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8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요 16:33 一身都是膽
오늘은 모든 교회가 8.15광복절 68주년 기념 주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광복절의 노래를 아십니까? 함께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광복절 노래에 40년이란 가사가 있는데 엄격히 말하면 35년입니다. 작사가 정인보 선생님이 사십년이라 하심은 아마도 1905년 11월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이 맺어져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던 때부터 계산하여 40년으로 계산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35년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던 우리나라가 1945년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으니 지난 35년 동안 온 교회가 날마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민족의 자주독립과 해방을 기도하여 온 일에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신 역사라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치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구원하여 주신 유월절 역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온 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제의 억압 식민지 쇠사슬에서 풀어 우리를 출왜국(出倭國) 하게하신일이 바로 광복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온 교회는 이날에 하나님께 광복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하에서 고유한 우리 이름을 못 부르게 하고 우리말도 우리 글 대신 오로지 일본의 그것으로만 쓰게 하였습니다. 일본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 몰았고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어갔습니다. 교회의 종을 떼어가 대포를 만들었고 집안의 숟가락 젓가락을 강제로 공출하여 총알을 만들었습니다. 신사참배를 안 하거나 동방요배를 하지 않으면 불량선인(不良鮮人)이라하여 체포하여 그 사상을 의심하고 고문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우리나라 벡성들이 엄청난 옥고를 치루며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농토와 집을 빼앗기거나 헐값으로 강제 매각하게 하여 결국 땅을 잃은 사람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북만주로 간도로 이주하였습니다. 군산 땅 대부분이 일본사람의 손에 넘어갔고 그래서 소작농으로 수탈을 당하였습니다. 토막민 즉 요즈음 노숙자들로 전국에서 군산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일본의 억압을 당한 사람들, 독립운동하신 의병 독립투사들은 참으로 용기있는 분들이고 담대하신 분들입니다. 담대하지 않은 사람들은 친일하며 附逆者 세월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투사들, 일제의 억압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독립의 의지를 꺽지 않으시고 꿋꿋하게 민족의 얼을 지키신 분들은 참으로 담대하신 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분들을 一身都是膽이라고 말합니다.
중국 삼국시대 유비의 장군인 조자룡이 품에 유비의 아들 아두를 안고 홀로 조조의 백만 대군과 싸우면서 마침내 적진을 뚫고 돌아온 조자룡을 보고 유비가 한말이 子龍一身都是膽也-‘자룡은 온몸이 담덩어리로구나’라고 말하며 놀라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전혀 두려움을 모르며 고군분투한 사람을 향해 일신도시담이라고 말을 합니다. 지난 8월 11일 한국남자농구대표팀이, 지난 10일부터 필리핀 마닐라 몰 오브 아시아 아레나에서 열린 제27회 FIBA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 필리핀과의 4강전에서 79-86으로 패하였습니다. 그러나다 패했지만 칭찬할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인 김민구(경희대 4학년)는 환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새로운 슈퍼스타의 탄생을 알렸던 것입니다. 그는 한국이 큰 어려움을 겼었던 후반에 팀을 사실상 홀로 이끌었습니다. 고비마다 3점슛을 넣었고 투지 넘치는 레이업슛으로 득점 인정 반칙도 유도해냈습니다. 비록 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공격 시도로 27득점(3점슛 5개)을 폭발시킨 김민구는 실로 일신도시담(一身都是膽-온몸이 담덩어리)이었다고 언론이 전하였습니다.
일제시대 수많은 목사님들과 교인들은 일신도시담이였습니다. 비록 일본 헌병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민족을 자주독립시켜주실 줄 믿는다고 외쳤습니다. 그중의 한사람이 28세 일본의 생체실험의 희생자로 세상을 떠난 시인 윤동주입니다. 그의 유명한 시가 있지요. <서시>라고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11월 20일)
죽는 날까지 한 점의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윤동주 시인은 참으로 담대한 분이셨습니다.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것 담대하지 못하면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담대하지 못한 사람들이 거짓을 행하고 불의와 짝하고 부정하고 겁쟁이(chicken)요 얼간이(simpleton)요 멍청이(ninny)요 멍텅구리(loggerhead)요 낙오자(also ran)요 찌질이(nonstarter)로 살아갑니다. 기독교인들은 결코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담대하게 용감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無勇無用이라하였습니다. 용기가 없다면 쓸모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용기 없는 사람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바락 오바마(Barack Obama)대통령이 두권의 책을 썼는데 첫번째 책은 흑인으로써 자라면서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이야기를 쓴 “아버지로부터 온 꿈 Dream from My Father"이란 책으로 주 상원의원이 되고, 지난 2006년에 출간한 ”담대한 희망 The Audacity of Hope “이란 책으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민주당 총회에서 같은 제목으로 국가적 전망에 대해 연설을 하였는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차기 대통령후보 될 자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바가 있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온 세계에 변화와 담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책을 통해서 알렸던 것입니다. 미국은 담대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입니다. 담대하지 못하면 꿈은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습니다.
어째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어갔습니까? 담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는 12지파에서 한사람씩 정탐꾼을 뽑아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따을 탐지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40일동안 탐지하고 돌아 온 12명의 정탐꾼들이 보고하기를 “참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포도송이가 왠만한 아이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그곳의 주민들이 모두 거인들로서 우리가 그들과 싸운다면 게임아웃 패배 할 것이 뻔합니다. 우리들은 그들 앞에 메뚜기에 불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간다면 다 죽을 것이니 결코 올라가서는 안됩니다”라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이구동성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죽는구나 아이고 분해라 애굽에서 죽어 묻을 매장이 없어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죽이려하느냐” 하고 모세를 비난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민14:1-3) 항상 믿음 없는 자들은 원망합니다. 항상 겁쟁이들은 와구와글 한 여름 개구리 울듯 비난들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여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믿는다면 그런 원망과 비난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아니요, 우리는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무시무시한 거인들이지만 다만 우리의 밥이 될 뿐입니다. 두려워 말고 올라 갑시다”(민14:9)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겁쟁이 믿음 없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그 광야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난안 땅에 들어가 그 모든 땅을 차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요, 용기있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다 차지하지 못한 한 곳이 있었습니다. 헤브론이란 곳입니다. 40여 년 전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그처럼 무서워하던 거인족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쪽 방향으로는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미 85세가 된 가렙이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수 14: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
왜 갈렙은 이러한 무서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나운 지역을 나에게 맡겨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미 나이도 팔십 오세 고령으로 젊은이들도 가지 않으려고 꽁무니를 빼고 있는데 내가 그 곳으로 가겠다고 말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갈렙의 특별한 믿음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다른 정탐꾼들이 그들에게 우리는 메뚜기같다고 두려워 하던 아낙자손 거인들을 갈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들은 우리의 밥이 될것이다라고 외쳤었지만 갈렙의 말을 사람들은 듣지 않을 뿐 아니라 갈렙을 죽이려고 달려들기가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그들이 밥인지 밥이 아닌지를 이제 내가 증거하리라. 이런 심정이였습니다.
특별히 이 헤브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코 내버려둘 그런 지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 헤브론에 와서 아내 사라의 무덤 막벨라 굴을 마련하였고(창23), 자신도 그곳에 묻혔으면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 그리고 요셉도 함께 합장한 공동 조상 묘가 있는 곳 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조상들이 묻힌 그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믿음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곳을 그대로 버려둔다는 것은 믿음의 후손된 도리가 아니였습니다. 이처럼 갈렙은 믿음으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담대하게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자기에게 손해가 있을 것 같다 생각되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되면 뒷걸음을 칩니다. 이러 저러한 핑계로 슬쩍 빠질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고 담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피해가려 하면 언제까지나 그것은 어려울 따름입니다. 언제나 나약하고 어리석고 패배자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담대히 나가면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맡겨 주소서. 이 어렵고 힘든 일을 나에게 맡겨 주소서 내가 믿음으로 행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한다이지 안한다가 아닙니다. 좋습니다이지 싫습니다가 아닙니다. 믿음은 환경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환경이든지간에 담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그 고지를 차지 할 것입니다.
미국의 교육가인 존 듀이가 90회 생일을 맞았을 때 누구가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이십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듀이가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산맥은 깊습니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지요.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산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 도전할 높은 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그 인생은 끝난 것과 다름없습니다. 담대한 기독교인은 언제나 산 앞에서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산이 가로막았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피해가지도 않습니다. 그 산을 넘어갑니다. 그 산을 뚫고서라도 갑니다. 이것이 믿음의 담대함이요,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담대함의 표상입니다.
시60: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시리로다”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양목을 하는 이새의 8형제 중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모두 堂堂하고 亭亭하고 軒軒丈夫들이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그 외모가 번듯한 군왕의 면모를 갖춘 형들이 아니라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하여 가장 나이 어린 다윗에게 앞으로 이스라엘 임금이 될 것을 점지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바로 담대함입니다. 무서운 줄 모르는 겁이 없는 소년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3:22). 어린 소년 다윗은 베들레헴 들녘에서 양을 칠때 가끔 굼주린 사자가 나타나고 곰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다윗은 도망가지 아니하고 담대히 사자와 곰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앞에 서있는 2m90cm 넘는 골리앗이 무슨 무적의 영웅으로 보지 않고 다만 곰보다 좀 큰 짐승이라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을 업신여기는 말을 하며 20kg이 넘는 창을 휘두르며 달려온 골리앗이 돌 판매질의 능수인 다윗의 돌에 급소를 맞아 죽었습니다. 어린 포병이 거인 보병을 이긴 사건입니다. 어떻게 어린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병사들이 혼비백산 두려워하는 골리앗 앞에 서서 이길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누구보다 담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담대함이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왔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찌 세상을 두려워 할 것입니까? 오늘의 말씀 요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요한 1서 5: 5에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윗의 담대한 용기는 바로 믿음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이길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두 가지 믿음만을 가지면 됩니다.
첫 번째 우리가 가질 믿음은 ,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믿음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에 여호수아는 겁이 났습니다. 감히 어찌 모세의 후계자로서 소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못해 할 수 없어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때에 모세가 말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런데 사람드은 인생이 외롭다고 말합니다. ‘아묻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산장’에 나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선옥이란 시인이 ‘고독이란 병’이란 시를 썼습니다. 그시의 앞 귀 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고독이란 무서운 병은
항상 나의 삶 속에 자리를 잡고
영과 혼의 주리를 틀고 있다
사랑에 빠지고 그리움에 젖어들면
고독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나의 삶을 지치도록 공격한다
밤새워 울어 보기도 한다
달보고 절규해 보기도 한다
미친 듯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자학도 해 본다
몇 년 전 미국 신문에 한국에서 유학온 여학생이 고층 빌딩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이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고독을 이기지 못해 죽는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녀는 학교 공부가 끝나면 식당에서 그릇 닦기, 청소, 아이 보기 등으로 돈을 벌어 학비에 보태야 했습니다. 언어가 잘 통하지도 않은 데다가 과제물은 산더미처럼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뼈저리게 느껴진 고독은 그녀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고 인생을 이렇게 살 필요가 있느냐면서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문학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헤밍웨이는 자살하면서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처럼 고독하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도 그 명성이 고독을 메꾸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고독과 버림받은 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있지만, 아파트 단지에 닭장처럼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사람들은 외로움에 빠져 있습니다. 흔히 군중속에 고독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나 홀로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2차 3차 술독에 빠집니다. 도박을 하고 극장엘 가고 함께 웃고 떠들고 싸움도 합니다.
한때 패티킴의 초우를 즐겨 부렀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 칠 때
갈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길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
그런데 너무나 사랑했는데 왜 고독에 몸부림을 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독에 이르는 병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시니 우리는 항상 기쁩니다. 도종환 시인은 인생을 독방에 비교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독방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독방에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게시니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내 방안에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참으로 고독했습니다. 아무도 어느나라도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헤이그 국제 평화회의에 참가하였던 이준 열사는 너무나 괴로워 그들앞에서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은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게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봅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이 우리를 도왔습니다. 우리를 알지도 못했던 당시 낮설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군대를 보내고 원조 물자를 보내었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니였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공산주의와 싸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음으로, 그래서 이 삼천리 세계의 독방 같은 외로운 나라 작은 땅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보우하시는 축복이 가득한 우리나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결코 외롭지 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을 가지시어 언제나 담대하게 인생을 노래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가져야할 믿음은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다는 믿음입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맛으로 승부하자.” 이 말의 유래가 있다고 어느 목사님이 소개하였습니다.
독실한 믿음의 가정에 몇 대 독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어머니가 새로 태어난 손자에게 젖도 나오지 아니한 젖을 물리고 빨리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가 놀라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마른 젖을 빨리지 마세요. 제 젖이 잘 나오고 있어요.” 그래도 막무 가내였습니다. 너무나 귀여운 손자를 안고 나가서 노인의 젖을 빨리곤 하였습니다. 고민하던 며느리가 목사님에게 가서 상담하였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목사님이 한 마디로 말했습니다. “그러면 맛으로 승부하세요.”
이 말이 식당가에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무슨 맛으로 세상에서 승부를 하여야 하겠습니까? 바로 선한 맛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래 죄인들 이었기에 자칫 죄의 맛을 보여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맛은 쓰디쓴 소태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선하신 맛을 받아야 합니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신 맛을 맛보셨습니까?
맛을 보기 위해서 직접 먹어서 맛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 3천명과 함께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불레셋 나라로 도망하였습니다.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골리앗을 죽인 사람입니다. 우리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다윗이 사자를 피해 도망했더니 곰을 굴로 들어간 꼴이 되었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방이 다 막힌 감옥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지혜를 주셨습니다. 다윗이 미친 사람 흉내를 냈습니다. 대문에 몸을 긁적거렸습니다. 그리고 침을 수염에 질질 흘렸습니다(삼상 21;13) 아기스 왕이 이런 모습을 보고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미치광이 아니냐? 이런 사람을 왜 내게 데리고 왔느냐? 우리나라에 미친 사람이 없어서 기껏 이런 미친 사람을 내게 데리고 왔느냐?” 그리고 다윗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살아나왔습니다. 그리고 시편 34편을 지어 하나님께 찬양을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면 담대하게 됩니다. 용기가 생겨납니다. 더욱 믿음의 담대함으로 고난을 이기게 됩니다.
어느 믿음이 좋은 여인이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손님들이 밤 늦게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막차도 끊어진 깊은 밤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마치고 귀가려는 데 주인이 남은 닭고기를 싸주었습니다. 박봉에 택시를 탈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걸어서 집으로 오는 데 강도를 만났습니다. 칼을 들이대며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천사를 보내어 지켜 주옵소서!” 그 때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닭고기를 먹어라.” 그 여인은 비닐 봉지에 겹겹이 싸고 들고 오던 닭고기를 풀렀습니다. 닭고기 냄새가 갑자기 진동하였습니다. 옆 쓰레기통을 뒤지던 맹견 두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강도와 여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여인은 그 닭고기를 강도에게 주었습니다. 강도는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은 개를 동원하여 건지시는 하나님의 선한신 맛을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도 천사가 늘 지켜 주는 것을 맛보고 나서 고백하였습니다.
시편34:7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우리민족이 골리앗 같은 거대한 일본의 억압과 학대아래 있을 때입니다. 우리로서 도저히 일본이란 골리앗을 물리칠 수 없어 벌벌 떨고 어찌할꼬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골리앗 같은 일본이 골리앗처럼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그냥 당하고 울고 괴로워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골리앗 일본이 무너지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저는 광복절 노래 2절에 가슴이 아려옴을 느끼게 됩니다.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된 거룩한 빛에 서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다시는 그런 민족적 수모를 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이민족의 치욕스런 지배를 받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세계에 자랑할 그런 축복의 나라로 이 나라를 잘 가꿔 힘써 노력해 야 할 것입니다. 이런 꿈을 꾸며 윤용하 선생님은 광복절 노래를 작곡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인도하시는 우리 민족임을 세계에 나가있는 2만명의 선교사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68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그 선하심으로 우리를 축복하여 주고 계심을 믿고 감사하며, 일시도시담.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담대함으로 가득차 세상과 싸워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