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1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암 8:1-14 한 여름 밤의 꿈
잠시 음악을 듣겠습니다. 무슨 음악 연주인 줄을 금방 아시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 1809 ― 1847)이 작곡한 “결혼 행진곡”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 곡은 느리고 경건한 바그너의 <혼례의 합창>을 연주하고, 신랑신부가 퇴장할 때는 웅장하고 경쾌한 팡파르가 터져 나오는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 이 관례처럼 사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 행진곡이 멘델스존이 지은 어떤 오페라에 나오는 곡인 줄 아십니까? 바로 1834년에 작곡한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오페라의 마지막 사랑하는 연인들의 결혼식에 연주되는 곡입니다.
날마다 정치인들은 대권을 꿈꾸고, 음악으로 평화와 통일 꿈꾸는 윤이상의 나비의 꿈, 스티븐 포스터(1826. 7. 4 -1864. 1. 13)가 꾼 뷰티플 드림머 아름다운 인생의 꿈, 킹목사가 꿈꾸는 개혁의 꿈, 생택쥐베리(어린왕자의 꿈 a goal without plan is just a wish)나, 리차드 바크(Richard David Bach, Richard Bach 1936년 6월 23일- 갈매기의 꿈 the gull sees farthest who flies highest)는 멋진 인생의 이상을 꿈꾸었습니다. 우리 역시 지난밤에 보다 나은 인생, 보다 행복한 삷이 오리라는 희망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 꿈이 아니라구요, 한 여름 밤에 꾸는 꿈들은 대체로 헛꿈일 경우가 많습니다. \
성경에도 여러 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지는 꿈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꿈꾸게 됩니다. 야곱의 꿈(창28:12이하), 요셉의 꿈(청37:6이하) 솔로몬의 꿈(왕상 3:4이하) 다니엘의 꿈(단 7:1이하)에서 하나님의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계획과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아모스가 꾼 꿈도 그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한 여름 밤의 꿈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드리려 는 것은 메델스존의 그런 기쁘고 아름다운 결혼 이야기를 말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슬프고 안타까운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그런 꿈을 꾸는 말씀입니다. 이런 꿈을 아모스 선지자가 한 여름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여름 날 밤 꿈속에 여름 과일이 광주리에 가득히 담아 있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예, 광주리에 가득 담이 있는 여름과일을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끝이 이르렀으니 다시는 저들을 용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여름과일을 보여 주시면서 이스라엘 끝이 이르렀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여름 과일’이란 말은 원어로 ‘카이츠’라고 하는데, 또 '끝', '마지막'등의 의미를 가진 '케츠'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꿈에 여름과일은 곧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여름과실 카이츠를 보느냐 곧 이스라엘의 마지막 날 케츠를 볼 것이다”
아모스는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6.6km떨어진 드고아라는 곳에서 양을 치는 목장장(1:1 노케드. 7:14보케르)으로 그리고 돌무화과 과수원 주인(볼레스)으로 살았습니다.(7:14) 여러 이론이 있습니다만 아마도 아모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소속된 목장과 과수원의 책임자(선지자가 아닌, 제사중의 한사람?7:14,15)로 일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살던 당시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 제 13대 왕인 여로보암2세 시대로 당시 북 이스라엘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틈틈이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아람 왕 벤하닷 3세가 신흥 제국인 앗수르에게 패하여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자 여로보암 2세는 이때를 틈타 아람을 공격하여 영토를 하맛까지 확장시킵니다. 하맛은 이스라엘에 최북단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 경계가 되는 땅입니다. 마치 고구려 시대 만주벌판까지 우리의 땅이 되었던 때를 생각하며 언젠가 다시 회복하고 말거야라는 은연중 우리 민족의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차지하고 싶었던 이스라엘의 북쪽 땅입니다. 모세가 열 두 명의 정탐군을 보냈을 때 하맛까지 가서 정탐하고 돌아왔지만 여호수아는 끝내 차지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솔로몬 시대에 와서 이곳에 국고성을 쌓고 이스라엘 땅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로보암 2세가 그 하맛을 다시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의 경계를 확장 시킨 여러보왕 2세는 여러 국가들과의 무역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라가 부강하고 백성들이 행복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결코 경제 성장이나 군사적 무력 증강이나 외교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국의 레가툼연구소가 2012년도 세계 142개나라중 가장 행복한 나라를 조사하여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27위입니다. 그러나 이 조사는 국가의 경제와 의료시설 교육수준등을 조사한 것으로 실제 국민들이 얼마나 행복감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하고는 거리가 먼 조사입니다. 역시 영국의 "싱크탱크 신경제재단(NEF)"이 전 세계 143개국을 대상으로 해서 발표한 것을 보면 1위가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자메이카 과테말라 순이며 우리나라는 68위로 미국은 114위라는 것입니다. 높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은 오히려 국민들의 정신을 해이하게 하고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문란을 야기 시킨다고 하겠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불행해 지는 것은 나라의 외적인 허장성세가 아니라 내적인 타락과 죄악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천년 신라가 망했습니까? 왜 로마 천년제국이 망했습니까? 불의 부정 부패 불법이 그 나라에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발전하려면 경제 부흥이기 전에 다시 국민적인 도의가 일어나고 윤리가 회복되고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북 이스라엘 여러보암 2세 시대가 그렇습니다. 부가 한 곳으로 편중되어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한편에는 상아 침상에서 기지개를 켜는 바산의 암소같은 비대한 여인들의 호화로운 생활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가난한 자의 인권이 신발 한 켤레 값에 팔려야 하는 비참한 뒷골목의 현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치와 뇌물과 심지어 인신매매의 온갖 부패현상이 만연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모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모스’라는 이름은 ‘무거운 짐진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모스에게 무거운 짐이 지워졌습니다. 흔히 아모스를 가리켜 ‘정의의 선지자’라고 부르는데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은 불의 부정 부패한 북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며 하나니믜 공의의 말씀대로 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마이동풍 소귀에 경읽기입니다. 여전히 불의한 일로 달려가며, 부정한 생활에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축복도, 긍휼도, 인내도 이제는 끝났습니다.북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제는 끝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3절 “그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그날에’는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날이 오면, 북 이스라엘의 막강한 군사력도, 부강한 경제력도, 화려한 문화도 아무 쓸모가 없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안전지대도 완전히 끝입니다.
‘궁전의 노래’는 최상류층만 들을 수 있는 노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맘껏 자랑하며 온갖 쾌락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그 노래는 애곡으로 변할 것이다.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설국열차”라는 영화가 인기라고 합니다. 인류 마지막 시대 마지막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가운데 호화로운 특등인생을 사는 앞칸의 사람들과 마지막 칸에 짐승처럼 사는 하류 인생들간의 싸움을 그린 영화라고 합니다. 결국 그 기차는 파국을 향해 달려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잘사는 사람들과 못 사는 사람들, 잘난 사람들과 못난 사람들이 이와같이 파국으로 달려가는 기차에 함께 타고 있는 공동 운명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 같이 그날에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에언대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난지 30년이 되었을 때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왕에 의해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북 이스라엘은 가장 처참하게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심판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 오거나 아예 오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판 날이 옵니다. 설마 나는 심판 날에 예외일 것이야. 착각입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착각도 유분수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나쁘고 자기만 옳다고 착각합니다. 자기 믿음은 좋은데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안 좋다고 착각합니다. 자기는 회개할 것이 전혀 없다고 착각합니다.
죄인들이 날마다 회개를 미루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 올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눅 12:45에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던 종처럼 사람들은 날마다 착각하며 삽니다. 바로 그들 앞에 지옥 문이 열려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본문에 경고되었던 파멸은 결국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멸망의 임박에 대한 전조는 ‘여름 실과 광주리’였습니다. 여름 실과가 무르익으면 따서 광주리에 담아 옮기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그들을 들어 이방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4절에 “가난한 자(에비온:궁핍한자)를 삼키며(원어 샤아프:짓밟다) 땅의 힘없는 자(아나빔: 가난한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부유한 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5-6절에 보면 아모스 선지자가 그들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에바(18리터)를 작게 하고 세겔(12그램)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지 밀(마팔:밀기울)을 팔자”
에바는 부피를 재는 도구입니다. 당시의 장사꾼들이 에바를 작게 했습니다. 당연히 줘야 할 만큼의 양을 주지 않고 받은 돈보다 적게 주었습니다. 세겔은 무계의 단위인데 가벼운 물건을 무거운 것처럼 저울을 속이고 비싸게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곡식을 판다고 하면서 속에는 잔뜩 밀기울을 넣어 팔았다는 것입니다. 일당이 10만원이라 하면 짚신 한 켜레 값도 안 되는 1만원에 노동력을 착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모스는 지금부터 2700년전 사람입니다. 2700년전 북 이스라엘 사정과 오늘의 우리를 비교할 때 마치 오늘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만일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방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전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수주일하든지 말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말든지 기도를 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며 애굽에서 구원해낸 10지파 사람들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도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예배도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온통 관심은 세상적이요 물질적이요 모든 게 형식적이고 외식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조금치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지금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혹 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딴 생각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라고 하면 곧 정신을 바로 차려야 합니다. 어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 장사하는 일과 연관시킨다고 합니다, 찬송가 234장을 부릅시다하면 오늘 손님들이 234명만 있으면 좋겠다. 요한복음 3장 16절하면 석장이면 300만원이니 오늘 예배 끝나자마자 빨리 가서 가게 문을 열어 316만원을 벌어야지. 뭐 이런 생각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은 물건을 팔 때마다 잠시 묵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돈 버는 재미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돈이 들어올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7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네차흐:영원히) 잊지 아니하리라”
어째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되었습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 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 말씀은 서로 반대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과 만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면 그런 재앙을 당하지 않거나 다시 회복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닌까 문제는 왕이 정치를 잘한다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경제가 왕성하게 일어난다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군사력이 탄탄하다가 이것으로도 재앙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누가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와 재앙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 가면 사직공원이 있습니다. 본래 조선 왕실에서 나라가 위급할 때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에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던 장소입니다. 왕의 권세로 그 어떤 재앙을 막아 낼수 없다고 생각하닌까 하늘신 땅신에게 빌어 해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경제문제가 있습니다. 질병문제가 있습니다. 직장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답답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입니까? 대통령과 의논할 것입니까? 시장을 찾아가 물어볼 것입니까? 병원 원장이 고쳐 줄 것입니까?
우리는 확실하게 믿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떤 경우에도 나는 일어서리라 나는 다시 일어나리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줄 알기 때문입니다(롬8:28).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대한 확신입니다. 구하라 했으니 나에게 주신 말씀을 구해야 합니다. 찾으라 했으니 진리의 말씀을 찾아야합니다. 두두리라 했으니 말씀의 문을 두두려야 말씀의 보물 창고 문이 열려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되고 재앙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판을 당한 다음에야 12절에 사람들이 바다 이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말씀을 구하고 찾아 다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고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때가 늦었습니다. 이제는 기회가 지나갔습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아모스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망해서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고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흔적도 어디서고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듣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말씀이 홍수같이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귀한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되고 하늘의 만나를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보암 2세의 시대를 방불한 지금 이 시대가 아닙니까? 사람들의 귀가 어두워져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하고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은 말씀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 불순종하게 되고 그러니 제 생각대로 믿는다고 합니다.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말씀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사탄의 침노를 받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그 뿌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닿아 서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시절을 좇아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만사가 형통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악인은, 즉 복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의 뿌리를 두지 않은 악인은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 때 왕겨와 같이 흩날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생사의 형통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넘치느냐,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닿아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로 정약전 선생님이 게셨습니다. 그분이 흑산도에 유배를 당할 때 기록한 책이 “자산어보(玆山魚譜)”라하여 우리나라 어종에 관해 기록한 책입니다. 어떤 분이 대학생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정약전 선생이 우리나라 어종에 관해 쓴 책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부분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한 학생이 용감하게 대답하기를 “월간 낚시 책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대학생 선후배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식당 벽에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는데 후배 학생이 “형 저게 무슨 말이야”하고 묻자 선배는 한참 생각하더니 의기양양하게 “응, 저건 음식 남기지 마” 라는 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기독교 재단 초등학교에 재단 이사들이 학교를 시찰하게 되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긴장하여 아이들을 교육하였습니다. 맨 앞줄에 앉은 철이에게 “너는 누가 만드셨니” 하고 물으시거든 “하나님입니다”라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뒷줄 영이에게는 “너를 길러준 분은 누구냐”고 물으시거든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라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철이는 화장실에 갔고 그 사이에 이사님들이 갑자기 교실로 들어오셨습니다. 둘째 줄에 앉아있는 영이에게 “누가 너를 만들었지?”라고 묻자 교육받은 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드셨어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사님이 “아니, 하나님이 아니구?”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이 아이가 참으로 정직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이는 화장실에 갔어요.”
우리가 말씀에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도 엉뚱깽뚱한 답을 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결국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고 세상의 유혹에 나의 믿음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힘들지 않습니까? 가정문제가 이리저리 꼬여 풀리지 않습니까? 하는 일마다 자꾸 꼬여만 가지 않습니까? 몸은 고단하고 하는 일마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고 병고에 시달려 어찌할줄 모르는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령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수원이 흘러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를 막고 마음을 닫고 생각이 세상을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였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물 없는 웅덩이에 물고기가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이나마 귀 기울이고 마음에 담아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해 보십시오. 여름날 시원한 냉수 같아서 우리의 인생을 단번에 시원케 할 것입니다. 행복의 날개가 펼쳐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한 여름 밤의 꿈, 아모스는 여름 실과 한 광주리 꿈을 꾸며 임박한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미리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밤 무슨 꿈을 꿀 것입니까? 금송아지 꿈을 꾸거나, 황금돼지 꿈을 꾸면 좋겠습니까? 결코 꾸지 말아야 할 꿈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그런 꿈은 꾸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불의 부정 불법이 사라진 정의로운 나라이기를 꿈꾸어 봅니다. 남북한 간에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꿈꾸어 봅니다. 군산이 복음화 되고 우리 교회의 비젼 군산 시민 1%가 달성되어 드리는 감사예배를 꿈꾸어 봅니다. 우리 각자의 소원이 하나 하나 꿈속에서나마 다 이루어지기를 꿈꾸어 봅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꿈속에서라도 주님 만나서 사랑의 말씀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냉수 한잔 마시고 잠들면 좀 더 시원한 잠을 잘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밤 잠들기 전 성경 말씀 단 한 절 말씀이라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주님과 함께 신나게 여행하는 그런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꿈을 꾸면서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꿈,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그런 꿈들을 말씀 안에서 꿈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지만 아름다운 꿈을 꾸며 주안에서 편히 잠이 드는 한 여름 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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