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2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요 15:5-11 뿌리열매 신앙
추석명절을 주안에서 기쁨으로 잘 보내셨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많이 잡수셨습니까? 추석 음식으로 검정콩이나 깨를 넣어 빚은 송편, 단호박 갈비찜 전어구이 삼색나물로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삼색전으로 동태전 표고버섯전 새우전, 쇠고시산적 송이산적 여기에 나막김치 를 곁들여 이런것을 다 잡수어 보셨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빠졌는데, 추석에 꼭 먹어야할 음식이 있지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토란국입니다. 토란을 쌀뜨물에 삶아 아린 맛을 지우고 소고기 양지머리를 덩어리 채 삶아 육수를 만든 토란국은 그 국물 맛이 깊고 시원하고 맛도 좋고 먹은 다음 속도 편합니다. 이 토란국을 먹어야 추석을 잘 지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토란국에 카륨과 섬유질이 풍부해서 열을 내리고 위 내장 운동을 원활하게 해줌으로 추석에 과식한 음식을 잘 소화시켜주게 됩니다, 특히 천연 멜라닌이 풍부하여 불면증을 치료하는데 효과적이고 시차 해소와 면역력을 강화 시키는데 효과적인 음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토란국을 좋아합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채소 과일들이 재배법이 발달하여 제 철도 없이 사시사철 구입하여 먹을 수 있습니다만 이 토란 만은 추석 전후한 이때 아니면 자연그대로 먹어보기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이 처럼 토란에 대한 애찬론을 펼치자면 한 시간을 말해도 부족합니다. 다만 이 시간 간단히 말한다면 토란은 말 그대로 땅의 알이라 각종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B 당질 단백질등 각 종 영양소가 풍부한 뿌리열매라고 하겠습니다. 주로 가을에 줄기 가지에서 열린 열매도 많습니다만 땅 속 뿌리에 얽기설기 붙어 있는 뿌리 열매들이 대체로 영양이 좋습니다. 감자 고구마 그렇지요. 토란 줄기 밑 둥치에 다닥다닥 토실토실 알알이 달려있는 토란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보는 이마다 가을의 풍족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토란에 비유하여 다시 말한다면, “나는 토란이요 너희는 열매니 그가 내안에 내가 그안에 거하면”이란 말로 표현해봅니다. 종교개혁자요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이 말씀에서 주님과의 신비적인 연합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줄기 열매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고 그 꽃에서 열매가 달린 것과는 달리 땅속 컴컴한 그곳에서 뿌리에 매달려 자라는 뿌리열매를 보면서 우리의 믿음도 그와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자랑 거리도 없고 꽃처럼 풍기는 향기도 없이 땅 밑 같은 어두운 세상 밑바닥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으면서 우리가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원뿌리 되신 예수님께 알토란처럼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비한 삶인 것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비료 주고 병들지 말라고 벌레 먹지 말라고 약도 뿌려주고 비가 안 오면 물도 뿌려주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채소 과수들을 돌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을에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뽑아버리고 잘라버리고 불에 태워 버립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한평생 온갖 고난과 수고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살아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매를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평생 자라온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가을에 어떤 열매로 하나님께 보여 드릴 것입니까?
지난 2001년은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지 100년이 되었습니다. 멜본이라고 하는 곳에서 1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하였습니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그 나라 정치, 경제, 학계, 문화계, 연예계, 최고의 유명인사는 다 모여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대한민국이 100주년이 되는 때는 2045년입니다. 그때 백주년 잔치에 참석할 사람 중에 지금 여기에 그 때를 볼 사람이 몇 분이 있을까요? 그러나 제가 백 살을 조금 더 살아서 저는 꼭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우리나라는 이미 통일조국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세계 2, 3위가 될 것이기 떼문 입니다. 그 날이 오면 백살이 넘은 허리를 꽂꽂이 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호주가 100주년 기념잔치를 성대하게 치루었는데, 김삼환 목사님의 소개에 의한면, 호주 수상이 대회사를 하고 그 다음 세계적인 유명인사의 축사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인사가 축사를 할 것인가 어느 나라 국왕인가 아니면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사람들은 축제의 강단을 큰 기대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누가 등장하는가?' 모두가 바라보는데 놀라운 것은 15살의 소녀가 등장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소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헬리 에버스'라고 하는 한국계 소녀였습니다. 어떻게 엄청난 기념축제에 어린 소녀가 그것도 한국계 소녀가 축사를 한단 말인가 더욱이 호주는 배호주의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영국계 백인이 90%로 비 백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이 아주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계 고등학생, 소녀가 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 소녀가 누구냐 하면 서울에서 어떤 여학생이 탈선하여 낳은 미혼모의 아이였습니다. 그냥 버려졌는데 홀트 아동 복지회를 통해 호주로 입양이 되어서 부모님을 잘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사랑과 믿음으로, 은혜로 밝게 자랐습니다. 많은 상처를 가지고 이 세상에 불행하게 태어난 이 생명이 거기에서 아름답고 향기롭게 꽃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축사자를 선정하기 위하여 천 명의 경쟁자가 수많은 테스트를 하였습니다. 진행과 사상과 실력과 모든 것을 테스트했는데 이 소녀가 1등으로 선택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호주 전국에서 1명을 뽑는데, 100주년 행사에 축사자로 등장하는데 대체로 굉장한 사람인줄 알았지 한국계 아이가, 불쌍한 입양아가 등장하리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 소녀가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밝은 모습으로 "나는 어린 소녀입니다. 나는 이 사회가 변화된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나는 미래의 목소리입니다. 나는 어린 소녀로 여러분 앞에 서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호주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과거를 다 내어놓고 밝은 모습으로 이렇게 전체를 압도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나라가 열광을 하며 박수를 보내었던 것입니다.
호주라는 나라에 한국에서 버려진 한 소녀가 알토란 같이 자라 자랑스런 호주인임을 말해주는 이 소녀는 참으로 자랑스런 호주인이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 서서 담대히 “나는 전에 죄인이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변화되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이렇게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원뿌리로 삼은 인생의 증거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참으로 자랑스런 자녀라 할 것이요 너는 내 기뻐하는 제자라고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런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때부터 죄인 된 사람이였습니다. 그런 죄인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희망이 있고 무슨 보람이 있고 무슨 행복이 있을 것입니까? 성경 전도서 기자가 외치듯 헛되고 헛된 바람 잡는 것 같은 헛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 고등종교는 이 인생의 허무함으로부터 그 종교의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허무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말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 허무함에서 해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다마시달타 왕자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이것을 깨닫고 부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무한 인생이 아무리 깨닫는 다해도 역시 허무 할 뿐입니다. 죄인 된 인생이 죄를 깨달았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존재가 죽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죽음의 존재 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는 것을,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허무한 인생에서 구원하고 죄에서 건져 내며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올겨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죄없이 세상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죄 없이 죽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으며,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영원히 죽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이것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자는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 변화된 증인입니다.
기독교는 얼마나 키가 자랐는가 그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꽃이 아름다운가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뿌리가 얼마나 든든히 땅에 박혀 뻗어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최근에 극동방송국으로부터 전라북도 기독교 선교역사에 대해 매 주 연속적으로 방송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10월 초부터 방송이 나갈 것입니다. 이 방송을 준비하면서 지난 추석날 새벽 기도하는 중에 확 한 환상이 마치 번개치듯 제 머리에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큰 나무로 예루살렘에 심겨지셨고 그 나무뿌리가 계속 뻗어나가는 환상입니다. 유대로 사마리아로 소아시아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인도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뿌리가 뻗어갔습니다. 그리고 2000년 만에 그 뿌리가 우리나라로 뻗어왔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지방으로 뿌리들이 뻗어 갔습니다. 군산에까지 뻗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교회로 뻗어 왔습니다. 저는 소리쳤습니다. 여기 뿌리 끝이 저의 자리이군요. 우리교회는 예수님의 뿌리 끝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알알이 알토란같이 믿음의 열매로 붙어 있는 환상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2000년 전부터 예수님의 원뿌리에서 뻗어나온 복음의 뿌리에 자라고 있는 알토란같은 믿음들입니다. 이 믿음은 오직 뿌리에 붙어 있을 때만이 틈실하게 자라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확실히 이 뿌리에 달려 있는 알토란같은 믿음의 열매를 맺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알토란같은 믿음을 계속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7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말씀하십니다. 거한다는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떠나지 않고”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내 안에 살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헬라어 원어에서는 “메이네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남아 있다”란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 남아 있어야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남아이어야 합니다. 뿌리에 꼭 붙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뿌리를 떠나서 믿음은 곧 죽어 버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에 지금 붙어 있습니까?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저 마르나니”(6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지난번, 텃밭에 심은 고추를 아직은 싱싱하지만 다른 채소를 심기 위해 뽑았습니다. 몇 시간 후에 그 고추 잎들이 축 늘어져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뿌리에서 떨어져 나간 영혼은 죽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주님의 뿌리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 뿌리로부터 하늘의 양분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토실 토실 우리의 믿음의 열매가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해서 예수님 뿌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토실토실한 열매를 누가 거두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알토란같은 믿음열매를 우리에게서 거두시기를 원하시기에 자라가고 있는 이 열매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기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알토란같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작은 꽃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로스알데 힐이라는 작은 동네에 죤(John)이라고 불리는 우편배달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80여 km에 달하는 거리를 오고가며 기계적으로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뜨겁고 건조한 오후의 한 때, 길은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뿌연 흙먼지가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전혀 뜻밖의 생각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나는 내 직업을 그만두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이 흙먼지를 마시며 살아가야할지 몰라.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쳇바퀴와도 같은 삶의 반복으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럴게 아니라 이 황폐한 길에 꽃씨를 뿌려 보자. 내게 주어진 일과 함께 한번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보자!” 그 이후 그는 주머니에 꽃씨를 가득 담아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하여 오고가는 길 양쪽에 꽃씨를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꽃씨를 뿌렸습니다. 해가 거듭되면서 길 양쪽에 드디어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 날이면 그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기뻤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꽃들은 쉬지 않고 피어났습니다. 80여 km에 펼쳐진 그 꽃들은 거리를 아름답게 꾸며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을 또한 풍요로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해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무료하거나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주민 역시 80km의 거리에 이어진 울긋불긋한 꽃길에서 우편배달을 하는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아름다운 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들도 주머니에 꽃씨를 넣어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씨 뿌림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다고 할 때에 무슨 엄청난 큰 것을 생각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 자랑할 그런 열매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땅속에 자리고 있는 작은 토란 알같은 열매를 기뻐하십니다. 길가에 꽃씨를 뿌리는 우편배달부의 그 아름다운 마음이 바로 알토란같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알토란같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아파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테레사 수녀(Madre Teresa)가 미국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짝 야윈 83세의 마더 테레사가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조찬 기도회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연설을 하기 위하여 간신히 마이크에다 허리를 굽힌 상태에서 했던 말은 이것입니다. “미국은 이기적인 나라가 되어서 사랑의 바른 의미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사랑은 아프기까지 주는 것입니다.” (America has become a selfish nation, in danger of losing the proper meaning of love: ‘giving until it hurts.’) 중요한 말은 ‘사랑은 아프기까지 주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프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엄청 아프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실 때에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준만큼 받는 물물교환식의 거래가 아닙니다. 친구를 위하여 아프기까지 피를 흘리는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니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인생의 고통은 잘못된 목표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성공, 기쁨, 만족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깐 즐거움이 온 후에 길고 긴 좌절의 고통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아파하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픈 만큼 사람이 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알토란같은 열매는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빨아드린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열매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알토란같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 기뻐하며 최선을 다하여 열매를 맺어가야 할 것입니다.
고후9:10에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근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근심입니다. 우리가 세상근심은 하지 않아야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근심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근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까에 대한 근심을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온갖 일들에 대해서는 근심하면서, 마땅히 기도해야할 내가 기도를 안하고 있음으로 인해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근심을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일어날 하나님이 불가불 심판의 채찍을 드시면서 슬퍼하시며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근심을 근심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교만하고 다투고 욕하므로 하나님이 근심하고 계신다는 그 하나님의 근심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도하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코웃음 치며 모른척하므로 슬퍼하시며 내게 실망하시는 하나님의 근심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도 죄 가운데 빠져 마귀의 짝으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나를 보시고 눈물지으시며 다시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주님의 근심스러우신 뒷모습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버려진 믿음이요 불에 탈 쭉정이요 그러나 있다면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뿌리를 붙잡고 그 믿음의 열매를 알토란같이 자라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과 동업하지 않고, 예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온갖 일을 다 하며서 어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뿌리에 붙어 알토란같은 믿음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뿌리에 달려 있지 않은 가정 사업 직장 인생에서 어찌 알토란같은 믿음의 열매를 바랄수 있겠습니까? 추수하는 날, 하나님이 캐어 보시고 실망하시며 근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결코 안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래 전 소련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민위원이 집단농장을 시찰하고 일이 잘 돌아가는지 불평은 없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농부가 대답합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수확은 어떤가?” “작황이 점점 개선되고 있습니다” “감자 수확은 잘 되는가?” 농부는 “감자를 수확해 쌓으면 하나님의 발끝까지 이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인민위원이 “소련에 하나님은 없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그렇습니다. 감자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에 열매가 없습니다. 원 뿌리 되시는 우리 주님에 붙어 있어야 달고 맛좋은 행복한 알토란같은 인생으로 우리의 인생이 여물게 됩니다.
이제 40일 태신자 양손전도를 실시합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상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원뿌리에 열려 있는 두 영혼의 믿음의 열매를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된 인생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아침 새벽 기도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요6:30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눅10:2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제가 탄식하며 하소연하는 말입니다.
사6:8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 주소서” 여러분들이 대답할 말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알토란같은 믿음의 열매로 날마다 하나님의 복 주시는 땅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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