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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1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전병호 2014-09-21 추천 0 댓글 0 조회 515

(*알림* 현재 상태에서  복사하여 옮기면 제대로 복사가 이루어집니다. )

2014921일 주일아침예배설교 갈6:14-17 十字架顯揚

 

누가 10억 원을 줄 터이니 1년간 죄를 짓고 감옥에 가겠느냐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혹 가겠다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윤리연구센터(센터장 안종배)20136월부터 전국 1172명의 초(3086(3520고교생(3566)을 대상으로 청소년 정직지수와 윤리의식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2%가 가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중 고교생의 47%가 가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또 고교생 10명중 4명은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참고서를 빌려주기 싫어서 친구에게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항목은 그렇다는 응답이 초등 22%, 중학 38%, 고교 50%로 나타나고,‘친구의 숙제를 베껴서 낸다는 초등 29%, 중학 74%, 고교 86%가 그렇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이 조사에 의하면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윤리와 정직의식이 위험한 상태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윤리의식이 무너지니 마음들이 혼란스럽고 삶의 기준과 방향을 모른 채 심각한 정신적 장애(트라우마)를 앓고 있습니다.

 

이같은 청소년들의 윤리 의식의 실종이 어떻게 생겨 난 것입니까? 어른들에게서 배워서 생겨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더욱 심각한 것은 오늘날 어른들이 윤리를 잃어버리고 도덕을 상실한 채 오로지 물질우상에 함몰陷沒되어 있습니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 사태는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바닥까지 보여 줬다""우리 사회는 가진 사람들의 도덕의식이 약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직업윤리가 실종됐다"고 말하였습니다. 2014416일 세월호 사태와 1912414`타이태닉호 침몰`을 비교하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타이태닉의 선장이었던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당시 62)은 이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승객들이 질서를 유지 하도록 주의 시켰으며 스스로 배와 함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말하였다는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는 말은 사후 그의 동상에 새겨지기도 할 정도로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속옷차림으로 가장 먼저 탈출하여 무책임 무감각 무능력 3선장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면, 어찌 이준석이란 사람 혼자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정치계 경제계 법조계 언론계 군대 학교 심지어 교회에 까지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은 아주 오랜 옛날 말같이 들려지고 윤리 도덕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찌 오늘의 시대 뿐 이겠습니까? 4000년 전 아브라함 시대에도 의인 열사람을 찾을 수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3000년 전 다윗도 시편 14:3다 치우쳐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2000년 전 바울도 롬 3:10-18에서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인간 세상에는 아주 훌륭한 윤리와 도덕, 법과 규범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악의 역사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험악해 지고 패역한 사람들이 세상에 만연해 지니 마치 노아의 시대를 방불하다고 하겠습니다.

왜 인간세상이 더욱 완악해 져 가고 있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의 심령이 썩어지고 양심이 마비되어 가고 있습니까? 왜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법과 규범이 휴지조각처럼 여겨지는 것입니까? 이유는 모든 인간은 사탄마귀에게 사로잡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와 도덕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법과 규범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죄인 된 인간이 만들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고 법을 안 지키는 것처럼 죄인 된 인간이 수많은 윤리와 도덕, 법과 규범들을 만들었으면서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윤리란 결국 휴지 조각 같고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죽은 나무 같은 율법 일뿐입니다. 오히려 지키지 않으니 더 많은 죄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청소년들에게 예의 없다고 탓할 것이며, 이준석선장만 나쁜 사람이라고 욕할 것입니까?

 

기독교인들은 땅의 율법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의 윤리는 죄 많은 인간에 의한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윤리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십자가 윤리가 있습니다.

 

서울 총신대 심상범교수(신약학)는 바울의 영성을 말하면서 떨림 울림 어울림이란 용어로 설명하였는데 저는 이 용어를 차용하여 십자가의 윤리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십자가의 윤리는 떨림(trmbling)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흑인 영가가 몇 곡 있습니다. 372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463신자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찬송 147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입니다.’

 

찬송 147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예수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Sometimes it couses me to tremble tremble tremble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150년 전 아프리카에, 야곱(Jacob)이라는 흑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라카엘 (Rachael)과의 사이에는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남달리 큰 키에 매우 건장한 사나이었고 밀림 사냥으로 집안을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노예상인들이 이 마을을 찾아 왔는데 야곱을 보자 그렇게 건강한 흑인을 남쪽의 목화농장에 갔다 팔면 매우 고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조건 야곱을 잡아서 미국행 노예상선에다 실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했고 야곱은 큰 목화농장 주인 파라오(Pharaoh) 라는 사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밭에서 일을 하는데 다른 노예들이 이스라엘의 자녀에 대하여 노래하는 것을 들었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집트에서 기독교인이었는데 노예로 붙잡혀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가하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야곱에게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 해 주었고 예수께서 죄인뿐만 아니라 약하고 천하며 보잘 것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도 해 주면서 예수 믿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독과 슬픔 속에 있는 야곱에게 이 이상 더 기쁜 복음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예수를 믿고 곧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는 목화밭에서 일하다가 아내와 어린것이 생각나서 슬프질 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가 다른 노예들에게도 전해져 마침내 전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부르게 되었고 마침내 일반 교회에서도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147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예수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 -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찬송입니다.

 

빌립보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 받은 사람에게 나타난 첫 번째 현상은 두렵고 떨림(포부 카이 트로무)”입니다. 12년 혈루증 걸린 여인이 고침 받은 후 예수님 앞에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5:33)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은 십자가 방법 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일 다른 방법이 있다면 결코 하나님은 십자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니 다른 방법이 있다면 왜 하나님이 모르셨을 것입니까? 수 많은 성인군자도 있었고 별의 별 이론과 학설도 있었고 온갖 종교적 믿음들도 있었고 윤리도덕이 이었지만 그 어떤 처방도 죄의 아주 작은 죄라도 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에너지 보전의 법칙처럼 이 세상 안에 죄의 보전의 법칙만 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땅위의 그 어떤 방법으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 흘리신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음을 아시고 그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오직 예수의 피만을 원하였기에 그 피 값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두 가지 점에서 두려워 떨게 됩니다. 먼저는 높은 낭떠러지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어떻습니까 두렵고 떨게 됩니다. 지금 십자가 앞에서 지옥을 내려다보십시오. 아찔아찔합니다. 만일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어 구원받지 못해 지옥을 내려다보니 두렵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영영 죄의 형벌을 받으리라 생각만 해도 오싹하는 기분이 들며 떨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십자가 앞에서 올려다봅니다. 우리 만왕의 왕 만군의 주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 고난으로 영원히 저주의 심판 받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천국 문을 여시고 우리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니 마치 무지몽매한 미천한 백성이 임금님 앞에 있듯이 전능왕 하나님 앞에서 어찌 두렵고 벌벌 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 입대한 훈련병이 첫날 장교를 보고 떨지 않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면 일등병 보고도 떨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떨지 않는다면 아직 구원의 미완성이요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첫 번째 모습은 떨림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십자가 앞에서 떨림입니다. 이 시간 십자가 앞에서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 떨고 있니?”

 

두 번 째 십자가의 윤리는 울림(ringing)입니다. 기독교는 태초로부터 이어져 온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비밀을 우리는 복음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예수가 복음이요 이 복음이 비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비밀이 알려 졌지만 세상에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은혜로운 말씀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에게 이 말씀이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이 안에 공명이 되어 찬송소리가 울리게 됩니다. 저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듣게 될 것입니다. 울림은 내안에 공명이 되어 입안에 맴돌던 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울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큰 감동의 파장이 요동을 치며 몸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울림입니다. 징을 칠 때마다 징---잉하고 울림이 있습니다. 에밀레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레레레 길게 퍼져나가는 여운을 울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떨림이 내안에 크게 요동을 치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십자가의 울림이 있으니 바로 예수를 믿으시오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고 도저히 마음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여 명동 한복판에 나와 예수 믿으시오라고 외친바 있었습니다. 내안에 십자가의 울림이 튀어 나온 것입니다. 이를 선포라고도하고 전파라고도 합니다. 전도는 내안의 십자가의 울림을 체험할 때 나타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울림을 체험함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수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수없이 십자가 찬송을 부르지만 내 심령 안에 십자가의 울림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울리게 됩니다. 봉덕사의 에밀레종을 만들 때 한 어린아이의 희생이 따랐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내 심령 안에 분수같이 십자가의 사랑이 품어져 오르게 하시므로 예수님의 사랑의 울림이 내 안에 차고 넘치게 됩니다.

 

)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에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딸아 내게 축복하노라

 

성령으사랑 합니다 사랑 합니다 사랑 합니다사랑의 울림이 널리 널리 울려 퍼지게 됩니다. 기독교의 십자가 윤리는 사랑의 울림입니다.

 

세 번째 기독교의 십자가 윤리는 어울림(mingling)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을 닯아 가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까? 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울림이 없다면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나홀로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나잘란 믿음이 아닙니다. 거리에 비가 내립니다. 그 비가 나가는 곳만 따라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립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하나님 사랑이 나에게만 아니라 내 옆 사람에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내리는 어울림 사랑입니다. 어울림 사랑으로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만 높여 드리는 십자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어울려 높여 드릴 때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위에 평화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십자가현양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양이란 높여 드린다란 뜻입니다. 지난 914일이 세속적으로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포토데이(photo day) 즉 애인과 사진 찍는 날입니다. 한주 지났지만 애기 사진도 찍고 부부간에 사진도 찍고 가족사진도 찍고 예배마치고 집에 가시면 사진을 찍으세요. 남는게 사진뿐입니다. 세월을 사진 속에 묶어 두는 일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914일은 십자가현양의 날입니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아내 335년 예수님 무덤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 인들에게 십자가를 빼앗겼는데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628914일 되찾은 날을 기념하여 해마다 천주교에서는 914일을 십자가현양 축제일로 정하고 큰 축제의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두고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만 오늘 설교 제목을 십자가 현양이라고 하여 십자가를 우리의 삶에서 높인다는 의미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 아니 일부 교회에서 입니다만 십자가가 축출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를 가보면 그냥 훵한 강당 분위기로 어디서도 십자가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교인들 심령 속에도 십자가 그늘도 없습니다. 다만 강당 벽에 커다란 화면을 설치해놓고 설교하시는 목사님 얼굴이 커다랗게 보일 뿐입니다. 너무 커서 목사님의 콧잔등 구멍도 보일지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경도 못하는 교회가 무슨 교회입니까? 교회의 중심은 목사님의 커다란 얼굴이 아닙니다. 예배의 중심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그늘아래 편히 쉬고자 우리는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십자가가 사라진 교회는 세속의 물결이 스며 들어오고 죄 사함이 없는 율법만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여기에 걸려 있는 상징으로만 이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아니라 내가 짊어질 십자가로 보여 져야 합니다. 내가 달려 죽어야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너희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 우리가 바라보는 이 십자가는 두 가지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나의 십자가, 그래서 주님과 함께 고난당하고 주남과 함께 피 흘리고 주님과 함께 죽어야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되며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내 몸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흔적이 무엇입니까? 영어로 DD입니다. Daily Die 고전15:31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헤메란 아포드네스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죽어야 날마다 살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말씀을 받아서 Daily Baptism 날마다 세례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죽고 날마다 세례 받고 날마다 다시 사는 사람 곧 기독교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신비를 체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어울림이 되고 그래서 이웃과도 함께 어울림이 됩니다. 기독교 윤리는 그래서 어울림입니다. 십자가의 향기를 온 세계 어울려 평화가 온 땅에 퍼지게 합니다.

 

오랜만에 한 꽃을 소개합니다. 산딸 나무 꽃입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나무(korean dogwood-본래 daggerwood 단도 손잡이나무 106일이 산딸나무꽃의 날)입니다. 온대 중부 이남의 산에서 자라며, 관상수로 심기도 합니다. 산딸나무는 붉은 흙이 그냥 보이는 야산에 자라지 않습니다. 지리산 달궁 계곡이나 무주구천동 등 '청초 우거진' 깊은 산골의 숲 속에서 다른 나무 들에게 시달리면서 자랍니다. 온통 초록의 바다 속에서 산딸 나무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눈 씻고 보아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녹음이 짙어 가는 초여름에 들어서는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예쁜 스타처럼 사람들을 눈부시게 나타납니다. 진한 초록의 잎새로 호위를 받으면서 새하얀 꽃이 마치 층을 이루듯이 무리 지어 피므로 멀리서 보아도 청초하고 깨끗한 자태를 금세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키는 5~10m 정도이며 나무껍질은 어두운 잿빛이거나 갈색으로 나이를 먹어도 갈라지지는 않으나 작은 조각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가지는 층층나무속답게 층을 지어 옆으로 퍼집니다. 잎은 마주나고 달걀 또는 타원 모양입니다. 같은 속인 층층나무, 산수유와 비슷하게 잎맥이 휘어서 잎 끝으로 몰립니다.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잔물결 모양의 톱니가 조금 있습니다. 5~6월에 작년에 난 가지 끝에서 두상꽃차례로 꽃이 핍니다. 9~10월에 딸기 모양의 열매가 붉은 색으로 익어 달아서 먹을 수 있습니다. 복숭아꽃, 살구꽃 등 흔히 보는 꽃들은 대부분 꽃잎이 5개씩 달리는 것과는 달리 산딸나무 꽃잎은 4장이 달립니다. 엄밀히 말하면 순수한 꽃잎이 아니라 잎이 변하여 꽃잎처럼 보일 따름입니다. 이들은 크기가 엄지손가락만 하고 처음에는 연초록이나 완전히 피면 새 하얗게 되며 꽃이 질 무렵에는 끝 부분이 붉은 자주 빛으로 변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트모양으로 두 장씩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십자가(十字架) 모양을 이룹니다. 그래서 여기에 한 전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나무가 바로 이 산딸 나무라는 것입니다. 나무질이 단단하고 속살이 하얀 것이 대패질하면 나무 결이 매우 품격이 있어 서양 사람들이 이 나무를 매우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산딸나무의 꽃말이 바로 희생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윤리는 십자가 앞에 떨림입니다. 십자가의 울림입니다. 십자가와 어울림입니다. 십자가 윤리는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반드시 날마다 십자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왜 온 세계에 기독교인이 25억이 넘고 우리나라에도 일천만 명이라 하는데 이처럼 죄악이 땅에 만연합니까? 먼저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십자가의 희생이 실종되어서 십자가 윤리가 서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서 십자가 윤리가 바로서야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하늘의 평화가 성취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누가 10억 줄 터이니 죄짓고 감옥가라 하면 가겠습니까? 세상에 윤리와 도덕이 바닥을 치고 죄악으로 만연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또한 나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십자가를 높이 내 인생위에 세워 현양하며 나에게 십자가의 흔적이 있음을 기뻐합시다.

 

다만 이제 십자가가 종교적 표식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되며 매일매일 십자가를 체험하므로 살아계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하늘의 평화를 맛보며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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