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5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욥 22:24-26 오빌의 금
지금부터 3000년 전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하여 나라의 지경을 넓혀갔습니다. 그리고 통치 40년 기간 중 7년간 성전 건축, 13년간 궁전을 건축하고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을 비롯해 밀로, 하솔, 므깃도, 게셀, 바알랏, 다드몰 등 전략적 지역에 성을 건축하며 국력을 과시하며 솔로몬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국력은 지하자원이나 농작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솔로몬 왕국이지만, 주요 수입원으로 관세 및 국제무역을 통한 수입으로 충당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고대 문명국인 메소포타미아와 에짚트, 아라비아와 그리스 로마 지중해 국가들과 연결하는 교차지역에 위치해 있어 자연스럽게 육상무역과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전략적으로 건축한 대부분의 성들은 국제 무역로에 위치한 곳으로 하솔과 므깃도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니키아, 에짚트를 연결하는 국제 무역로의 중요 거점이였고, 게셀은 국제 무역로와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또 대하 8:4에 사막의 도시 ‘다드몰’성을 축성하였는데, 후에 팔미라라고 불려 진 중동 최대 무역의 도시로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오빌이란 곳으로부터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3,000달란트의 금을 가져 왔고(대상29:4) 솔로몬 왕은 오빌로 무터 금 420달란트와 백단목과 수많은 보석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당시 오빌이란 곳은 금의 대명사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시편 45:9에는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는 말씀은 금덩어리를 돌덩어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황금의 나라로 부귀영화를 구가하던 솔로몬 왕과 그 나라는 결국은 파멸의 길을 갔었던 것입니다. 황금의 길은 결국 파멸이란 사자가 달려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수많은 역사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다물성이라 불리는 파밀라는 예수님 시대만 해도 로마 다음으로 세계적인 부를 누리며 사막의 신부로 불려지던 도시였습니다. 지금 많은 관광객들이 당시의 화려하고 웅장하였던 유적지를 돌아보며 그야 말로 부귀는 간데없고 모래바람에 파묻힌 채 서 있는 돌기둥들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이루어 논 문명이라는 것이 영어로 낫씽(Nothing), 일본어로 난데모나이(なんでもない) 한자로 이서위박(以鼠爲璞) 우리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입니다. 지식도 명예도 세력도 물질도 다 파밀라처럼 역사의 모래 바람에 묻혀버릴 뿐 이라는 것입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모퉁이에 조그마한 집 하나를 짓고 힘겹게 살아가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맑은 샘물이 나오는 샘터가 있어서 등산을 하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그 산의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사람들은 그 집 앞에 놓여있는 통나무 의자에 잠시 머물다가 샘물도 마시고 커피나 라면을 끓여서 먹곤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껏 그곳에서 쉬다가 다시 등산길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노인은 손수 시원한 샘물을 떠서 그들에게 갖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등산객들은 그 노인이 떠온 샘물을 마시면서 몹시 고마워하였고 그러다가 사람들은 그 노인에게 얼마간의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그 노인은 자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더 많은 량의 샘물을 얻기 위하여 샘터를 넓게 파고 주변에 시멘트를 발라 청결하게 꾸몄습니다. 그 노인은 샘물의 량이 많아지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샘물의 량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 노인은 생각하기를 주변에 있는 소나무의 뿌리가 그 샘물을 전부 빨아먹는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은 그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을 전부 베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샘터는 더욱 말라갔습니다. 마침내 더 이상 샘물이 나오질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샘터를 찾는 사람들도 더 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인은 절망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인의 욕심이 샘을 마르게 하였고 자신도 죽게 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의 입을 벌리고 바쁘게 살아갑니다. 잠언서에서는 이를 거머리 심보라고 말합니다.(잠30:15)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살 수 있을까? 결국 죽기 전까지 끊임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낫씽. 난데모나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였습니다.
욥기에 나타난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이러한 인생을 말해줍니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그래서 욥은 겸손히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23:10)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 하나님을 만난 영혼은 욕심을 버리게 됩니다. 오빌의 금을 게곡의 돌처럼 여깁니다. 보다 높은 인생의 진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막의 길을 가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보석 상인이었고 한 사람은 순례자였습니다. 한 명의 보석 상인이 자신의 보석을 자랑합니다. “우리 집에 가면 주먹만한 보석이 있다네 나는 그 보석을 볼 때마다 인생의 희열을 느끼곤 하지” 이 말을 들은 다른 한 사람이 코웃음을 치면 말하기를 “우리 집 정원엘 가면 주먹만한 보석들로 화단을 꾸몄지. 그 화단에는 백년에 한번 피는 보석 꽃들이 만발하다네” 그 옆에 이를 듣고 있던 순례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보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나에겐 이 물주머니만 있을 뿐입니다.”
사막에서 보석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물 한 모금만 못합니다. 사막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돌덩이 같은 보석이 나의 하나뿐인 생명과 비교한들 낫씽 난데모나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울 양평구 가양동에 가면 한강변에 투금탄이란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허준 선생 박물관이 있는 구암공원 내입니다. 그러나 허준선생을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투금탄이란 이름을 지은 유래가 더 유명합니다.
1294년 고려 충렬왕 20년 때의 일입니다. 성주 이씨 이억년과 이조년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두 형제가 한양으로 오다가 길에서 금덩어리 두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형제간에 각기 나누어 가젔습니다. 두 사람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가다가 동생 이조년이 갑자기 금덩어리를 강에다 내 던졌습니다. 형 이억년이 깜짝 놀라 “아니 동생, 그 아까운 금덩어리를 왜 강에 버리나” “형님, 실은 내 마음에 형님이 없으면 그 금덩어리가 내 것이 될 터인데 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찌 그런 망년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버렸습니다” 형이 말합니다. “참말 미안하네 나도 그런 생각을 하였었네“ 그러면서 금덩이를 강에다 내 던져 버렸습니다. 그 후 그곳을 금을 버린 곳이라 하여 투금탄이라 부르며 형제간의 아름다운 형제애를 사람들은 칭송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투금탄의 유래와 함께 저를 감동케 하는 이억년의 시 한 귀절이 있습니다. 이억년이 개성유수(시장)일을 하다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사직을 하고 함양 산 골로 낙향하면서 쓴 시입니다. ‘千載紅塵夢外事(천재홍진몽외사) 靑山何處獨掩扉(청산하처독엄비)' ”천년의 속세일은 꿈밖의 일인데 청산 어느 곳에서 홀로 대문을 닫아걸고 있는가?“ 천년을 산들 모두가 꿈같으니 무슨 자기가 잘났다고 혼자 떵떵거리고 살 것인가? 세상일은 낫씽 난데모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영(零)에서 시작합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영어시험에 빵점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시험에서는 70점을 맞았고 그 다음 시험에는 100점을 맞았습니다. 영점은 100점의 출발 점이였습니다. 그래서 활쏘기 경기에서 과녁판 한가운데를 영점이라하고 그 점에 화살이 꽂히면 10점 만점을 줍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말하게 될 때, 불교는 없을 무 無의 종교입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도 없다는 것도 없다, 매우 심오한 말로 들립니다. 한마디로 계속 없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非非無想處 이것을 깨닫게 될 때 해탈을 한다고 합니다. 기독교도 무를 말합니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크라티오 엑스 니힐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빛이 있으라(예히 오르)’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곳에 무엇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애당초 없으니 없다는 불교와 애당초 없지만 있게 한다는 기독교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부정적 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긍정적 종교라고 합니다.
지난 20일 MBC 강호동이 이끌어가는 무릎팍도사 마지막 회에서 김자옥씨가 나왔습니다. 김자옥씨가 강호동을 가리켜 말하기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라 그동안 정말 대단한 프로를 진행하였다고 하니 강호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엄청나게 굉장하게 특별나게 귀한 것으로 만드는 창조적 종교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정치권에서 창조경제란 말을 하는데 대기업을 더 큰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 창조경제가 아니라 작은 기업을, 아무것도 아닌 기업을 크게 성장시켜주는 일이 창조경제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로마의 사형수들을 처벌하는 형틀 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이나 만들어 팔면서 살던 아무것도 아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노예였던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미디안 광야 늙은 목자인 모세가 에집트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엑소더스 영웅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어린 목동이 이스라엘 위대한 다윗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기에 별이 그려져 있는데 이별을 다윗의 별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가난한 어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평양의 유명한 조폭두목 김익두가 우리나라 가장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김제 조덕삼 양반집에서 머슴살이 하던 이자익이 목사님이 되고 장로교회에서 유명한 총회장으로 두 번이나 연임하였습니다. 남편에게 소박맞은 문중경이란 여인이 참으로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경상북도 영양군 산골출신으로 맨발로 학교를 다녔던 가난한 소년이 한국의 가장 자랑스런 목사님중의 한분인 김삼환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계곡에 굴러다니는 돌 같은 그런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어떤 동기로 아무것도 아닌 돌맹이 인생에서 오빌의 금같이 빛나는 인생으로 살게 된 것입니까? 무슨 방법이, 어떤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오빌의 금 같은 아름다운 인생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오빌의 금처럼 빛나게 세우셨던 것입니다. 욥의 고백처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이 그들을 순금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 33:6에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금빛 인생으로 살게 하신다는 아주 간단한 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낫씽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 빠져 믿음을 외면하는 그런 사람들이 그런 기독교인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누가 금덩이를 싫어하고 다이아몬드를 마다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과 세상 가운데서 차지하려는 것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으로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가운데서 금덩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믿으려 하니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심순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화면을 보겠습니다. 무슨 장면인 줄 아시겠습니까?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수일을 사랑하던 심순애가 다이아몬드 반지유혹 따라 김중배에게 시집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복수와 황금심이 부른 ‘이수일과 심순애;(장한몽) 노래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
악수논정 하는것도 오날뿐이요
도보행진 산보함도 오날뿐이다
수일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
어이하여 심순애야 못 참았느냐
남편의 부족함이 있는 연고냐
불연이면 금전이 탐이 나더냐
*** 대 사 ***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야몬드가
그렀게도 탐이 나더냐
에이! 악마! 매춘부!
만일에 내년 이밤 내명년 이밤
만일에 저달이 오늘같이 흐리거던
이수일이가 어디에선가
심순애 너를 원망하고
오늘같이 우는 줄이나 알아라)
한때 대단한 인기를 얻은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가 여러 가수들에 의해서 재탕되었고 영화로도 여러번 만들어졌었습니다. 배움은 있지만 가난한 청년 이수일, 미모가 빼어나고 마음이 여린 심순애 그리고 동경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은행가 부자 집 아들 김중배 이 삼각관계에서 단연 문제는 심순애의 변심입니다. 이수일을 생각하면 그의 선한 눈매와 반듯한 이마, 부드럽고 자상한 성품이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그러나 김중배와의 미래가 약속해주는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호화로운 생활도 쉽게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를 사랑해 주는데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은 과연 누구인가?
매혹적이기가 바닥없는 늪과 같은 이 갈등은 어찌 심순애 뿐 입니까. 모든 드라마의 주제가 다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고 특히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마찬가지 갈등의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심순애를 비난하고 다시 심순애와 이수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맺어지기를 응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은 낫씽 난데모나이 아무것도 아니다 인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금 덩어리가 아니고 사랑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사랑이란 것이 너무 쉽게 변질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여인들이 사랑을 알면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따라갑니다.
언제가 물었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금 열 돈을 주고 교회 다니지 말라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아니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금 100돈을 주고 교회 다니지 말라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금 100돈이면 2,000만원이 넘습니다. 그러나 모두 아니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금 1000돈을 주고 교회 나가지 말라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두 세 사람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만 돈을 주고 교회 나가지 말라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몇 사람이 그래도 아니요 라고 하고 몇 사람이 받은 다음에 회개하고 다시 교회 나가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십만 돈은 어떻습니까? 약 2500억 원이나 됩니다. 아무도 아니요 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마도 천만 원 줄테니 교회 나가지 말라하면 그렇게 할 사람들이 우리 중에도 있다고 하면 너무 믿음을 무시하는 질문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세상물질에 비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물질은 결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장롱 깊숙이 금패물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잠시 맡아 있을 뿐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는 103.84 캐럿짜리입니다. 약 1억 달러 천백 억 원을 호가하고 있는 진귀한 보석입니다.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없어 은행에다 보관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 것입니까? 내 집에 둔다고 합시다. 아마도 내 생명 지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금덩이가 아닙니다. 금을 가지려는 욕심이 문제입니다. 사랑보다 돈을 우선시하고 믿음보다 세상을 더 우선하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욕심이란 결국 낫씽 난데모나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어리석게도 불나비처럼 욕망의 불속으로 사람들은 달려갑니다. 세상에 망하는 나라, 망하는 회사, 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욕심 때문에 다 망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원리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 입니다. 영성신학자 토마스 왓슨은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황금의 중량 때문에 지옥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 16:16에는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가 없는 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명철이 없는 은은 돌보다 못합니다.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이 금을 가져야 빛이 나고 명철한 사람이 은을 가져야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오빌의 금이란 것은 결국 계곡의 돌같이 될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게는 비록 계곡의 돌 같지만 오빌의 금같이 귀하게 될 것입니다.
25절에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그러므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은 엄청난 보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보물을 여러분의 믿음이란 보물창고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나는 나무 상자 같은 인생이지만 하늘 보화를 간직하고 있으니 보물 상자 인생입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인생이지만 하늘의 보물을 담고 있으니 가장 귀한 그릇 인생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집이 이건희 회장의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데 공시지가로 118억 원이라고 합니다. 연예인으로 가장 비싼 집에 사는 사람이 조영남씨로 서울 청담동에 60억이 넘는 빌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연 그분들이 만족하게 살고 있을 까요? 미국에서 가장 큰 집은 그 동안은 신문왕 허스트가 만든 허스트 캐슬 입니다. 이 집은 60,645 평방피트입니다. 약 1800평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듀필드라는 부자가 새로 저택을 지었습니다. 집의 크기가 72,000평방피트 약 2,023평입니다. 그 집의 가격만 11억 달러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1조원입니다. 그러나 이런 으리으리한 집도 예수님 안계시면 초옥보다 못합니다. 그 집안이 천국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9세기 세계적인 부흥사 옆에는 쎙키라는 성악가가 찬송을 인도하였습니다. 쎙키가 작곡한 찬송으로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를 비롯하여 7곡이 우리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214, 290, 297, 353, 357, 419, 487, 543). 그리고 20세기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그래함」목사님 집회 때마다 독창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리톤 성악가 조지 베블리 쉐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참 젊었을 때, 미국의 유명한 NBC 방송에서 그때 돈 10억원에 계약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조지야 다시 생각해 봐라!"하면서 말렸습니다. 이 때 작곡한 곡이 94장 찬송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입니다. 그 찬송을 작곡하면서 10억 원 계약에 응하지 않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 전도 대회에서 솔리스트로, 1945년부터 지금까지 일편단심 예수님을 사랑하며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2012년 3월4일주일설교에서 예화로 인용한바있음)
예수님을 세상의 어떤 부귀와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세상의 어떤 보석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금보다 더 귀한 보배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오빌의 금을 찾으려 말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보배로 알고 그대로 믿으면 바로 우리의 인생의 오빌의 금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계곡의 돌 같이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고 나의 삶을 비관 하지 말고 오빌의 금같이 귀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바스의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순전한 금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본래 욥은 많은 짐승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아들과 딸을 많이 가진 부자였습니다. 많은 보화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들이 낫씽 난데모나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고난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이 나의 보배 순전한 금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세상에서 오빌의 금을 얻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빌의 금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전보다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배입니다. 예수님이 보배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보배합이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1에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보배를 찾으려고 믿음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결국 세상에서 찾는 보배는 계곡의 돌 같아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살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계곡의 돌 같은 인생이라도 오빌의 금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탁월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오빌의 금처럼 귀하면 하나님은 오빌의 금처럼 빛나는 인생 귀하고 복된 인생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오빌의 금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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