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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6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전병호 2011-02-06 추천 0 댓글 0 조회 123

2011년 2월 6일 주일아침 설교 요 16:23 인생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설날 다음날 4일 부산 해운대구에 살고 있는 박씨 부부는 아들부부가 가져온 설 선물이 마음에 드니 안드니 하고 싸우다가 아내가 친정 간다며 집을 나가자 남편이 홧김에 집에 불을 질러 얼굴과 가슴에 화상을 입고 50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침으로 실소를 금할 길 없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입니다.
역시 같은 날 충북 충주시 가금면 한 야산에서 소 농장을 운영하던 61세 김씨가 독국물을 마시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김씨는 지난 1일 키우던 소가 구제역 양성판정을 받자 이에 비관하여 자살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죽은 소와 돼지가 300만 마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입니까? 아니죠 두렵고 떨리고 무섭고 어지럽고 흔들리는 세상에 우리는 매일 매일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천재지변, 테러 전쟁 질병 각 종 사고 등 온갖 재난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단순히 행복하냐 불행하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명이 날마다 위협받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공자선생의 제자인 순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의 징후는, 그 옷이 사치스럽고 그 차림이 여자 같으며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만 추구하며 그 행동이 난잡하고 그 노래와 음악이 바르지 않으며 그 무늬와 장식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그 생활에 법도가 없고 그 죽인 이를 장사지냄에 각박하고 불경하며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기와 힘을 중하게 여겨 가난한 자는 도둑질을 하고 부유한 자는 남을 해친다."
순자가 말하는 어지러운 세상의 징후가 마치 오늘의 세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눅21:34에서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안전하십니까? 잘 되리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 다 가도록 아무 염려 없을 것이다라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요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평안한 자세로 여행을 즐깁니다. 그러나 그 비행기가 기류에 휘말려 좌우 앞뒤로 마구 흔들릴 때 그만 위험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타고 가는 이 지구라는 비행기가 그리 안전하지 못합니다. 마구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형감각을 잃고 어지러움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머리가 심히 휘둘리는 듯 어지러워 눈을 뜰 수 가 없고 몸을 제대로 가늠 할 수 없는 극심한 어지러움증을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귀 안에 있는 전정기관에 문제가 있거나 소뇌에 문제가 있거나 피가 모자라 현기증 증세가 있거나 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우리는 인생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고 고난이 덮쳐 오면서 인생의 터전이 흔들리니 제대로 자신의 삶을 지탱하지 못할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 예와가 없습니다. 아직은 살만하다고 아직은 걱정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니요 지금 그를 힘들게 할 무서운 세상이 닦아오고 있으니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흔들거릴 때 여러분은 어디로 달려가십니까? 집안이 기울어져 갈 때에, 사업이 어려워 질 때에,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에, 자녀들에게 역경이 왔을 때, 내 앞 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에 여러분은 이 문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남 탓에 돌리고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일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를 덮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문제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가면을 쓴 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마음으로는 마냥 불안해하고 공포를 더 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도피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T냉수 마시듯 술을 마셔되는 사람들을 봅니다 수면제를 먹어 보기도 하고 마약이나 도박에 손을 대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어떤 방법도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이 흔들리고 어지럽고 무섭고 두려운 이러한 세상을 대처할 것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쩔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이 왔을 때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232장 2절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 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 탓 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정면 돌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 주님 여 날 도와 주소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상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제목이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이때 들려주신 말씀!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봉독한 요한복음 16장 23절에 첫 말씀이 "그 날에는"으로 시작합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그 날이라 함은 이 날이 있은 다음에 오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닦아오자 제자들에게 마지만 고별의 설교를 하십니다. 평소와는 다른 심각한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근심스런 얼굴들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그들의 마음은 자신의 기대가 허물어지는 듯한 허탈감이 엄습해 오면서 또 커다란 공포감 마저 들어 제자들은 마치 숨소리도 멎은 듯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슬픔의 날이요, 그 날은 기쁨의 날입니다. 이 날은 고난의 날이요 그 날은 영광의 날입니다. 이 날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날이요, 그 날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비록 내가 너희들 곁을 떠나 없을 지라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즉시 시행하리라. 즉, 기독교인들은 슬픔의 날에도 기도할 수 있고 기쁨의 날에도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기도할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서도 기도해야 한다하는 마지막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믿음의 비결 승리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이루겠다는데 왜 불안해하느냐? 기도는 능력과 기적을 가져다 줄 터인데 왜 낙심하며 허탈해 하느냐?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이처럼 주님은 상심된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설교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곁을 떠나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근심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 곁을 떠나지만 너희가 기도할 때에 너희 기도와 내가 함께 할 것이다. 너희 기도를 통하여 나는 너희를 붙들고 있을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구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적어도 열 일곱 가지 이상이 나오는데 신약 성경에서만도 열 한가지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어휘 부족으로 이 모든 동사를 ‘기도하다. 구하다’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단어 몇을 찾아봅니다.

1. 데오마이 (δεομαι)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자라는 부분을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성령의 기름이 떨어졌나이다. 기름을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했다면 데오마이입니다.

2. 디오코 (διωκω)는 “이루어질 일을 재촉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이 백성을 회복하실 그 날이 언제 입니까? 속히 내 백성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기도했다면 디오코입니다.

3. 재태오 (ζητεω)라는 말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주여, 첫 사랑을 잃어버렸나이다. 찾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재태오입니다.

4. 유코마이 (ευχομαι)는 “묻다, 문안하다”라는 뜻이고,

5. 에로타오 (ερωταω)는 “의논한다”는 뜻입니다. 주여, 어디로 갈까요, 무엇을 할까요.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물었다면 에로타오입니다.

6. 마지막으로 아이테오 (αιτεω)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에서 구하라는 말씀이 일곱 번 등장하는데, 이 말은 아이테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강요하다, 탄원하다, 떼를 쓰다”라는 말입니다. 어린 자녀가 아버지께 떼를 쓰듯 간청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애원하는 차원을 말합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 위급할 때 소리쳐 부르짖는 “자아크”, 기쁠 때나 슬플 때 소리내어 엉엉우는 “라나”라는 말이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낸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여기에 찾는다고 하는 “아락”이란 말이 모두 신약성경에서는 “아이테오”라는 말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히 찾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광적으로 허덕이면서 소리를 지르며 찾는 것을 말합니다. 사슴은 원래 그 자태부터 신사처럼 생겨 평상시에는 점잖고 조용해서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을 때는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어 울부짖기 시작한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데에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당장 영혼의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생각은 시냇물, 생명수 뿐 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지 못하면 그만 죽어버리고 맙니다. 무덥고 건조한 중동지방에서 물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목마른 사슴 한 마리, 물을 마시지 못해 혓바닥을 내밀고 헉헉거리는 그 모습이 “아이테오”입니다. 사막에 여행자가 물이 떨어져 죽을 지경일 때에 오아시스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기루입니다. 착각입니다. 인생이 목말라 죽을 지경이면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에서 허우적거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왕좌왕 안절부절 이리 집쩍 저리 집쩍 헉헉하다가 그만 죽어버립니다. 이 헉헉거리는 모습이 "아이테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한 한 걸음도 갈 수 없나이다." 야곱의 기도 말입니다. 부러진 환도뼈를 질질 끌면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애원하는 야곱의 기도가 오늘 이 민족가운데, 오늘 한국교회가운데,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가정들마다에,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 가슴속에서 터져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죽으면 죽으리라! 외쳤던 에스더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담대한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구제역 역병아 물러가라" "이 땅의 평화를 깨치는 전쟁 귀신아 사라져라" 우리는 아이테오, 외쳐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고쳐달라고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여러분 가정이 여러분 직장이 여러분 자녀들에게 여러분의 인생이 기도하지 않고 편히 살아갈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날에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고는 그 날에 승리가 없습니다. 그 날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 날에 영광도 없습니다. 이 날에 우리의 기도 없이도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과연 나의 영혼을 마귀에게서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요 벌써 많은 영혼들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 자녀들을 죄악 세상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들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무너져 내리고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날에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여러분에게 없는 날이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만 이 어지러운 진흙 밭 같은 세상에서 역시 뒹굴며 상처 난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지요. 그는 기독교인이랄 수 없는 것은 기독교인은 기도로 살아가기에 기도-ㄱ 교인입니다.

낙심과 상심, 허탈과 공포, 불안과 착잡함. 당시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듣고 있던 이 제자들의 모습은 곧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질병과 재난, 배신과 기만, 참을 수 없는 울분과 억울함, 바로 살아보리라 다짐했던 결심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가는 영적인 실패와 타락, 큰 일에 당황하고 작은 일에 번민하는 인생의 허약함. 여기서 여러분, 어찌 기도하지 않고 버티어 산다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대단한 여러분입니까? 이 날에 기도하지 않고 버티면 갈 때까지 가보자 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인생의 살벌한 경쟁대열에서 낙오자가 되어 이리저리 밀리고 있다고 느낄 때 겪어야하는 수치감과 패배감은 또 어떻게 치유할 것입니까? 한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어찌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죄 안 짓고 하나님 나라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까?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간절하게 잠자는 w[자들을 깨우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다시금 주신 권면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눅22:46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티 카슈데테 아나스탄테스 프로슈켓세 히나 메 에이셀세테 에이스 페이라스몬)

하나님 아버지 앞에 매달려 떼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라! 낙심 중에 있는 제자들이여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어 주겠다. 즉시 시행하겠다.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을 때 사실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기도의 본질을 깨뜨리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언제나 기도에는 기도하는 바른 정신이 있고 바른 자세가 있는 것이지요. 기도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과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정욕을 위해 구하는 기도는 구해도 얻지 못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진실한 고백 없이 어찌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나 마음 내키는데로 구하는 태도는 성경 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든지 구하는 이 기도는 기도의 원칙과 정신을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기도는 분명 좋은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무엇이든지라는 이 한마디 단어 속에 지금 상심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커다란 위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생의 큰 문제에 부딪쳐 본 사람은 기도의 논리나 질서보다 더 큰 무엇이 있음을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떼를 쓰는 아이는 논리나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동안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 은총을 더듬어 보며 감사하며 주님의 향기로운 이름을 부르며 그 분과 대화하는 아름다운 기도의 그 멋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찢겨진 가슴을 안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에는 그저 흐느껴 울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깊은 상처를 받아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잃을 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죽은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리 주님은 미사여구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만물이 약동하는 새봄입니다. 저기 한 그루 나무도 움을 키우고 있건만 사랑하는 나의 친구 나사로는 죽음의 옷을 입고 여기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지여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흐느껴 울며 주님께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나사로야 일어나라!” 절규하며 외치셨습니다. 무너져 가는 사업을 붙들고 몸부림해 보신 경험이 있었습니까? 무서운 공포와 불안에 휘말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요? 이 얼마나 기도의 자유를 주는 말씀입니까? “무엇이든지”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마음껏 주님 앞에 부르짖어 아뢸 수 있는 “무엇이든지”의 권세, “무엇이든지의 특권”을 여러분 알고 살아가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현실의 필요는 끝이 없는데 자본은 고갈되어져만 가고 있습니까? 나는 한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앞길이 꽉꽉 막혀 있습니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엎드려 기도합시다.

복음성가 39장 3절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님 약속 생각해 보네
내 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기도(말씀속)중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 마다 주님 약속 새겨 봅니다.


곤지암을 지나 양평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소망교회 기도원이 있습니다. 기도원 길목에 들어서면 조그만한 열쇠 공장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건물 벽에 건물만큼이나 크게 보이는 표어가 눈에 띕니다.

God is the Key! God is the Key! 하나님은 열쇠이시다.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이 잠겨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무엇이 잠겨 있습니까?
가정에 무엇이 잠겨 있습니까?
사업에 무엇이 잠겨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잠겨진 모든 것을 열 수 있습니다.
God is the Key! God is the Key!
하나님은 열쇠이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주께서 열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포기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절망하십니까?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가면을 쓴 체 왜 당신의 문제를 숨기려 하십니까? 어디로 도피해 버리려고 하십니까? 이제 접어두었던 기도의 제목을 다시 펼치기로 하십시다. 덮어두었던 성경책을 다시 펼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기로 하십시다. 길이 막혔다고 절망하지 말고 하늘 문을 두들겨 보기로 하십시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가슴을 열어제치고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요. 주께서 들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가장 멋진 응답을 하실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인생이 나를 힘들 할 때라고 생각할 그 때에 여러분 두 손 모아 기도하십시오 이날이 기도할 때입니다. 2월은 기도의 달입니다. 인생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신다면, 기도로 여러분의 흔들리는 인생을 멈추게 하십시오.

기도의 신학자 분드(E.M. Bounds)의 말처럼 “오늘 교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프로그램, 보다 좋은 장비, 보다 체계적인 조직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기도에 동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여러분, 진정 우리교회가 필요로 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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