 창작한 시였으나 발표되지 않고 있다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로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고작을 모아 펴낸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첫 번째 수록을 하여 序詩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다시 시를 읽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에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구절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입니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잘한 일도 많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인생도 돌아보면 점점이 부끄러운 일들이 인생에 얼룩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고, 두 번째가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며, 세 번째가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남을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이고, 네 번째가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네 마음가운데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갖추어야할 마음을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사회지도층 인사들 가운데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함부로 처세를 하는 통에 더욱 사회가 어지럽고 어두워져 간다고 하겠습니다. 대통령이 아무개를 장관으로 임명하려고 하는데 국회 청문회에서 온갖 부끄러운 추문들이 들통이 나서 장관이 못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렇게 찾다가 장관할 사람이 우리나라에 한사람도 없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이 온통 부끄러운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부끄러운 일 그 자체보다 부끄러운 일을 하고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일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국회의장을 하던 존경받던 사람이 손녀 뻘 되는 골프장 캐디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별일 안했다고 말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임을 말해주는 일입니다. 지난 101일 새벽 050분 경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오리역 사거리에서 우리나라의 탁구선수로 최고였다고 말 듣는 현정화씨가 술에 만취되어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지금 한창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르고 있는 그 심야 밤중에 술에 만취되어 교통사고를 내다니 그로인해 아시아 장애인체육대회의 촌장자리에서 해임이 되었습니다. 술도 마실 수 있고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창 긴장하고 정신을 차려 국가의 위신을 내 세워야할 아시아 경기대회 기간에 우리나라 탁구감독이 술에 만취되어 교통사고를 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지금까지 자기의 아름다운 인생에 먹칠을 한 수치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납니까? 인생의 수치를 잊고들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그렇치 않았습니다.

밀양아리랑에 정든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정든님이 오셨지만 인사하기도 부끄러워 행주치마 입에 물고 인사 한둥 만둥 하는 그런 부끄러움이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수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필의 대가이셨던 고 윤오영씨의 <소녀>라는 수필입니다.

 

<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의 몸매며 옷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 있다는 가정에서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넌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넌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돗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도 훨씬 성숙해 보였다. 반쯤 닫힌 안방 문 사이로 경대 반짇고리들이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막 건넌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 눈썹 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나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 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 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열 세 살 소녀가 벽에 걸린 곤때 뭍은 적삼을 들켜 부끄러워하는 내용입니다. 작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을 그린 수필인데 작가는 각박한 일상에 매여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부끄러움이 인간다운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수필을 읽으면서 부끄러움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으며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오늘의 세태를 가슴아프게 합니다.

 

성경엔 온통 부끄러운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의 역사는 부끄러움의 역사 이였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냥 벗고 살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뱀의 화신으로 사탄이 찾아와서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그 때부터 부끄러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부끄러워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운 일을 하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하고 숨으려 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영어로 'shame'라고 하는데 그 말은 '덮어서 가리우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부끄러움' 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여러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구약에 총 195번이 나오고 신약에는 46번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노아도 홍수 이후에 술에 취하여 벌고 벗고 잠을 자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들 함이 아버지를 비웃다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는 일이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를 애급에서 왕이 두려워 여동생이라 말하여 아내를 빼앗겼던 일이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흉내 내어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대신 받고 도망친 적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루살렘 뒷골목에서 창녀로 변장한 며누리와 잠을 자 아들을 낳기도 합니다. 다윗은 부하 장군의 아내가 탐이 나서 장군을 전쟁터에 나가 죽게 하고 그 여인을 왕비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을 보면 온갖 부끄러운 이야기가 줄줄이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하나님과의 믿음의 언약을 배신하고 바알신 외 여러 이방 우상을 따름으로 성경에는 이것을 음행하는 일로 표현하여 이스라엘이 망한 원인을 바로 이 수치스런 행위 때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6:23-43) 수치스런 일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면 그 보응은 하나님의 징벌이여 멸망이 온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부끄러운 사람들에게서 부끄러움을 제하여 주시고 그 수치를 영광으로 바꿔주시는 반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가? 하나님에게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곧 부끄러운 일을 행하게 됩니다. 죄의 결과는 수치심을 낳고 수침은 파멸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수치심으로부터 건짐 받기 위해선 다시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계속 수치심을 가지고 산다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백제가 망한 이유 신라가 망한 이유 로마가 망한 이유 독일이 망한 이유 바로 저들의 수치심으로 망하였던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수치심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그의 부끄러움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나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는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와야 합니다.

 

50: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신약 성경에서 복음서에 보면 수많은 부끄러운 사람들이 나옵니다. 12년 혈루증 걸린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매우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수가성의 남편 다섯을 두었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음행한 여자로 사람들에게 끌려나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업신여김 받던 눈먼 거지이야기도 나옵니다. 한센씨병으로 부끄러운 인생을 살던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던 세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마치 개에 해당하는 말을 들었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 하녀로부터 비난을 받으니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는 후안무치 철면피한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또 반전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부끄러운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자랑스러운 사람들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인생으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을 통해 성내에 들어가 예수님을 힘 있게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음행한 여인이라 길바닥에 끌려나와 패대기를 받았던 여인은 예수님을 충실히 따른 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했던 삭개오는 이제 전혀 부끄러움 없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순교할 때 까지 사도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평양의 조촉두목으로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지만 그가 예수님에게로 돌아오니 위대한 한국의 목사님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김제 금산 조덕삼씨의 머슴으로 부끄럽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한국 기독교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백낙준 박사는 점쟁이 집 아들로 마마로 인해 얼굴이 얽어 사람들 앞에 부끄러워 숨어다녔으나 예수님을 믿은 이후 그는 당당히 얼굴을 들고 다녔으며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우리나라 초대 참의원 의장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금마복음교회 윤치병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윤치병 목사님은 자신의 이름의 치병에서 치자가 다스릴 였습니다만 부끄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부끄러운 로 바꿔 썼습니다. 윤치병 목사님은 겸손과 범사 감사로 그분을 기억하는 분들은 이구동서 윤치병목사님은 성자이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문제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는가를 알고 그 수치심을 벗어나는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늘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가슴 아파하여 누가 이 수치스러운 죄악의 그늘에서 나를 건저 낼 것인가 애통하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22절 이하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오호라 나는 죄악으로 심히 부끄러워 머리들 수 없는 사람이로다. 누가 이 수치스런 멸망의 자리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입니다.

오직 우리를 나의 수치스러움에서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엄청난 부끄러움을 십자가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의 십자가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림에는 그래도 옷을 입으신 것으로 그렸지만 본래 십자가 형벌은 아무런 옷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채 높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형벌입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그보다 더 부끄러운 죽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2에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나의 언행심사를 부끄러워하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부끄러움을 제하시고 영광의 예수님 우편에 우리를 앉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수치가 영광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105일입니다. 바로 105일의 꽃으로 지정된 꽃이 있습니다. 꽃말 가운데 승리라는 의미를 가진 꽃입니다.

화면을 보십시오. 무슨 꽃이신 줄 아시겠습니까? 노란 주머니같이 늘어진 꽃이 탐스럽게 보입니다.

바로 종려나무 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환영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수치의 너울을 뒤집어쓰고 죄 가운데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로 사단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움 없기를 바라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부끄러운 굴레에서 누가 나를 건저낼 것인가 우리는 탄식하고 부단히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 앞에 회개 자복하므로, 성도여러분,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수치는 부끄러움이나 십자가 앞에서 영광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날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제40과 텃밭 공과 사진 전병호 2014.10.05 0 338
다음글 제 39과 텃밭 공과 전병호 2014.09.28 0 420

573160 전북 군산시 창성동 주공아파트 상가 204호 TEL : 063-445-0724 지도보기

Copyright © 라온 코이노니아.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2
  • Total25,857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