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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3일 주일아침에배 설교
전병호 2011-01-23 추천 0 댓글 0 조회 103

2011년 1월 23일 막10장 35절 - 45절 반위시각(反位視覺)의 신앙


제가 신학생 때에 언제나 감동적인 이야기는 순교자에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 세계 각 국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순교, 특히 우리나라 순조임금 시대 대원군 시대 일제 시대 그리고 6.25 한국전쟁에서 순교 당하신 수많은 순교자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설레이는 감동에 눈물을 흘렸고 나도 그와같이 순교하리라는 믿음을 결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시절 어느 여름수련회에서는 순교 결단식에 참여하여 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40년전 당시 대부분의 교회 교인들도 이와같이 순교자들의 뒤를 따르라는 죽으면 죽으리라 일사각오 신앙심으로 믿음생활하였습니다.
1934년, 일제 치하에서 바야흐로 신사참배의 폭풍이 한국 교회를 몰아 붙일 때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신학교의 신학교 부흥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신학교에서 그분이 설교하신 설교제목이 '일사 각오'라였습니다. "죽기를 결심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마다 죽기를 결심해야 된 다. 그러나 죽으면 산다. 그들에게만 부활의 영광은 약속된다." 주기철 목사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어디서도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교인들은 무덤덤 별 감동이 없습니다. 물론 나도 그와 같이 순교신앙을 가지겠다는 결단을 하는 사람들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결심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 믿음 좋다" 그리고 마치 별종취급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자신의 믿음을 간증하는 그런 모습은 이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상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 에피소드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세번째 수난의 예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32절 본문에 들어가기 직전에 배경을 알려주고 있는 32절을 보시면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 데 저희가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33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절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 그리고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한 결단과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을 이제 길을 가시면서 자연스럽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 이런 각오가 필요했다면 오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 시대의 제자들에게도 주님은 동일한 각오를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한가지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를 질 각오입니다. 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8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다면 십자가를 질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반위시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반위란 말은 평상시대로 가던 길을 반대로 거꾸로 간다는 말입니다. 일상적으로 바라보던 시각을 거꾸로 보고 뒤집어 생각해 본다는 의미로 반위시각이란 말을 썼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세상적인 생각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해 오던 그런 생각이나 주장으로는 결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지도를 봅니다. 지도를 보면 백두산이 위에 있고 제주도 한라산은 밑에 있습니다. 평양은 위에 있고 서울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백두산이 있는 곳이 위이고 한라산이 있는 곳이 아래입니까?. 그렇지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입니다. 그런데 인공위성을 타고 저 지구 위로 올라가면 결코 백두산이 위에 있고 한라산이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위에 있고 호주가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호주사람들이 지도를 그릴때에 자기나라가 저 남쪽 아래에 있는 것으로 그리지 않고 거꾸로 그립니다. 호주가 위에 있고 러시아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한반도도 아래에 있습니다. 그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 한반도 위에 일본이 있고 그 위에 필리핀이 있고 그 위에 호주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 아닌 거꾸로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가난한 것이 저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죽는 것이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어야 산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잘난 척 하고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이 대접을 받지만 성경에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으뜸으로 여깁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요 죽음의 표시이지만 기독교에서 십자가는 생명의 상징이요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은 십자가의 산 증인(벧전5:1)이 되는 신앙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독교의 사고방식은 역설적인 사고입니다. 물을 거슬려 올라가는 사고입니다. 연어가 물을 거슬려 올라갑니다. 그곳에는 굶주린 곰이 기다리고 올라오는 연어들을 포식합니다. 어리석게도 연어는 계속 물을 거슬려 올라갑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왜요 죽기 전에 알을 낳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 보내고 자기는 죽습니다. 그것이 순교정신입니다. 그래서 증인을 헬라어로 마르투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또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처음부터 순교적 신앙입니다. 순교적 신앙이 아닌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을 순리대로 편안한 대로 실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닌 역으로 바라보고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첫째로 세상적 영광을 포기 할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의 동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회 개혁적 비젼을 가지고 기독교를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위 엘리트 식자층에는 기독교 믿으면 새로워질 것이다. 역사도 새로워지고, 나라도 새로워지고 개인도 새로워 질 것이다. 이런 사회 개혁적 비젼을 가지고 기독교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당시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이상재 이광수 김구 등이 이런 분들 이였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 믿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 천당이란 말이 교회의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동기가 사회 개혁적 동기도 아니고, 복음적인 동기도 아닌 다른 동기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제 삼의 동기가 바로 세속적 물질적 동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수믿어 새사람 됩시다 라던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가 아닌 예수 믿어 잘 살아 보세로 바뀌었습니다. 잘 사는 것 출세하는 것 부자로 사는 것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의 목적은 지혜를 얻는 일 이였습니다. 부귀영화는 부수적으로 따라왔습니다. 예수님 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의란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먼저 십자가를 취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여 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 믿어 병 고침 받고 부귀 영화를 얻는 일은 먼저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는 따르지 않고 부귀영화를 얻고자 하고 병고침을 받고자 한다면 이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60년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아주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필리핀보다도 캄보디아보다도 못 산 나라였습니다. 북한에서 쌀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의 신앙은 부귀영화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 믿어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일이 우선 이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사람들이 울며불며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면 멀다 않고 달려갔습니다. 남편의 박해 시어머니의 핍박이 아무리 심해도 어린아이를 엎고 교회로 달려나가 밤새우며 남편 구원을 위해 시어머니 예수 믿어 천국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침 밥 안칠 때 한 숟가락 따로 담아 모아서 교회 성미 쌀로 가져왔습니다. 10원 20원 모아 감사헌금 십일조 헌금을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심지어 드릴 헌금 없으면 손구락에서 금반지 빼어 기쁨으로 헌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당시 교회 교인들은 가난하고 없이 살아도 기뻐하며 충성하여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회와 그 분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점점 나라가 점점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가정들이 축복을 받아 잘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런 믿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조금이라도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되면 십자가를 버립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듯 도망칩니다. 일년 52주 감사헌금 한번 없고 십일조는 아예 잊은지 오랜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 만족 자기 유익이 없으면 믿음을 버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분이 메시아다. 이 분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가 행하시는 기적을 보면서 마음 속에서 이런 기대 가 일어났습니다. 저런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우리의 어떤 소원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35 절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가 있는 분,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 을 무엇이든지 만족시켜 주십시오. 이러한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 다음절에 보시면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이때 두 제자의 대답, 37절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여기 37절에 '주의 영광'이라는 말은 세속적인 의미로 예수님이 높은 자리에 그러닌까 왕에 오른다면 자기 형제를 좌우 측근에 두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갈리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랐던 처음 동기와는 아주 변질된 말입니다. 처음에 그들에게는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속적인 영광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이 두 제자 뿐 입니까? 41절에 다른 열 제자가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입장도 다 똑 같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에 보면 '그때에 세 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두 제자의 어머니까지 와서 특청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젠 아주 당당하게 높은 자리를 청탁합니다. 아마도 이 요한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의 원조라고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아즘마 정신의 발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세속 적인 요청을 한 배경에는 어머니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의식이 참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자식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요한의 어머니만 아니라 지금도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어떤 어머니들은 교회 집사이면서도 교회 가는 아들에게 "예 너 공부해야지 무슨 교회냐"라고 말하는 어머니도 있다고 합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성경 공부하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닙니다. '엄마, 나 정말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어. 나 예수님 너무 좋아.' 이런 간증을 한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또 다른 집에는 어머니의 기도와 기대대로 교회는 잘 나가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공부한 아들이 서울 대학에 합격하였습니다. 이 어머니도 참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라면 이 두 아들 중 어느 아들이 여러분에게 더 기쁨을 주었겠습니까? 내 아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안 좋을 이유는 없죠? 그러나 그것보다 현실적으로 아들에게 믿음은 없지만 공부는 잘해서 서울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에 더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어떻습니까?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예수 믿는 동기가 무엇인가? 지금 동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기가 부자 되고 출세하는 이것 때문에 믿느냐? 예수 믿으면 예수님이 나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믿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주께서 나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변화시켜 주신 그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너무나 감사해서, 이것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인가?
교회 나오면서도 여전히 세속적 영광에 대한 기대,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라면 내 신앙의 동기는 아주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의 요청 앞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그런 요청을 지지하거나 격려할 만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순수하게 주님을 따라오기를 주께서 기대하신 것이라면 오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순수한 동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좋아서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들, 결코 세속적 영광에 대한 기대가 내 신앙에 가장 중요한 동기가 안되어 있는 사람, 이런 제자를, 이 시대는, 그리고 우리 주님은 아직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세속적인 영광을 구하던 제자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에 다 뿔뿔히 도망갔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영광을 구하는 믿음은 바로 이러한 결말을 가져 올 뿐입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341)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먼저 세상적인 영광을 포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포기 할 때에 더 큰 영광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반위시각의 신앙입니다.

두번 째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섬김의 각오를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섬김의 각오.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은 결코 지배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는 것을 주께서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가 되어서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지배의 욕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배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그 깊은 곳에 뿌리 박고 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철학에 근거하여 힛틀러가 나왔고 스타린이 나왔습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에 대한 파워. 이 강력한 의지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를 위협하는 일체의 불안한 인간관계의 그 밑바탕에는 이런 권력 욕구, 지배 욕구의 동기가 숨어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정치는 파워게임입니다. 회사에서도, 어느 동창회 가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이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부부의 갈등, 고부 관계의 갈등, 누가 지배자냐? 누가 다스리느냐? 누가 안방차지냐 누가 광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우리나라 옛날부터의 고부간의 갈등의 원인 이였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신풍교회 문제가 4년 가까이 해결 못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파워 게임 때문입니다. 우리는 6년전 이 파워게임에서 졌습니다. 그러나 ls자가 이긴자임을 우리는 이미 반위시각을 가지고 섬김의 각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lswjd한 승리는 섬김에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우리 한국인의 심성을 생각해 봅니다. 거기에는 유교적 지배의식이 뿌리 깊이 뻗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을 계급화 하려는 그런 현상입니다. 한국 사람처럼 모든 것을 계급화 시키는데 민감한 민족이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나눕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윗사람 아랫것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다고 외국 사람들이 말하는 데 그 중에 존댓말과 하댓 말을 골라 쓰는 것이 참 어렵다고 합니다. 나를 가르켜 말할 때에 아랫사람에게는 내가라고 하고 윗사람 앞에서는 제가 라고 말하고 연쇄 많은 어른 앞에서는 불초 소생이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몇이냐 연세가 몇이십니까?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라고 상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어로는 그냥 How old are you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존두사상이 있다고 합니다. 몸에서 제일 높은 부분이 머리이기 때문에 최고 지도자를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제일 천하게 여기는 곳이 발입니다. 발 중에도 발뒷금치 입니다. 그래서 아주 천하다는 의미로 발 뒷금치 때만도 못한 녀석이란 말을 합니다.
양반들은 일을 안하고 상놈들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 상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상이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봉사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심지어 바울 선생님은 서로 종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발 씻어주는 일은 노예들이나 하는 일 이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4절에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섬김의 리더쉽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섬길 각오를 하십시오. 내게 섬김의 각오가 없다. 오직 지배할 뿐이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려한다면 지배자가 아닌 섬김의 대통령 종인 대통령이어야 합니다. 섬길 각오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라. 바로 반위시각의 믿음입니다.

설교 처음에 주기철 목사님을 말씀드렸는데, 이 주기철 목사님이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실 때입니다. 일본 3개 경찰대 소속 고등계 향사들이 예배당 뒷자리를 차지하고 감시하고 있는 중에 주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다섯가지 기도의 제목이 당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주목사님은 자기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두번 째 제목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그는 감옥으로 가 다시 고난과 투쟁할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짧은 고난은 내가 어쩌다 견딜 수가 있겠지만, 장기간이 되면 나도 주님 부인할까 봐 두렵습니다.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세번 째로 나의 노모와 처자와 나의 사랑하는 교우들을 주님이 돌봐 주십시오. 그리고 네 번째, 의의에 살고 의의에 죽게 하옵소서. 마지막 다섯 번 째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이 설교 후 그는 감옥으로 잡혀가 그 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주 목사님의 아들 되시는 주광조 장로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대단한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강한 분이 아니였습니다. 그 분은 마음이 약하셨고, 두려워하셨고, 그리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아내의 기도, 그리고 또 하나는 교우들의 기도, 무엇보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였다면 그 분은 그 순교의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믿음의 길을 그 고난의 길을 그 섬김의 길을 결코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능력으로는 단 하루도 십자가 붙들고 설 수 없습니다. 주님이 도와 주시지 않는 다면 성령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보잘 것 없습니다. 하루살이 믿음이요 냄비 믿음입니다. 감히 순교적 믿음이란 생각도 못합니다. '나보고 섬기라고요? 당신이나 섬기시요'하고 다 뿔뿔히 달아날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달아날 것입니까? 달아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시오.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희게 하셨네)"(270-4)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셨으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와 세속적인 영광을 구했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야고보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당하고 요한복음 요한 1서 2서 3서 그리고 요한 게시록을 기록한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셨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 변했습니까?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성령충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반위시각의 신앙은 성령충만 해야 마침내 보여지는 축복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1년 진정 참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적인 영광이 아닌 일사 각오의 순교적 신앙으로 십자가 내가 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에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몸 사리지 말고 주님의 종 된 섬김의 신앙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이웃도 섬기므로 십자가 구원의 도를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령충만 하시어 올 한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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