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3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마 11:16-17 감 각
우리가 어렸을 적에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동리 마당에서 아이들이 모여 쇠구슬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당시에는 유리구슬이 없어 전쟁 통에 부서진 공장에서 여러 가지 쇠구슬을 주어다 놀았습니다. 때로는 총알로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딱지치기도하고 자치기도하고 비석치기라는 놀이도 하였습니다. 여자아이들은 공기놀이를 하거나 고무줄놀이를 하였습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천만이냐’ 하면서 다리를 번쩍번쩍 들며 이리 돌고 저리 돌고 ‘대한남아 가는대 초개로구나’ 하면서 다리를 높이 들어 훌쩍 고무줄을 넘습니다. 처음에 고무줄이 무릎아래 있다가 노래가 계속 되면서 무릎으로 허리로 가슴으로 마침내 머리위로 고무줄이 올라옵니다. 여자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무줄놀이를 할 때 남자아이들이 돌아다니며 칼로 고무줄을 끊어버리는 장난을 합니다. 그러면 여자아이들이 떼거지로 달려오면 남자아이들이 놀리면서 도망을 칩니다. 저도 한몫을 하였습니다. 그때 마당 하가운데서 술래잡기 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하고 검지손가락을 들고 있으면 아이들이 주루루 달려와서 손을 붙듭니다.
그런데 요즈음 동리에 가면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가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학원엘 갔다 오는 아이들을 봅니다. 얼굴이 핼쑥한 것이 어깨는 축 처져 있고 기운이 하나없는 듯 보입니다. 어디갔다 오니? 학원에요. 무슨 과외공부하니? 영어도 배우고요. 한문도 배우고요 피아노도 배우고 와요. 그리고 집에 오면 자기 빵에 문을 꼭 닫고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면 총살이다”라는 팻말을 방문 앞에 걸어놓고 들어 앉아 열심히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요즈음은 핸드폰 게임에 몇 시간이고 합니다. 잠도 안자고 이블 속에 들어가 게임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릴 때 소꼽친구가 없습니다. 함께 들로 산으로 칡뿌리 캐먹으러 다니던 어릴적 우정이 없습니다. 혼자 놉니다. 혼자 공부합니다. 혼자 밥 먹습니다. 친구들과 논다고 하는데 보면 제각기 앉아서 핸드폰이나 게임기로 게임을 합니다. 요 아래층엘 가면 사랑이도 언제부터인가 게임에 빠져 있습니다. 어마가 인사하라고 하면 눈은 게임기에 가있고 고개만 까딱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다 그렇습니다. 제 손주도 일 년에 한두 번 오는데 갈 때 까지 게임기에 빠져 있다가 갑니다. 손주가 할아버지 집에 와도 가슴에 한번 안아 볼 기회도 없습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점점 세상이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는 인정 많고 인심 좋은 그런 세상이 사라져 가고 각박하고 살벌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사촌은 옛말이요 이웃이 천리보다 먼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9월30일 오전 11시30분께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주택 단칸방에서 세 들어 살던 김아무개(67)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집주인(64)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집주인은 “김씨가 백골 상태로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고 경찰에 말했습니다. 숨진 김씨는 두꺼운 옷을 아홉겹이나 껴입고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집 냉장고 안에는 음식물이 없었으며, 거미줄이 쳐진 채 고장나 있었습니다. 경찰은 김씨 집에 2008년 8월부터 체납됐다고 적힌 국민건강보험료 독촉장이 쌓여 있는 점, ‘2008년 김씨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이웃들의 진술, 김씨가 겨울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던 점 등으로 미뤄 김씨가 5년 전인 2008년 겨울께 난방이 되지 않은 집에서 홀로 추위에 떨다가 숨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씨는 2층인 다가구주택의 1층에 보증금 700만원에 월세 10만원을 주고 1999년부터 세평되는 방 한 칸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이 다가구주택 이웃들은 김씨가 숨진 것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집주인도 10 여 년 전 부터 김씨와 따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월세가 밀리자 몇 차례 김씨 집을 찾아갔지만, 문이 잠겨 있고 보증금도 남아 있는 상태여서 발길을 돌렸다고 말했습니다. 부산진구청에서도 김씨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아닌 점 등 때문에 그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도심 주택가에 살던 김씨가 숨진 지 5년이 지나도록 그의 죽음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씁쓸하다. 갈수록 세태가 각박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웃의 죽음을 모르는 사건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그분들과 인사라도 나누고 있는지요? 사회는 점점 나외에 다른 사람에대한 관심을 하지 않고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살아가기가 바쁘고 어렵고 설사 관심을 가진다해도 어쩌면 손해를 보고나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는 감각이 무뎌져 가고 점점 무덤덤 무감각해 져가고 있습니다. 느낌이 없어요. 옆 집 사람이 죽어갔는데 느낌이 없어요. 나하고 상관이 없으닌까? 심지여 같은 교회안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무감각합니다. 같은 교인이라도 그 집에 어려움이 있거나 또는 기쁜 일이 있어도 느낌이 없어요. 나하고 상관이 없으닌까?
요즘 TV 인기인 개그콘서트에 뿜 엔터테인먼트라는 코너가 있는데 거기에 김지민이라는 탤러트가 말합니다. "어. 근데 이게 뭐예요? 아니 이거 남자친구와 식당에서 밥먹는 씬이 있는데. 나 이거 못해요 대역 쓸께요?" 라고 말하닌까 김효원이 말합니다. “그건 중요한 씬이야 대역은 안돼” 김지민이 말합니다. “난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탤런트야 음식 먹으면 살쩌”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아니 여기 쌍욕 하는 씬 있는데." 이번에는 김원효가 먼저 말합니다. “아니, 여배우에게 어떻게 이런 씬을 줄 수는 없지 대역을 쓸게”하니 김지민이 "이건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입에 하도 달고 살아서 잘할 수 있어요."
참으로 이상한 일은 사람들이 느낌을 상실하고 무감각해져가고 있는데 상술은 점점 사람들의 느낌을 자극하는 광고를 하고, 쇼윈도 장식을 하고 백화점 안에 사람들의 감각을 확실하게 살리는 장식을 합니다. 서울 어느 백화점은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장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이쇼핑이나 하자고 백화점을 둘러 봤다가 여기저기 펼쳐 놓은 사람들의 감각을 살리는 분위기에 그만 어느새 양쪽 손에 백화점 상품을 담은 종이 백을 들고 나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백화점 주인이 사람들의 느낌을 아니까!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원래 사람들은 감각이 어느 동물들 보다 뛰어나게 발달한 존재입니다. 청각 미각 후각 시각 그리고 촉각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오감이 발달함으로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오감마케팅을 통해 백화점이 돈을 벌고 있습니다. 백화점만이 아니죠. 커피숍, 식당, 각종 생활상품을 판매하는 상가나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실까지도 이런 감성 체험 마케팅을 함으로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낌을 아니까---”
혹 여분들이 이런 감각 마케팅을 하는 곳에 들어가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자랑이 아니라 감각이 뒤처진 전근대적인 사람이거나 더하면 감각 상실 (sense deprivation)로 살아가는데 엄청난 문제들을 가지게 됩니다. 무감각 그것은 오늘날 심각한 현대병에 속합니다. 바로 지금은 감각시대 이닌까요.
2011년 말에 개봉한 “완벽한 감각, 퍼펙트 센스Perpact sence”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전 인류의 풀리지 않는 이상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 ‘수잔(에바 그린)’. 과거의 아픈 상처로 인해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그녀 앞에 탁월한 재능의 매력적인 요리사 ‘마이클(이완 맥그리거)’이 나타납니다. 사랑에 있어서 냉소적이던 둘은 어느새 운명 같은 이끌림으로 뜨거운 사랑에 빠져들고,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행복을 만끽합니다.
어느 날, 전 세계 곳곳에서 원인도 없이 인간의 감각이 하나씩 마비되는 이상현상이 나타나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감각이 상실될 때마다 사람들은 난폭해집니다. 패닉 상태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급기야 수잔과 마이클도 감염되고 마는데… 냄새도, 맛도 사라져버린, 만져도 느낄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세상… 그래도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
그 질문의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사랑이 점점 감각이 사라져 갈 때 마다 오히려 사랑은 더욱 깊어져 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즉 사랑 그 자체가 “완벽한 감각 퍼펙트 센스”으로 육체의 오감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감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오감을 초월하는 신앙감각(Sence Fidelium) 곧 영적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영이십니다. 볼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그러나 우리는 영적 감각으로 그분을 만나고 보고 그분이 내 옆에서 숨쉬고 계시는 그 따뜻한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감각입니다. 초대교회 오리게네스(185-254)께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듯 영적감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잠2:5에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란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에서 알게 된다는 의미는 ’영적 감각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감각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이를테면 체루빔이나 세라핌 같은 것을 알아보는 시각, 공기의 진동으로 전달되는 소리가 아닌 소리를 알아듣는 청각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 오신 살아있는 떡(요6:33)을 맛보아 알 수 있는 미각이 있습니다. 또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 맡게 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를 감별하는 후각, 사도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손으로 만졌다(요일 1;1)는 촉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영적 감각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시대를 무엇이라 비유할 것입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영적으로 감각 없는 시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부터 2000년 전 시대입니다. 그때 사람들도 감각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십니까? 당시 예수님께서 금과옥조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도 무덤덤 무감각한 바리새인 제사장 율법사들까지 포함된 당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그 기쁨의 자리에 응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의 심정은 매우 슬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무 표정이 없어요,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영적 감각의 상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욕하고 어찌 죽일 것인가 그걸 연구하고 있으니 영적 감각의 상실이 아니라 영적 감각이 사멸 된 사람들이였다고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들으면 느낌이 와야 합니다. 사랑하자 하면 그래 사랑해야지 이런 느낌이 와야 합니다. 기도 합시다 그러면 그래 기도해야지 이런 느낌이 와야 합니다. 선교사를 위해 조금이라도 협력합시다 하면 그래 나는 못가지만 선교지에서 수고하는 그분들을 위해 내 식사 한 끼 않먹고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선교비를 보내야지 그런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태신자 양손전도 합시다 하면 아무게가 아직 예수님을 모르니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든지 강권해서라도 인도해야지 뭐 이런 느낌이 가슴에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감각이 없다면 그건 어떤 증세입니까? 사람들은 오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감각이 있는데 바로 영적 감각입니다. 비록 평소엔 무신론자 였다해도 어떤 고난에 빠지면 아이구 하나님 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영적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단의 역사가 사람들의 영적 감각을 가로 막고 있어 하나님을 모르게 합니다. 전도자의 말에 귀를 막게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라고 하니 다시스로 도망가려다가 고래 먹이가 될 뻔 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마귀가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간 곳마다 전도하여 큰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덴에 가서는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덴은 옛날부터 희랍 신들의 미신의 도시였습니다. 그 곳의 귀신들이 아덴사람들의 영적 감각을 훼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느낌이 없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기쁨의 상징인 피리를 불어도 노래 부를 줄 모르고 슬픔의 상징인 곡을 해도 울 줄을 모릅니까? ‘숨기장난 한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어렸을 적에 동리 한복판에서 소리치면 아이들이 그렇게 달려와 손을 붙들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북치며 동리 한복판을 돌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교회로 들어 왔습니다. 지금은 퇴폐와 향락, 사치와 탐욕이라는 자기 놀이에 빠져 영과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는 귀는 아예 닫혀 있는 것입니다. 롬3:10에 “기록된바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에는 피 흘린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누구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당시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기도합니다. 이 시대 영적 감각이 상실된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다시한번 물어봅니다. 왜 영적 감각이 무뎌지거나 상실하게 되었습니까? 바라보는 목표가 다르고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하늘 아래 땅에서 자기의 행복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이 땅으로 들어오라는 소리뿐입니다. 결국 세상은 죽음을 말합니다. 세상은 오직 파멸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신문을 보세요. 티비 뉴스들 보세요? 맨 죽음과 파멸의 이야기뿐입니다. 생명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느 누가 참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그런 신문 기사 본적이 이습니까? 세상의 뉴스는 그냥 저주와 원망과 비난의 소리만 가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세상엔 애시당초 행복의 소리를 들을수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멍멍하고 소는 음매 하듯이 세상은 저주 저주 하는 말만하고 땅은 파멸 파멸 이란 말만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하는 소리입니다. 이런 소리만 듣고 사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영적감각을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분명히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 죽은 영적 감각을 살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닫혀진 영적감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베토벤의 제 9교향곡 같은, 헨델의 메시야 같은, 바흐의 마태수난곡 같은 음악이 왜 어째서 오늘날 그같은 음악을 사람들은 작곡을 못하는 것인가? 하는 의아심을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베토벤 같은 바흐나 헨델 같은 영적 감각이 크게 뛰어난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레오날르드 다빈치나 미케란제로같은 영적 감각이 훌륭한 화가가 없는 것은 아닌가?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칼빈같은 영적지도자가 없는 것은 그런 영적 감각이 뛰어난 교회지도자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문제는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영과 진리의 소리에 감각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한번 묻습니다. 영적감각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과 코드가 맞는 감각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맞추어지는 감각은 청각 미각 후각 시각 촉각 이런 육적인 감각으로는 코드가 맞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오직 영적 감각이라야 코드가 맞게 됩니다. 우리의 찬송이 하나님께 들려지려면 영적 감각이 열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려면 우리의 영적감각이 하나님과 맞춰져야 합니다. 이단은 왜 이단입니까? 그들의 영적감각이 하나님께 맞춰지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감각이 확실하게 하나님께 맞춰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적 감각이 맞춰지려면 우리의 영적감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지고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영적감각이 닫혀져 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들을 귀는 있지만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복 되도다’ 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말씀에 영적 코드가 맞춰지면 영이 환해지고 쏙쏙 말씀이 마음에 담아지니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면 말씀이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우리의 영이 건강해지고 마귀를 이기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 성도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감각이 깨어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당시 영적 감각이 사라진 사람들은 예수님 헌담 하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라하기도 하고 먹기에 탐한다고도 하고 예수님을 율법을 허는 자라고도 하고 예수님을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라 얏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엔 그렇게 밖에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가성 우물곁에 예수님을 만났던 한 불행한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을 진정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은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었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오늘 우리 백성들의 불행은 세상에서 들을만한 소리가 없는 것이 불행입니다. “무슨 소리를 듣고 우리가 그 소리를 따라가야 할 것인가? 어느 소리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것인가?” 여당 소리를 들을 것인가 야당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덴마크라는 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나라 면적이 우리 남한의 반도 안 됩니다. 그 나라에 그룬드비히(Nikolaj Grundvig, 1783~1872)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자. 이 길만이 덴마크의 살 길이다.” 이 말을 국민들이 잘 들었어요. 그리고 그 말을 잘 지켰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선진국으로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이 나라를 살리며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들의 영적 감각이 깨어나 죽음로 달려가지 않고 멸망길로 달려 가지 않고 다 함께 영원한 생명 축복 인생을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어찌 이일이 부끄럽고 이 말하기가 거북스럽다 할 것입니까? 영적 감각이 깨어난 성도 여러분은 이제 이웃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죽어가는 감각을, 상실된 영적 감각을 깨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오랜만에 여러분에게 세가지 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무슨 꽃인지 알아 맞춰 보십시오.
힌트를 드리면 유채꽃 배추꽃 갓 꽃입니다. 어느 꽃인지 아시겠습니까? 참 아름다운 비슷 비슷 노랑 꽃 입니다. 여기 왼쪽부터 배추꽃 유채꽃 갓 꽃입니다. 비슷하지만 구별하자면 유채꽃은 꽃앞아 서로 붙어 있습니다. 배추꽃은 조금 꽃잎이 떨어져 있고요. 갓 꽃은 조금 더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갓 꽃의 꽃말이 무관심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갓을 다른 야채들 보다 상대적으로 좀 무관심해서 생긴 꽃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은 유래가 있습니다. 인도 신화 이야기입니다. 비크와일리라는 요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정은 매우 아름다웠는데도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살다가 그만 돌이 되었습니다. 그 돌 곁에 어느 농부가 와서 갓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딸을 낳았는데 천하에 제일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그 딸 이름을 비크와일리 라고 지었습니다. 그때부터 갓 채소를 먹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즈음 이때가 갓 김치 담아 먹을 좋을 때입니다. 갓은 여러 가지 효능을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갓 김치 먹으면 예뻐진다는 것입니다. 벌서부터 입맛 다시지 마십시오.
왜 갑자기 갓 김치 이야기를 합니까? 태신자 전도하러 갈 때에 그냥 맨손으로 가시지 말고 갓김치 한보재기 들고 가시면 다음 주일 양손에 태신자를 붙들고 나오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영적 감각이 깨어난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모든 행사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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