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9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눅 15:11-24 뚱딴지 신앙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인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자기도 도시에 나가 사업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물려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먼 나라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가 떠난 먼 나라는 분명 유대인 마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마을에서는 돼지를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요단 동편의 베뢰아지방은 헤롯 안타피스가 다스린 유대인 지역이었습니다. 그 북쪽에 있는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떠난 먼 나라는 아마도 데가볼리에 속한 10개의 이방인 도시 중하나였을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돼지를 많이 키웠는데 가장 값싸고 영양소가 풍부한 쥐엄 열매를 사료로 먹였습니다. 그곳에서 둘째아들은 허랑방탕 지나다가 사업은 실패하고 헌털뱅이 거지 신세가 되었고 더군다나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살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돼지 키우는 집에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이 둘째 아들은 돼지와 싸우듯이 하며 그 돼지먹이인 쥐엄열매를 먹었습니다. 누가복음 15: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여름에 예루살렘 시내를 거닐다 보면 여기 저기 쥐엄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소나무가 자라듯이 이스라엘 어디에서나 이 쥐엄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열매가 여름내 나무에 달려 있거나 땅에 떨어져 있으므로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틴 사람들은 쥐엄나무 밑에 뱀이 꼬인다고 생각하고 집안에는 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에 개의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가자 지구에 사는 유대인 정착촌 주민을 철수시키려 하자 그들은 정원에 쥐엄나무를 심으면서 철수를 거부하였습니다. 쥐엄나무는 심은 지 10년이 지나야 비로소 열매를 맺으므로 쥐엄나무를 심어 영원히 철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이 쥐엄나무 열매입니다.
수많은 쥐엄나무에서 콩깍지 같이 생긴 열매가 땅에 우수수 떨어지면 엄청 많아 수북히 쌓이게 됩니다. 꼬투리는 길이 10~20cm, 폭 2cm, 두께 1cm이고 펄프질로 되어 있으며, 한 그루에서 두 가마니 정도(150~200g)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열매를 주어다가 ‘돼지 밥’으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도 물론 먹을 수 있습니다. 갈색으로 익은 열매를 한 입 베어 물면 처음에는 엿이나 초콜릿처럼 달콤하지만 끝 맛이 떫고 입 안이 텁텁하여 깔끔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궂이 먹으려 하지 않지만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주어다가 먹는다고 합니다. 사실 영양가도 제법 높습니다. 비타민, 당분, 섬유질을 가진 식품으로 최근에는 과자로도 만들고 차로 끓여 먹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슈퍼에서도 팔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쥐엄나무’로 번역된 것은 한국에 있는 쥐엄나무(주엽나무, Gleditsia japonica)와 모습이 비슷하고 열매도 닮았기 때문입니다만 성경의 쥐엄나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식목 행사일인 "투비쉐바트" (Tu B'Shevat - 미쉬나에서 명하는 절기로 대략 1월과 2월 사이에 절기가 있으며 "나무들의 새해 New Year of the Trees" 인 이 날 나무들을 심고 무화과, 대추 야자 열매, 쥐엄 열매, 아몬드 그리고 건포도 등을 먹습니다)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먹는 나무 열매가 바로 쥐엄열매입니다. 왜 쥐엄열매를 먹는가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야드바셈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에는 독일 히틀러 정권하에서 유대인들을 대학살로부터 구해준 이들을 기념하여 심은 쥐엄나무들이 있습니다. 쥐엄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어렵고 힘들때 먹는 음식으로 고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어려웠던 시절에 쥐엄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때에 아람의 벤하닷 왕이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 몇 년 동안 계속된 포위로 성 안에는 먹을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찮은 음식물조차 비싼 값에 팔리는 현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열왕기 하 6:25에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이 두 가지는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먹지 않는 것들입니다. 나귀머리는 물론이고 비둘기 똥을 어찌 먹을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 ‘비둘기 똥-카르요님’이라 함은 진짜 비둘기 배설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찮은 음식물을 빗대어 하는 말로서, 즉 쥐엄염매를 비둘기 똥이라고 한 말입니다. 그러닌까 열왕기 하에서 그 하찮은 비둘기 똥 같은 쥐엄열매도 엄청나게 비싸게 팔렸다는 당시의 어려운 실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참고: 비둘기 똥은 개역성경에선 ‘합분태’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히르이요 님‘으로서 '비둘기 똥'이지만 실제로, 쥐엄열매나, 여물지 않은 콩과 같이 '영양가가 거의 없는 음식물 찌꺼기'(Berleb), 혹은 '작은 곡식'(Wycliff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브'(* )의 정확한 용량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요세푸스는 이것을 '제스테'(* ),즉 라틴어로 6분의 1(sextarius)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의 '유대 고대사' 8장에 57페이지에 보면 보다 정확한 용량을 제시하고 있는데 2/7제스테는 1밧(Bath)과 같고, 1밧은 6/30리터라고 한다. 따라서 1 제스테는 1/2리터 정도이다.)
유대인들의 경전중의 하나인 <미드라쉬>를 보면 유대인들이 쥐엄 열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오직 쥐엄열매를 먹을 정도로 궁핍한 상황과 고난을 겪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다."
그래서 사 1:19-2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여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큰 환난이 올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칼에 삼켜지리라’는 말의 ‘칼’이란 말이 히브리어로 ‘케레브’라하고 쥐엄열매를 “카라브-나무:카루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칼에 삼켜지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지만 불순종하면 쥐엄열매같은 것을 먹게 될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한 말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낱말들을 사용하여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어법이 있었습니다.
더욱 흥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막 1:6에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막1:6)."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나실인 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바쳐져 오직 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을 말합니다. 사사기 13:5이하에서 삼손이 나실인이었고, 삼상 11:1이하에 사무엘도 나실인 이었으며, 눅1:13-15말씀에 의하면 세례요한도 이처럼 나실인으로 택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나실인으로서 사람들 중에 살지 아니하고 유다 광야에 살면서 메뚜기와 석청 즉 벌꿀을 먹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세례요한은 메뚜기만 먹으면서 살았을까하는 의심이 듭니다. 성경을 읽으면 여러 가지로 의심드는 장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잘 모르고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게 될 뿐입니다. 알고 보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메뚜기는 유대 땅에 거의 살지 않습니다. 유대 땅은 6개월 동안 건기로 풀들이 바싹 말라버립니다. 그러니 메뚜기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어쩌다 동풍이 불어 메뚜기 떼들이 날아오는 경우 아니면 메뚜기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례요한이 메뚜기만 먹고 살았을까요?
유대인들은 쥐엄나무를 메뚜기 나무(locust tre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쥐엄 열매와 메뚜기가 서로 생긴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났던 예루살렘 서쪽의 엔케렘 지역은 쥐엄열매가 많이 나는 곳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산지는 쥐엄열매가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말린 쥐엄열매를 가져다가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뚜기를 먹었다는 말씀은 세례요한이 메뚜기처럼 생긴 마른 쥐엄열매를 먹을 정도로 가난과 궁핍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 쥐엄 열매를 가루로 빻아 빵을 만들어 먹는데 이 빵을 미국 뉴욕시장에선 “세례요한의 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맛없고 하찮게 여기는 쥐엄열매가 엄청난 이름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대로 쥐엄열매를 카라브라고 하는데 이 말이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재는 단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의 무게단위를 말할 때에 ‘몇 캐럿(carat)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일 캐럿‘이란 말이 바로 쥐엄열매의 한 개의 무게 0.2그램을 말합니다. 가난함의 상징인 돼지 밥 쥐엄열매가 부유함의 상징인 다이아몬드의 무게 단위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로니(irony)한 일입니까?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Werner Tiki Kustenmacher) 목사님이 쓴 <럭셔리 예수Jesus Luxus> 즉 사치스러운 예수님이란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치스럽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사치의 의미가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리타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5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거의 수입이 없던 그녀의 남편은 몇 달 전 젊은 여자에게 가버립니다. 리타는 가게가 잘 되지 않아서 생활이 몹시 힘들고, 가게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 중입니다. 국가에서 주는 생계 보조비를 신청할 수 있지만 왠지 자존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소득의 대부분이 가게 임대료와 작은 집의 관리비로 들어갑니다. 그녀의 수입은 200유로(약 35만)로 한 달을 먹고 사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리타는 때때로 우울함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어려움을 잘 극복합니다. 어느 날 마허 목사님이 그녀에게 평소 꿈꾸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아늑한 맥주 집에서 맥주와 통닭구이를 앞에 두고, 좋은 사람들과 앉아서 낭만을 즐기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간혹 그런 작은 사치(Luxury) 를 누려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빛이 반짝 거립니다.
퀴스탠마허 목사님은 리타의 ‘때때로 그런 작은 사치를 누려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초적인 의식주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각박한 삶 속에서 잠깐이나마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사치’ ‘럭셔리(Luxury)’라고 합니다.
마허 목사님은 또 한 가지 예를 듭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안젤름 그륀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책의 인세와 강연으로 많은 수입을 얻지만 그 모든 것을 수도원에 온전히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은 강연을 다닐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낡은 중고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언제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강연하고 돌아오는 길에 때로 까페에 들어 카푸치노 커피한 잔을 마시는 ‘작은 사치’를 누린다.” 이 말을 들은 마허 목사님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많은 재산이나 고급 의상, 멋진 파티가 럭셔리한 것이 아니라, 틀에 박힌 삶과 걱정 근심에서 해방되는 것, 바로 정신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그것이 바로 ‘럭셔리(Luxury)’ 사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럭셔리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 야 오늘 너 입은 옷이 럭셔리하구나”라는 말을 하던가 “새로 리모델링한 집이 꽤 럭셔리한데”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돈이 많이 들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치스럽다는 말은 과소비하다라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퀴스텐마허목사님은 그런 사치의 개념이 아니라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한 여성이 좋은 사람과 통닭구이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싶은 그 생각이 참으로 귀하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여유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다보니 그 작은 여유도 그 짧은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안젤름 신부처럼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로운 마음과 풍요로운 그 짧은 한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귀한 럭셔리한 일인가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그 황량한 벌판에서 그러나 쥐엄열매를 씹는 그 순간 세례요한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누리는 그 럭셔리한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낙타 가죽으로 몸을 얼기설기 두루고 쥐엄열매를 먹고 있는 그야말로 쥐엄열매 같은 사나이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쥐엄열매를 먹고 광야에 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려고 오는 것입니까? 그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와서 그의 야단치는 말씀을 듣습니다. “회개하라” 사람들은 각기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심지어 에수님까지도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쥐엄나무 열매 같은 인생을 살던 세례요한은 참으로 빛나게 럭셔리하게 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죽음마저 헤롯왕에게 목 베임을 당하여 죽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추모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
이 세상에 세례요한 보다 더 멋진 사나이가 또 있겠는가? 비록 그의 인생은 쥐엄열매 같은 힘들고 고난의 인생이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주님이 오실 길을 평탄케 하는 사명을 다 이루었기에 세례요한은 이 세상에 누구보다 귀하고 멋진 럭셔리한 인생을 살다 가신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쥐엄열매는 거친 식물입니다. 그러나 가난한자의 동반자로 그들에게 기쁨과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누구에게는 어떻게 이걸 먹어?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또 다른이에게는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식물입니다. 쥐엄열매는 아무나 먹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만 즐기는 식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쥐엄열매는 럭셔리한 식물입닙다. 이 열매를 먹으면서 사람들은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럭셔리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식물을 먹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인생의 새로운 꿈을 꾸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아들이 쥐엄열매를 먹으며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성취하였습니다.
고대 문명들을 보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 피라미드입니다. 굉장합니다. 그런데 실상 그 피라미드를 만들은 사람은 이집트 사람들이 아니라 이집트에 잡혀온 노예들이였습니다. 이집트 나일강 상류에 3500년 전 이집트 왕 라암셋 2세의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상을 이집트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당시 노예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웠던 것입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전쟁의 영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졸병 군인들이 죽음으로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글날이 되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성군이라 칭송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한글은 당시 집현전 학자들 성상문 이개 하위지 같은 선비들이 만들었고 세종대왕은 가끔 찾아와 어주를 내려 격려하였을 뿐입니다. 물론 세종대왕이 훌륭한 왕이었기에 그런 한글을 창제하도록 명 하였지만 한글날에 세종대왕만 아니라 그 집현전학자들에게 감사하는 일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역사 속에 숨겨진 수많은 쥐엄열매 같은 사람들로 인해 그들의 멋진 럭셔리한 인생들이 세상을 발전시켰으며 인류 역사는 더욱 향상되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석가모니 같은 왕자출신이 아닙니다. 공자 같은 귀족 출신도 아닙니다. 작은 나라 가난한 동리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가 태어나 처음 누운 것이 말구유였습니다. 그는 쥐엄나무같이 자랐습니다. 그가 공생애 3년을 사시면서 당시 존경받고 칭송받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율법사들은 마치 쥐엄나무 보듯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별로 대접받지 못한 어부들과 별볼일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고 배고프고 소외된 당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왕따 시킨 사람들을 친구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님은 사역까지도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려서 하셨습니다. ‘빌린 배’에서 가르치셨고(눅 5:3),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도 ‘빌린 방’에 서 잡수셨으며(막 14:12-16), ‘빌린 음식’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요 6:9-13). 또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빌린 나귀’를 타셨습니다(막 11:2).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덤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도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막 15:46).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이 가난해지신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쥐엄열매 같은 인생이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며 기쁨과 만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생은 럭셔리한 삶을, 참으로 세상에 예수님 보다 더 멋지게 귀하게 사신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쥐엄나무 인생을 예수님은 살으셨지만 아니요, 왕후장상 부럽지 않은 럭셔리한 인생을 살으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9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쥐엄나무 같은 인생을 사시어 천하 만민을 살리시니 은혜와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거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에게 예수님은 쥐엄열매 같은 인생을 다이아몬드같은 인생으로 바뀌어 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쥐엄나무같은 보잘것 없는 인생이라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럭서리하게 멋지게 그리고 너무나 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의 인생도 쥐엄열매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무슨 뚱딴지 같은 제목인가 생각하실 것입니다.
뚱딴지 신앙, 뚱딴지 신앙을 가져야한다는 말입니다.
사진을 보겠습니다. 무슨 꽃입니까? 바로 뚱딴지 꽃입니다. 아마도 돼지감자라면 아실 것입니다. 돼지감자를 뚱딴지라고 합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돼지감자 꽃 색깔이 유난히 노랗습니다. 농촌에 가면 마을 어귀에 무성하게 피어있는 돼지감자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자라 하지만 감자같이 뿌리열매를 맺는 것이 비슷할 뿐 감자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돼지감자는 국화과 해바라기속의 여러해살이 식물입니다. 꽃 모양은 얼핏 해바라기를 닮았으나 송이가 훨씬 작습니다. 그래서 “태양의 꽃”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로 인디안들이 주식으로 먹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구황작물 또는 사료용으로 들여와 심기 시작했으나 요즘은 야생화로 인가 주변에 저절로 자라고 주식용으로도 많이 먹고 있습니다.
돼지감자는 독성이 없는 식품 중에 가장 안전한 식물입니다. 돼지감자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통적인 음식으로 먹어왔으며, 유럽에서도 17 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식용으로 사용되어 왔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등에서도 일반적인 식용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식물 섬유가 풍부하게 포함되어 그 함유량은 우엉보다 풍부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체질개선, 변비, 비만증, 다이어트에 매우 효과가 뛰어납니다. 돼지감자는 수용성이므로 흙이 묻은 채로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로 씻어서 보관하면 영양도 파괴되고 곧 시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맛은 달고 성질은 冷합니다. 효능은 청열양혈(淸熱凉血), 활혈거어(活血祛瘀)하여 골절(骨折), 열성병(熱性病)에 효능이 있으며, 무엇보다 소화되지 않은 다당류여서 혈당과 칼로리 증가가 없고 천연 인슐린이라 하는 이눌린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서 췌장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효과가 탁월하여 당뇨병 환자들에게 아주 좋은 식품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플라워'라고도 부르는데 옛날부터 이스라엘에서는 이 돼지감자를 많이 재배해서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당뇨병 환자가 드물다고 합니다.
어째서 돼지감자를 뚱딴지라고 하는가? 사진을 보십시오 돼지감자 모양이 제멋대로로 생겼습니다. 궂이 설명한다면, 못마땅하여 시무룩하다는 의미의 '뚱하다'와 목이 짧고 배가 부른 항아리라는 뜻의 '단지'가 합쳐져서 '뚱단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런 설이 있습니다.
본래 이 뚱딴지 돼지감자는 사료용으로 많이 쓰였습니다. 그러나 가뭄 때 아무런 먹을 음식을 구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이 뜽딴지 돼지감자를 먹고 기운을 차리고 가뭄을 이겨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에서 돼지먹이로 쥐엄열매를 말씀하셨는데 의미로 보아서 돼지감자로 번역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여 봅니다.
세상에서 좋은 집에서 살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그의 인생이 럭셔리한 것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고 높은 빌딩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럭셔리한 것이 아닙니다. 저의 고등학교 동창들 가운데 우리나라 재벌회사 부회장을 지낸 친구도 있고 사장하던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 지금은 아주 무료하게 너무 재미없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회사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럭셔리한 사무실에 여러 명의 비서들이 있고 최고급 외국차를 탈 때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어야 타고 내리며,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집에 있는 집사가 다 해결해 주었는데 지금 은퇴 후 집에 있자니 차도 내가 운전해야 하고 커피도 내가 타먹어야 하는 데 길도 모르고 운전도 서툴고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철도 타 본 적이 없어 모처럼 전철을 타려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냥 집으로 다시 들어온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무료한 하루 하루를 그냥 집에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돼지같이 지낸다고 합니다. 그런 인생이 멋진 인생일 될 수 없습니다.
비록 뚱딴지 인생을 살아간다 하여도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 멋진 럭셔리한 인생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참된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 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기쁨이 되고 어디서나 즐거움을 선사하는 한마디로 쥐엄열매 같은, 뚱딴지 돼지감자 같은 인생이 바로 가장 보람 있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돼지감자 뚱딴지같은 인생을 살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 자신과 친구의 배를 가득 채웠습니다(눅 5:5-7).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부요케 합니다. 작은 도시락을 내어놓았던 어린아이처럼 우리의 작은 것을 드릴 때, 우리 삶 속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요 6:1-13). 그것은 가난한자 같으나 가장 부요하게 럭셔리하게 사신 예수님처럼 나의 보잘 것 없지만 정성으로 나누고 나의 부족한 모습이지만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럭셔리한 보람과 자랑스런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면서도 영적으로 가난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서 나누는 자가 되었을 때 진짜 부요한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최고의 부요함을 나누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눅 19:8). 아나바다정신이 바로 이같은 나눔의 정신입니다. 나의 쥐엄열매를, 나에게 있는 뚱딴지 돼지감자를 나눌 때 그것이 부요합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에게 주어지니 이보다 더 귀한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작은 뚱딴지 신앙이 하나님 나라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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