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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4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전병호 2013-07-14 추천 0 댓글 0 조회 76

2013년 7월 14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골 1:15-20    예수님은 누구신가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전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 말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 어디에 있던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바로 그 시간은 복 받은 시간이요 바로 그 장소는 복 받을 장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예수님이 우리와 하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8년 동안 귀신의 사슬에 묶여 허리가 구부러진 채 살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눅13:10이하) 참으로 불쌍하고 보는 사람마다 안타까워하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귀신의 사슬을 풀어 해방시켜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1절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라는 구절이 있는데 헬라어 본문에 보면 “이두”라는 말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말은 “보시오” “여기 한 여인을 보시오”라는 의미로 이 말이 빠져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이 성경책을 읽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 이 여인이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가를 마치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하상상하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한번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머릿속에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날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잠시 눈을 들어 회당 문 입구 쪽을 바라보시니, 피골이 상접하여 병색이 가득한 한 여인이 기둥아래 엎으러져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저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귀신이 들려 허리가 구부러져 펴지 못한 채 스스로는 단 한 걸음도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의 병이 치료 되었습니다”.(구나이, 아포렐루사이 테스 아스데네이아스 수)

언제가 “세상에 이런 일”이 라는 TV프로를 보았습니다. 떠돌이 개 한 마리가 허리에 쇠줄이 매여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풀지 못하여 쇠줄에 묶인 자리가 썩어 들어가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여 누구도 그 개 옆에 갈 수 없었습니다. 붙잡으려 하면 도망치고, 가까이 가면 사납게 짖고, 결국 마을 사람들이 체포하는 일을 포기하고 방송사에 알렸습니다. 119 구조팀이 나와 작전을 개시하여 결국 그 개를 붙잡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떠돌던 개가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올가미에 걸려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는데 다행히 줄을 끊어주고 치료해 주었고 어떤 분이 그 개를 키우기로 하였습니다. 개는 쇠사슬에서 놓여났고 좋은 주인도 만났습니다.

18년 귀신의 사슬에 묶여 있던 여인이 예수님에 의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병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병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약함 (아스데네이아 cf롬8:26)’ 이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이 연약한 여인을 다시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 갈 수 있는 건강한 여인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마 8:17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이러 저러한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란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가난하여 인생에 아무런 기쁨도 평안도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이 가난이란 사슬에서 그를 풀어 기쁨을 회복하고 평안함 삶을 살게 할 것입니까? 반면에 어떤 사람은 물질이란 사슬에 묶여 평생 돈 돈 돈 하며 삽니다. 돈 버는 일에 자신의 청춘도 자신의 가족도 자신 사랑하는 사람도 다 잊어버리고 다만 돈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아무도 그를 위해 울어줄 사람도 없이 쓸쓸히 화장터에 한줌의 재가 되어 강물에 뿌려 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묶여 삽니다. 정치인은 정치에 묶여 있고 권력자는 권력에 묶여 있고 명예를 탐하는 자는 명예에 묶여 삽니다. 누가 그들에게서 사슬을 풀어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세상에서 매어진 사슬로 부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제 귀에 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몇 달째 임금을 받지 못한 이주 노동자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甲의 횡포에 울고 있는 乙의 중소 상인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개성공단에서 전 재산을 두고 온 기업인들의 소리도 들려옵니다. 서울 지하도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노숙자들의 소리도 들려옵니다. 누가 그 들의 사슬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뿐이십니다. 왜 예수님뿐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밭농사를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밭농사에 가장 귀찮은 일은 바로 잡초를 뽑아 주는 일이라고 합니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 잡초들이 우후죽순 여기 저기 자라나고 있습니다. 돌아서면 나오고 죽었는가 싶으면 다시 살아나고 잡초와의 전쟁을 여름내 벌리고 있습니다. 어느 조사보고를 보니 한 평에 9144개의 잡초 씨앗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하루를 살면서 우리는 수십 수백 수천의 죄를 짓고 삽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요일 2:16)에 따른 죄가 우리들의 삶속에 잡초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뽑아 주지 않으면 며칠만 지나면 무성하게 우리인생은 죄의 밭이 되 버리고 기쁨의 꽃 행복의 열매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궁궐 옥상 위를 거닐다가 멀리 어느 한 곳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심령에 음란이란 죄의 잡풀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죄의 잡풀이 돋아나자 이어서 거짓의 잡풀이 돋아났습니다. 그 뒤를 이어 살인 이란 독풀이 자라났습니다. 결국 이 독풀로 다윗 왕가에 엄청난 피비린내 나는 불행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은 오늘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두루 다니며 사람들의 심령에 죄의 씨앗들을 뿌려댑니다. 여러분들의 심령에 이 사탄이 뿌리고 간 죄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이 씨앗들이 여러분의 인생을 불행하게 할 것입니다. 가난하게도하고 병들게도 하고 사업상 어려움이 오게 하고 가족 간에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는 각가지 괴로운 독초들이 자라게 합니다. 급기야 실패하게 하고 망하게 하고 지옥에 떨어지게 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 속에 사탄이 뿌린 죄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에 뿌린 죄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혀에 죄의 씨앗을 뿌려 되어 말만 하면 죄를 짓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겐 손바닥에도 뿌리고 발바닥에도 뿌립니다. 그래서 만지는 것 마다 죄요 가는 곳마다 죄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상한 사람들이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허리가 꼬부라져 펴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그때가 되어서 ‘아! 내가 잘못하여구나’ 라고 후회하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 책임자가 아이히만 이란 사람이였습니다. 그야말로 야차 같은 그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무시무시한 사람이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이름을 속이고 아르젠틴을 도망가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15년 만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서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 중 증인으로 예이엘 디무르라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아이히만을 뚫어지게 한참 바라보더니 그만 기절했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나자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왜 졸도를 하셨습니까? 과거의 악몽 같은 장면이 살아나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충격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저 사람을 쳐다보니 저 사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수많은 우리 동포 600만 명을 가스실로 들어가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 앞에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놀란 것입니다.”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무슨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과 똑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 속에 죄가 쌓이고 또 쌓이고 계속 쌓이다 보니 마침내 괴물 같은 사람이 되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계속 죄가 쌓이면 누구라도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인도 될 수 있고 악인도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기준입니까? 그의 안에 죄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인간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이 요구되는 예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죄의 사슬에 오늘도 묵이여 사는 인생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이 고백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사도와 18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살던 여인을,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 베드로가 고백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에게서 죄의 사슬을 풀어 건져낼 유일한 주님이심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리고라는 곳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그는 무자비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어가는 로마총독부의 앞잡이였던 것입니다. 그가 사람들 옆에 있어도 아는 채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는커녕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그의 집 앞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있어 예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었습니다. 마침 보니 옆에 돌무화과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래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예수님이 오늘 삭개오의 집에 머물고 싶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삭개오에게 이는 너무 나 황송한 말씀입니다. 아무도 아는 채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그의 집에 머물고 싶다고 하시니 사람들은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였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저런 죄인의 집에 가신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아무도 죄인 삭개오를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어떤 죄인이라도 다 한팔 간격 안에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안아주실 사랑의 대상이요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본래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착하고 순전한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 삭개오의 부모는 삭개오가 태어나자 앞으로 이 아이가 자라나서 의롭고 순전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래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값을 못했습니다. 그는 신체적으로 키가 작았습니다. 생김새도 사람들에게 좋은 선입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또래들에게 놀림당하고 무시당했습니다. 그는 그런 이웃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돈을 버는 일이였습니다. 그리고 손쉽게 돈 버는 일은,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 식민지라, 로마에 아부하고 로마의 힘을 빌어 돈 버는 일이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며 돈을 착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돈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부자로 살고 좋은 집에 살고 하인들을 거느리며 거드름을 피며 살면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삭개오를 더욱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삭개오의 마음은 공허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는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눅 19:1에 “지나가시더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은 원어로 “디엘코마이”라는 말로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지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어떤 계획을 세우시고 의도적으로 돌무화과 나무 아래로 지나가시며 그 나무위에 앉아있는 삭개오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그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집에 가서 쉬시겠다고 말씀 한 것 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단순히 죄인으로만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심령에 드려진 인생의 그늘을 보셨습니다. 돌무화과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그에게서 인생의 허무를 보셨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그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의인인가 의인을 찾아내어 칭찬해주고 상 주시려고 세상에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려고 오시였습니다. 절망과 좌절가운데 있는 자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 오시였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였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담대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는다”고 외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기 교회당을 돌무화과 나무라고 비유해 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가 바로 돌무화과 나무의 나뭇가지라고 비유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삭개오라고 비유해 봅니다.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지금 보닌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전혀 예수님을 보려 하지 않는 영적으로 눈을 감은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너의 마음속에 거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여러분을 어떻습니까? “왜 하필 내 마음입니까? 저 권사님 마음으로나 들어 가보세요” 라고 말할 분이 있습니까?“ “마라나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제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기다린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시고 여기에 오시였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아 의인의 면류관 받아쓰기를 원하십니다.

89세 김용철씨가 평생 모은 재산 90억 원대를 "국가 안보를 위해 써 달라"며 국방부에 기부했습니다.(2010.5.17) 김 할아버지는 북한의 천안함 도발로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자 "강군(强軍)이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며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기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주님이 원하시는 의인의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의인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 되듯이 되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악착같이 돈을 벌고 이제 사회 환원하겠다고 해서 그가 주님으로부터 의인의 상을 받는 게 아닙니다. 故스티브 잡스가 그의 재산5천만 달라 500억원을 스탠포드 병원에 기부하여 사람들로부터 기부천사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한판으로 판정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도박하듯이 살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믿음생활도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의인행세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생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마침내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슈바이처박사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이름이 난 것이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란 말은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닙니다. 현재 형입니다. 지금 내가 믿으면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함이 내안에 그대로 충만해 지는 경험을 하는 일입니다.(골1:10) 지금 내 안으로 예수님을 모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케 하시니 기쁨이 충만해지고 용기가 충만해지고 희망이 충만해 지고 사랑이 충만해 집니다. 매일 매일 이 충만함을 경험하며 사는 인생이 구원받은 의인의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삭개오는 수만금을 쌓아놓았어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쌓아 놓은 것,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내가 행복해지지도 않고 구원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풀어버릴 때에 예수님의 충만함이 그의 안에 충만해 졌습니다. 삭개오가 자기가 가진 재산을 털어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고, 착취한 것 4배로 갚아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모신 그날부터 그는 철저하게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의인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사탄의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어 들임으로 내안에 행복을 충만케 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구세주 되심을 분명히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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