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수 1:1-6-9 형통을 위한 묵상
우리는 아무리 클래식 고전음악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하더라도 음악연주를 듣고 좋았다 라고 말하거나 졸려 죽을 뻔하였다 거나 음악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단순히 소리로 듣는 사람과 예술로 감상하는 사람과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음악 연주를 듣고 감상 하는 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품중심 감상법이란 것입니다. 주로 작품을 중심으로 감상하는 사람은 작품의 작곡가를 위대하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감상할 때 작품에서 호수에 비치는 달빛을 연상하거나, 가곡의 왕인 슈베르트의 ‘마왕’을 듣고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 아들이 숲 속으로 말을 달리며 죽음을 유혹하는 ‘마왕’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면 감상자는 이미 ‘마왕’이라는 곡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연주 중심 감상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주로 음악 감상이 작품을 중심으로 감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음악이 일반인에게 보급되고 차차 많은 이가 악보를 읽게 되자 요즈음은 감상의 중심이 작품을 연주하는 연주자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음악회에 간다는 것은 베토벤의 음악을 듣거나 새로운 작품을 알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지휘자가, 혹은 어떤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느냐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시에 연주자의 연주 효과를 평가합니다. 이러한 감상법은 연주가의 연주 기교가 대상이 되며, 연주자가 그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연주결과에 차이가 생기며, 따라서 연주자의 정확한 악곡 해석능력과 표현하는 기술이 청중의 평가 대상과 감상 초점이 됩니다.
미술전람회에 가서 여러 작품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림으로 흩어 보는 사람과 작품 앞에서 적어도 1분 이상 그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과는 역시 문화적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모나리자 그림을 잠시 감상하겠습니다. 아마 이 그림이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이라는 것은 대부분 아실 것입니다. 아마 모르신다면 그동안 전혀 그림에 무관심한 분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모나리자를 보면서 왜 사람들은 이 모나리자 그림에 환호성을 보내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림 자체의 크기는 가로 53cm, 세로 77cm 작은 그림인데 가격을 굳이 따진다면 8,000억 원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가치입니다. 모나리자 그림이 유명해 진 것은 이 그림보다 이 그림속의 모나리자의 미소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세계에 가장 신비로운 아름다운 미소라고 말하는가에 저는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좀 바보스런 미소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뭔가 비웃는 듯한 미소 같기도 하고, 가만히 입을 바라보니 웃기지도 않는데 사진을 찍을 때 억지로 미소를 띨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버드 의과대학 신경학자 마거릿 리빙스톤 박사는 최근 덴버에서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 연례 회의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는 정면보다 측면에서 바라볼 때 더욱 또렷하게 나타난다”며 “이는 인간의 눈이 사물을 인지하는 원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모나리자의 공간주파수가 매우 낮아서 주변시각으로 볼수록 미소가 선명하며 입을 똑바로 바라보면 미소는 사라진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모나리자’를 가장 올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모나리자의 입이 아니라 눈 또는 얼굴의 다른 부분에 시선을 맞추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보지 않고 모나리자의 눈을 보니 정말 모나리자의 미소가 전해져 나도 모르게 미소를 띄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림을 볼 때 가까이 가서 어느 부분만 본다면 전혀 감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그림 전치를 본다면 자기 나름대로 작품 감상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전에 세계 최대 박물관인 런던 국립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세잔느의 그림, 고호 고갱의 그림, 르노아르의 그림을 보면서 너무나 황홀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작 작품마다 감상시간이 1분도 못되는 그야말로 주마강산 감상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다시 와서 실컷 감상해야지 하며 아쉬운 마음안고 미술관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왜 음악 감상이니 미술 감상이니 하는 말을 하는 가하면 바로 다른 말로 말하면 신앙 역시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 예수님을 감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에 대한 감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을 보니 감상感想이란 말이 ‘느끼고 이해하면서 즐기고 평가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며 얼마나 신앙생활 즐거워하고 얼마나 기독교인답게 세상을 지혜롭게 살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走馬江山 달리는 말에서 지나치는 산을 보듯이 그렇게 성경을 읽거나 듣지 말고 성경을 깊이 감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놀라운 천국음악소리를 듣게 되고, 세상의 그 어떤 화가도 그리지 못하는 황홀한 천국 그림들을 보게 됩니다. 이 천국음악을 들은 베토벤이 제9교향곡을 작곡하였고, 헨델이 메시야를 작곡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작사 작곡을 하였습니다. 이 천국 그림을 본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미케란제로가 천지창조를 그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고 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천국에서 들려오는 천사들의 음악소리를 들어보세요, 천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에 떠 올려 보세요. 이렇게 말씀을 감상해 보세요. 그러면 나의 영혼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감상한다는 말을 성경에서 묵상黙想이란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요즈음 성공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묵상이라는 말을 합니다. 즉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을 생각하는데.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패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항상 행복하기를 생각하는데,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한 일들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명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패배를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모세를 비난하다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불행과 고통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승리를 생각하니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 비싼 100억불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쥬라기 공원’등을 제작하여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와 신호등도 있는 큰 집으로, 어떻게 이런 집을 장만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하는 말이 “내가 이런 집을 갖고 싶다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려는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기까지 꿈을 꾸면서 그 꿈만 생각하면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하면 이 꿈을 이루는 흥분 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냥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계속 마음속에 떠올리며 그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되 뇌였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 믿어라.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생각하고 그린대로 이루어진다.”고 말 한 것처럼, 스티븐스필버그도 꿈을 꾸고. 방법을 묵상한 결과 꿈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야구선수가 공을 때리면서 홈런을 치는 것을 생각하면서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언제가 홈런을 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머릿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그리느냐가 나의 인생을 지배하고 성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묵상이란 말이 그런 단순히 자신의 비젼을 상상하고 꿈꾸는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묵상'이라는 말은 ‘보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생각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자나 깨나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듣고 그 모든 구절구절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이 시간 이 예배 시간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 전람회에 와서 예수를 감상하지 못하고 간다면 전람회 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원어에서 묵상(하가)이란 말은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되새김질’하는 것을 말합니다. 먹은 것을 다시 곱씹어 완전히 소화시키는 일입니다. 말씀 속에서 계속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할 때 예수님을 만난다는 기대와 기쁨이 우리의 가슴에 가득하여 벅찬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기본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예배시간에 말씀 듣는 이시간에 마음에 벅찬 감동이 옵니까? 그러나 졸립고 따분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수님을 묵상하며 말씀을 듣는다면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숨소리를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감싸 안아 주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묵상하며 들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성공의 비결로 묵상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에 “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모세의 후임자가 된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백성들을 인도할 그럴 자신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모세가 성공적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왔는가 그 비결을 여호수아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 비결은 바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탄케 될 것이고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평탄케 하고 형통케 하는 비결이 무엇이라고요? 묵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되새김질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스톡데일 파라독스라(Stockdale Paradox)는 말이 있습니다.
2010년 8월 5일, 칠레 북부의 한 광산이 무너졌고 순식간에 33명의 광부가 지하 갱도에 묻혔습니다. 생존자 수색은 진척이 안되고 어디에도 희망의 단서는 없었습니다. 가족들도 정부도 모두 포기한 그 순간, 수색 차 내려 보낸 밧줄에 작은 쪽지 하나가 매달려 올라왔습니다. ‘33명 모두 살아있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63빌딩 2개를 합친 깊이의 지하 700미터에서 그들은 17일 동안 살아 있있었던 것입니다. 33명이 먹을 것이라고는 겨우 하루를 버틸 만큼의 식량. 비스킷 하나, 우유한 모금, 참치 두 조각으로 그들은 17일간을 살았습니다. 실제로 의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비록 죽음 앞에 직면하였지만 그들은 살아나갈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맹목적인 낙관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며 능동적으로17일 동안 죽음의 공포와 맞서 나갔습니다. 바로 죽음의 골자기에 있다 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스톡데일 파라독스라고 말합니다.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5시 55분 서울 삼ㅊ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화점 잔해에 묻혀 502면이 죽고 93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특히 최명석군이 11일 만에 유지환양이 13일 만에 박승현군이 17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유지환양이 구조 직후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냉커피를 먹고 싶다고 해서 큰 이슈가 된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백화점 무너진 잔해속에 묻혀 11일 13일 17일간 생존할 수 있었는가 스톡데일 파라독스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스톡데일 파라독스란 미 육군 스톡데일 장군이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하노이 힐튼 수용소에서 갇혀 지냈습니다. 20여 차례의 모진 고문과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안정한 현실을 견뎌냈고 수용소 내의 다른 포로들을 지켰습니다. 멍하니 혹시나 하는 기대가 아니라 어려운 포로생활을 견뎌나가는 방법들을 고민하고 찾아나갔습니다. 포로 생활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화가 단절된 독방생활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의사소통의 방법과 고문에 견디는 방법도 개발했고 체력 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강한 낙관주의의 상징이자 진정한 영웅 스톡데일 장군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술가 짐 콜린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일 먼저 죽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하던 낙관주의자들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게 되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 또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그들은 냉혹한 현실을 보지 않고 막연한 낙관론에만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낙관주의자들은 성공할 거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는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해야 함을 혼동함으로써 스스로 절명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냉혹한 현실을 무시한 무조건적인 낙관론, 낙관주의자들이 빠지는 함정이자 덫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우린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에 대비하세요”라며 그들을 독려했던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철저한 낙관주의, 반드시 포로생활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이 쉽게, 그냥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현실에 대한 인식, 낙관주의를 유지하면서도 냉혹한 현실에 대한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이것을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말합니다.
적군에게 붙잡혀 감옥생활을 하는 포로들은 일반적으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비관주의자입니다. 베트남 포로들 중 가장 먼저 쉽게 죽어간 사람들이 비관주의 자였습니다. 나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아예 자포자기하니까. 상황보다 더 낙심하여. 몸도 마음도 힘을 잃게 됩니다. 절망하면 힘이 다 꺼지니까. 쉽게 병들고 감기만 들어도 죽습니다. 비관주의에 빠지면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자신을 죽음으로 빠트립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수동적 낙관주의자들입니다. 비록 상황은 나빠도 좋은 날이 온다. 그냥 억지로 참고 좋은 날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아주 수동적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풀려날 것이야. 그러나 아무 변화가 없으니까 실망합니다. 다시 부활절에는 나가겠지.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 . 계속 그러면서 상실감이 점점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미음도 약해지고 몸이 점점 쇠약해져 결국 어느 날 죽습니다.
세 번째 능동적 낙관주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탄절에 나간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반드시 살아서 나간다. 그러니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갈 때 까지 몸도 마음도 건강을 유지하여야한다” 그래서 스톡데일은 몸 관리를 하고 열심히 그 수용소 좁은 독방에서 운동을 합니다. 암호로 부하들을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평탄케 하시고 형통케 하실 것을 믿으면서, 늘 밝고 강한 마음을 유지합니다. 비록 고문당하고 모욕당하고 짐승처럼 먹어도 자신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날이 오리라고 확신하고 참아 견딥니다. 그 결과 스톡데일은 8년 후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많은 전쟁포로들이 죽던지 폐인이 되었지만 그와 함께 있던 포로들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 낙관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가졌다고 비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인생은 고달프고 괴롭고 힘들어도 그 고통스런 인생을 이겨나갈 내적인 힘 곧 믿음을 강화 시켜야 합니다. 낙심치 않고 믿음으로 기다리면 때가 이르매 이루리라고 하나님이 하바국 선지자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기다립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내가 들어가 그 말씀을 먹고 그 말씀으로 내적 풍성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복음성가 33장을 부르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요,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소망이 저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시니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습관적으로 교회나오고, 그냥 말씀을 읽는다고 인생이 평탄케 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에 흠뻑 적셔져서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우리의 삶속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말씀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기쁨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이로인한 은혜로 여러분의 인생이 평탄케 되고 형통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치 않으시리라고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던 스톡데일이 부하함께 그 지옥소굴 같은 베트공의 포로생활에서 살아 나온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능동적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온전히 읽고 듣고 묵상하면서 잠잠히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기도생활 전도생활 충성 봉사를 다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충성 하십시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을 믿고 더 헌신봉사를 하므로 하나님이 나로 평탄한 길로 형통한 삶으로 인도하리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창24: 63에 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창26:13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노예생활과 감옥생활 중에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자유케 하시며 높이 세우시리라 믿고 말씀을 묵상하며 그 때를 기다렸습니다. 창 39:23에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마침내 하나님은 요셉을 애급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 왕에게 쫒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다렸습니다. 시편 63편은 쫒겨 다니던 유다광야 있을 때 지은 다윗의 시입니다. 63:6에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읍조릴 때에...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읍조린다고 번역한 말은 묵상한다는 말과 성경 원어로 같은 말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일생을 평탄케 하시고 형통케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묵상의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인생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평탄케 되고 형통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언제나 인생의 염려와 근심에 묻혀 그냥 이리저리 살다가 죽어가기를 바라십니까?
이런 사람들의 영적 주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기도 어렵군 죽으면 편하리 44번지’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평탄케 하시고 형통케 하시리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영적 주소는 ‘말씀도 풍성하군 묵상하면 형통하리 77번지’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주소는 어느 곳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어떻게 도우실 것인가 잠잠히 말씀 속에서 묵상하십시오.
오늘부터 잠언서 읽고 쓰고 묵상하기 90일이 시작됩니다. 이미 오늘 아침 잠언서 1: 1-6을 읽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회 시에 그날에 주어진 잠언서 말씀을 읽으려 합니다. 여러분께서 90일간 잠언서 말씀을 읽고 듣고 쓰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주시는 평탄과 형통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곡조를 들으시고 하늘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바라보시며 여러분에게 주시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형통의 축복이 항상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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