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3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엡 2:11-22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쫒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쫒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찌러 이제야 빛 내리 이 나라 이 겨레”
6.25의 노래(박두진작사 김동진작곡)를 기억하십니까? 요즈음 젊은이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어린 시절 수 없이 듣고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노래입니다. 6.25 전쟁 63주년, 1950년에 태어난 분들이 64세가 될 때까지 전쟁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을 볼 때에 참으로 가슴 아픈,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상처로 우리들의 가슴에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계사적으로 63년 동안 끝나지 않은 전쟁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될 때 까지 3년간 기록들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한국군의 전사자가 15만 명 부상자가 72만 명 실종자가 13만 명에 이릅니다. 민간인 사망자가 24만 명 부상자가 23만 명 행방불명자가 30만 명 납북납치당한 사람이 10만 명 집 잃은 전재민이 200만 명 전쟁미망인이 20만 명 전쟁고아가 10만 명 그리고 1천만 이산가족이 생겨났습니다. 기독교 목사400여명이 학살 및 납북 당하였습니다. 900 여개 공장이 사라졌고 60만 채의 가옥이 파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엔군이 15만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북한 또한 엄청난 피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의 깡그리 말살 작전으로 그야말로 북한은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1949년에 대비 공업 60%, 농업 78% 감소에 완전 파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북한의 민간인 40만, 군인 30만명이 죽었고 민간인 160만 군인 23만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과 민간인 292만 명이 죽었습니다. 북한을 도우려 참전한 중공군 9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처럼 3년 간 전쟁에 남북한에 엄청난 전사자와 민간인 피해를 입은 일은 2차 세계대전 보다 더 컸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옴으로 엄청난 학살 사건이 있게 되었는데 남북한에서 약 400만 명이 이데올로기로인한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그중 북한에서 370만 명이 학살을 당했고 남한에서 빨치산들에게 13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 600만 명을 가스실에서 죽인 사건을 엄청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독재자 폴보트에 의해서 200만 명이 학살당한 킬링필드 사건을 듣고 끔직한 몸 소리치는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남북한에서 400만 명이 학살을 당하고 500만 명이 전쟁으로 죽고 다친 이런 사건은 5000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이 엄청난 전쟁과 공산주의 만행에 대해서는 어느새 잊어버린 채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그런데 또 전쟁을 하겠다고 하고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 불사 운운하는 남북의 지도급 인사들을 보면 과연 민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한다는 사람들인가 의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전쟁은 NO입니다. 전쟁은 다시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6.25의 노래 3절 가사에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하리” 그래야만 합니다. 혹 여러분들 대부분은 다 고향이 군산이고 전북이지만 저의 고향은 북한이고 저의 대부분 일가 친척들은 북한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 다시 민족이 민족을 따지고 보면 모두 가족이요 일가요 우리는 하나인데 또 전쟁이 왠 말입니까? 그리고 이제 전쟁 났다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인데, 우리민족은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세계 문명은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으로 끝장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 휴전선에서 대포알이 왔다 갔다 할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가 망하는 전쟁입니다. 그야말로 요한계시록에 말씀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NO입니다.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뭡니까? 오직 평화입니다. 평화만이 살길입니다. 평화는 하나되는 일입니다. 일치하는 일이요 연합하는 일입니다. 하나 됨은 다양한 주체들이 역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삶(unitas)이지 단순히 하나(unio)되는 일이 아닙니다(경동교회 박종화목사). 어떤 틀 안에 하나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함께 사귐과 더불어 나눔을 이룰 때 하나 됨(comm-union)을 이루게 됩니다.
바로 교회는 이 하나 됨을 이루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살아온 인생들이 다 다릅니다. 성별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배움도 다르고 년령도 다릅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은 서로 사귀고 나누며 더불어 사랑하며 삽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하나 됨을 이루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장벽을 파하시고 다르지만 사랑으로 충분히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죽이고 사랑으로 하나 되고자 한다면 증오의 벽을 넘어서게 되고 복수의 칼을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무도 그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였을 때 예수님만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 됨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아래에서 서로 다르지만 같은 길을 함께 갈 수 있게 되고, 다르다고 등져 있지 않고 서로 안을 수 있으니 이는 곧 십자가로 화목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1982년 12월 닉 부이치치는 팔 다리없는 장애인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몇 번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목사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으로 건강하게 자라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가 15세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한 이래 절망과 인생의 고통가운데 신음하며 살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희망을 전하는 희망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여개의 나라를 다니며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데 그의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바로 ‘허그’ ‘끌어안음’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책 이름이 바로 '닉 부이치치의 허그(HUG)'(2010, 최종훈역 두란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가슴에 안길 수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그의 가슴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다 안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슴처럼 그 누구도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선생은 빌 1:8에서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옆사람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미움으로 보입니까? 사랑으로 보입니까? 미움으로 보인다면 아직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을 아직 가지지 못하였다면 아직 예수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가슴에 안겨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요? 평화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면서 고별의 설교를 하시였습니다. 요한복음 13:31-16:33이 바로 고별의 설교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이야기 하면서 세상 속에서 너희는 근심할 것이지만 곧 그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6:20) 또한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하라고 하시면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16:33)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와 무슨 싸움을 하셨기에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당시 예수님은 유대교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들 그 밖의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세상권력들 그리고 로마의 군인들 이러한 사람들에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과 싸움을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용서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이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달리시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와 무슨 싸움을 하시였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이웃을 분리시킨 죄와 그 악한 행위와의 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지게 하고 사람 간에 이간질 시키고 원수되게 하는 마귀와 싸우셨던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그 사랑과 평화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으로 훼방하고 급기야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 제자로 하여금 선생을 배신하게 하는 처절한 아픔을 안고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못 박으라 소리치는 군중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창으로 예수님의 심장을 찌른 롱기우스라는 로마 병사를 구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에서 만인을 위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사랑의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를 이기시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오늘 이 십자가 아래에서 이 예수님의 사랑의 피에 우리의 몸이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막힌 담들이 헐어지고 높이 솟은 벽들이 무너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피에 우리의 더러운 죄가 씻겨지고 다르다고 미워하고 틀리다고 뒤돌아서고 싫다고 다투던 죄가 씻겨나기를 원합니다. 이는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서 씻겨 나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서 예수님이 승리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세상을 이기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 219)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고 견디면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요16:21) 오늘 우리 사회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수많은 요인들을 이기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내가 조금 손해라 해도 더 용서하고 더 사랑해야 합니다. 나에게 조금 불편하더라도 덜 쓰고 덜 입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시간을 아껴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세계평화지수를 아십니까? 영국 런던 소재 경제평화연구소는 전 세계 각국의 평화 수준을 조사한 ‘세계평화지수(GPI) 2013’ 보고서에서 162개국을 조사한바 아이슬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이고, 일본이 6위이고 우리나라는 42위이고 북한은 152위이며 아프카니스탄이 마지막 162위로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지 못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162개국 중 우리나라가 42번째로 평화롭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120번째로 위태로운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은 바로 북한과의 대결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 당장 북한과 정전협정이 평화 협정으로 바뀌고 개성공단이 열려지고 금강산 관광이 자유로와지고 북한의 여기 저기에 남한 공장들이 들어서고 디엠젵 비무장지대가 세계평화공원이 된다면 바로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 5위안에 들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이 어렵습니까? 전쟁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입니까? 아닙니다. 북한의 김정은과 남한의 박근혜대통령이 싸인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못하는 것입니까? 안타깝게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의 피로 적셔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태어나기 전 그들이 경험해 보지 않았던 6.25전쟁의 피의 유산을 받아 계속 원수로 알고 복수의 칼을 갈고 삿대질만 오고가고 있으니 민족은 63년 동안 허리 끊어지는 아픔 속에서 그 고통을 호소하기도 이제 지쳐버린 현실입니다.
오늘의 이 암담하고 깜깜절벽 같은 민족의 현실 앞에서 참으로 고민스러운 일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괴로운 일입니다. 40여 년 전 군대 생활하면서 내 아들은 통일 된 나라에서 살아 이런 군대 생활을 하지 않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통일이 안 된다면 앞으로 일백년 안에 통일은 안 될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마치 파도처럼 제 가슴속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해인 수녀의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평화로 가는 길>이란 시입니다.
이 둥근 세계에
평화를 주십사고 기도하지만
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
날로 더해 갑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왜 이리 먼가요.
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멀고도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
가깝고도 먼 내 안의 나에게
맑고 깊고 넓은 평화가 흘러
마침내 하나로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울겠습니다.
얼마나 더 낮아지고 선해져야
평화의 열매 하나 얻을지
오늘은 꼭 일러주시면 합니다.
저는 이 시를 몇 번이고 읽다가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하면 전쟁의 소리가 이땅에서 들리지 않고 평화의 합창이 울려 퍼지면서 통일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불가능한 일이요, 하나님도 포기하신 일입니까?” 기도하는 중, 아! 성경 한 말씀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제 가슴속에 가득 떠올랐습니다.
빌 4: 6절 말씀입니다.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멘
전쟁을 염려하지 말라 평화가 안 될까 염려 하지 말라 통일의 날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왜 염려하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 사람은 이루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염려라는 말의 헬라어는 ‘메림나오’인데 이 말은 ‘나누다, 찢다’란 ‘메리조’와 ‘마음’이란 ‘누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일들이 항상 우리들의 마음을 찢어지게 아프게 합니다. 세상일로 마음이 아프게 되는 일이 바로 염려입니다.
마 6:25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메림나오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하신 말씀이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메림나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주야로 염려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찾아가 위로 한답시고 이런 익살스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댁의 아들은 앞으로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후방에 배치되거나 아니면 전방에 배치될 것입니다. 후방에 배치되면 별로 염려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고 전방에 배치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시겠지요. 그러나 전방에 배치되어도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전방에서도 위험한 곳이나 덜 위험한 곳에 배치될 것입니다. 덜 위험한 곳에 배치되면 염려 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고, 위험한 곳에 배치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시겠지요. 그러나 위험한 곳에 배치되어도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부상당하거나 부상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상당하지 않으면 염려하실 필요가 없고 부상당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상당해도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회복되거나 죽거나 할 것입니다. 회복되면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죽으면 더 이상 염려해 보아도 정말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제발 염려랑 마시고 사시지요”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기서 대조적인 두개의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와 모든 일”(영어로 nothing과 everything)입니다. 아무것도Nothing-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Everything-기도하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할 모든 일을 기도할 모든 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염려 할일이 기도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염려를 수 백번 한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기도는 단 한번의 기도에도 놀라운 기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음 절을 읽다가 저는 두 번째로 아! 하며 참 놀라운 감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빌 4:7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본문에 평강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이 말은 평화를 말합니다. 새 번역 성경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사람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공동번역)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이 상하는 무슨 일로 염려 하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평화가 잔잔한 호수처럼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들 것입니다.
복) 기도할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 하십니까
기도할수 있는데 왜 실망 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 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 하십니까
말씀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다가 또 세 번째로 아! 하며 하나님 앞에 엎들어 졌습니다.
빌 4:9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니 아무 염려하지 말라하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평화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평화의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이가 바로 평화의 왕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엡 2:14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사도바울께서는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구주로 믿는 다면 이미 우리는 평화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막힌 담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다만 땅덩어리로 나뉘어 졌고 정치적으로 갈라졌고 군사적으로 총을 마주 대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아래에서 평화입니다.
6.25전쟁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쟁입니다. 잊어서도 안 되는 전쟁입니다. 어찌 우리 그날을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으로 우리는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철저히 억압당하던 그 유대 땅에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며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다시금 이 땅의 평화를 선포하며 민족의 통일을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하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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