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일 신년주일예배 설교
전병호
2011-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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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요 4:23-24 영과 진리의 교회
학생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로 클레멘타인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어디서도 듣지 못합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사리 집한채 늙은 애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내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애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좀 서글픈 노래인데 옛날 우리는 이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에 '넓고 넓은 바닷가'는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사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어부가 아니라 광부입니다. 그러니 좁디좁은 광산 계곡이라 할 것입니다. 1849년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수많은 광부들이 지금의 미국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몰려들 왔습니다. 이 때 한 광부의 딸인 클레멘타인이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계곡에 흐르는 급 물살에 빠져 죽자 광부 아버지가 딸의 이름을 부르며 부른 애절한 노래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 센프란시스코 축구팀 이름이 '포티나이너, 49ers'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어느 지역은 불과 몇 년만에 마을이 형성되어 도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요세미티 가는 곳에 COLUMBIA STATE HISTORIC PARK(캘리포니아 주 역사 공원)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그 당시의 각종 시설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시켜 놓고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답니다. 그 당시에 금을 찾으러 왔던 사람들은 황량한 캘리포니아 벌판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 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금을 찾아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벌서 작년인가요, 작년 말 각 방송국에서는 연예시상식 연기시상식을 화려하게 꾸며 방영 하였습니다. 거기에 모인 방청객들이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가 나오면 소리를 지르고 어떤 여학생은 엉엉 울기도 하였습니다. 추운 밤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몰려와서 방송국 밖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차에서 내리면 악악 소리를 지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최근에 일본에서 우리나라 가수들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아 한국가수들을 보러 한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먼발치라도 그 가수 얼굴을 보려하고 어쩌다가 눈이라도 마주치고 손이라도 스치면 무슨 큰 영광인 것 처럼 황송해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의 관심이 끌리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다해도 찾아갑니다. 멀다고 느끼지를 않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만사제쳐 두고 찾아 나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돌을 찾아서 다닙니다. 수석을 모으는 사람들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 특별한 돌도 아닌데 그 사람들은 특별하다고 생각을 하고 수집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땅만 바라보고 돌이 어디 있나 하고 찾아서 다닙니다.
하나님도 찾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찾으시지만 그 중에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형식과 외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구약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이 그랬고 노아나 욥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그러한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한 여인을 만나서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성경에 육 시라고 했는데, 육 시는 정오 12시를 말하거든요. 이 때에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왔어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자가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하고 만나지도 않는데, 왜 당신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럽니다. 이렇게 대화가 시작이 되어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물에 대해서 한 참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이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가 실제로 남편이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공식적인 남편이라 할 사람이 없는지 아마도 생활이 문란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한참을 이야기를 하는데, 이 여인이 예배의 문제를 들고나옵니다. 예수님과 얘기를 하는 도중에 예배의 문제가 마음에 부딪히게 되었던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정체가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시잖아요. 지금까지는 어둠 가운데서 그런 대로 자기의 비밀을 숨기며 살아왔는데, 빛 되신 예수님 앞에 설 때에 그것이 다 폭로가 되었으니 더 이상 자기의 죄를 숨길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속죄받기 위해서 성전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았기에 이 여인은 예수님께 사마리아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예배하였던 그리심 산으로 가야 합니까? 아니면 유대 사람들이 예배하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아주 분명하고 명료하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것이 23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배의 질서를 세우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장소의 개념,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를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느냐보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를 더 중요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심 산에서든지 예루살렘에서든지 영과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찾으시며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면 예배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매주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드실 지 모르지만, 예배는 신앙생활의 기본이며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소중한 의무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예배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교회가 이렇다할 만한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배드리는 일만 잘해도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면 큰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던, 오래되지 않았든 상관없이 예배를 잘 드리면 큰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심령에 기쁨을 얻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은혜를 받고 형통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병도 낳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능력도 받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선거 운동을 하느라고 얼마나 바쁘겠어요. 웬만하면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주일이면 큰 교회에 순회하며 선거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주일이면 고향의 작은 교회로 돌아갑니다.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23년 동안을 개근하며 교회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는데 그 날도 변함 없이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7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기자들이 이 바쁜 시간에도 고향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하고 질문을 했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부터는 여러분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
참 멋있는 분입니다. 대통령 출마를 해서 얼마나 바쁘겠어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예배가 먼저예요. 하나님 앞에 진실함이 있어요. 평소대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생각과 삶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맞는 말입니다.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 이예요. 예배가 가장 긴급한 것 이예요. 예배가 가장 영광된 일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잘 드리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러한 교회와 성도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실 때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기뻐하시는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냥 육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찬송하고 성령 안에서 봉헌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 밖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이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니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예배시간이 지루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알아듣지 못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아예 눈감고 잠을 청합니다. 전에 신풍교회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설교 시작하면 곧 잠이 듭니다. 어쩌다가 의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적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세상 지식으로만 읽으려 한다면 이해도 안되고 재미도 없습니다. 단 한 줄을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을 읽으면 말씀 속에 꿀이 있고 깨가 있습니다. 말씀의 맛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단 한 절을 읽어도 은혜를 받습니다. 찬송도 그냥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작사 작곡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가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부르지 않으면 은혜가 없습니다. 마치 영어로 된 노래 가사의 뜻도 모르고 미국노래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찬송을 부르면 가사에 은혜 받고 곡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러분, 찬송 부를 때에 눈물 흘려본 적 없다면 아직 성령의 감동으로 찬송을 안 불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도 성령의 감동 없이 헌금한다면 돈 천원이 아깝고 만원 헌금하는데도 화가 납니다. 당신 옷 사입을 때에 100만원 줘도 아깝지 않은데 교회에 특별감사헌금 5만원 하는 것도 아까워 3만원 할까 5만원 할까 망설이다가 4만원에 낙찰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이 예물을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봉헌예물을 드리는 사람은 1000원 밖에 없어 1000원을 드리지만 이 1000원에 제 몸까지 얹혀 드립니다고 고백합니다. 10만원인들 아깝습니까? 100만원인들 아깝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봉헌 하는 사람은 그 지폐에 적힌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힘껏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칫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도취에 빠지고 영광주의 신앙에 몰두해 자아를 상실한 채 격한 감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주님은 말씀하기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라는 말씀은 진리 안에서 드린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데, 예배 시간에 전해지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사모하는 사람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기도 하셨고, 이상으로 말씀하기도 하셨고, 또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찾아 오셨고, 백성들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예배 시간에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할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에 영적 암세포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우상숭배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바로 이 영적 암세포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죽일 것이다.’사람들은 들은숭만숭 입니다. 다음에 예언자 이사야가 또 말하고, 또 아모스가 말하고 호세아 미가라는 예언자들이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영적 암세포를 물리치라고 외쳤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귓등에도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등장하여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다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긴급히 호소하였지만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영적으로 귀가 먹으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히도 아무도 예언자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가 망했습니다. 왕과 귀족들은 물론이요 수 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머나먼 나라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끌려간 포로들 중에 에스겔이란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제 이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죽었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말라버린 마른 뼈들을 향해서 외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열정과 마음을 깨닫고 마른 뼈들에게 외쳤습니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뼈에 살이 붙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생명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혼돈의 자리가 질서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자리가 희망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임하시듯 우리의 심령속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나 매 주일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드리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서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생각이 달라지게 되고 말이 달라지게 되고, 인격이 달라지게 되고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생활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이 꾸밈이 없어집니다. 순수해 집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위선자의 모습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해 집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은혜가 매주일 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예배의 절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죽은 자를 살립니다.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요 위로요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진리에 귀 기울 일 때에 하나님이 축복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과 진리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축복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금년 우리교회 목회 목표로 영과 진리의 교회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성생활의 발견과 진리로 새 생활이란 목회방향을 잡아 한해 우리의 신앙의 경주가 시작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여러분,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몰려온 미국 서부개척자들처럼 2011년 52주 하늘의 광맥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의 찾으신 바 되어 새초 부터 새 말까지 날마다 때마다 오직 하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학생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로 클레멘타인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어디서도 듣지 못합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사리 집한채 늙은 애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내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애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좀 서글픈 노래인데 옛날 우리는 이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에 '넓고 넓은 바닷가'는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사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어부가 아니라 광부입니다. 그러니 좁디좁은 광산 계곡이라 할 것입니다. 1849년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수많은 광부들이 지금의 미국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몰려들 왔습니다. 이 때 한 광부의 딸인 클레멘타인이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계곡에 흐르는 급 물살에 빠져 죽자 광부 아버지가 딸의 이름을 부르며 부른 애절한 노래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 센프란시스코 축구팀 이름이 '포티나이너, 49ers'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어느 지역은 불과 몇 년만에 마을이 형성되어 도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요세미티 가는 곳에 COLUMBIA STATE HISTORIC PARK(캘리포니아 주 역사 공원)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그 당시의 각종 시설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시켜 놓고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답니다. 그 당시에 금을 찾으러 왔던 사람들은 황량한 캘리포니아 벌판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 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금을 찾아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벌서 작년인가요, 작년 말 각 방송국에서는 연예시상식 연기시상식을 화려하게 꾸며 방영 하였습니다. 거기에 모인 방청객들이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가 나오면 소리를 지르고 어떤 여학생은 엉엉 울기도 하였습니다. 추운 밤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몰려와서 방송국 밖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차에서 내리면 악악 소리를 지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최근에 일본에서 우리나라 가수들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아 한국가수들을 보러 한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먼발치라도 그 가수 얼굴을 보려하고 어쩌다가 눈이라도 마주치고 손이라도 스치면 무슨 큰 영광인 것 처럼 황송해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의 관심이 끌리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다해도 찾아갑니다. 멀다고 느끼지를 않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만사제쳐 두고 찾아 나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돌을 찾아서 다닙니다. 수석을 모으는 사람들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 특별한 돌도 아닌데 그 사람들은 특별하다고 생각을 하고 수집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땅만 바라보고 돌이 어디 있나 하고 찾아서 다닙니다.
하나님도 찾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찾으시지만 그 중에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형식과 외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구약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이 그랬고 노아나 욥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그러한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한 여인을 만나서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성경에 육 시라고 했는데, 육 시는 정오 12시를 말하거든요. 이 때에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왔어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자가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하고 만나지도 않는데, 왜 당신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럽니다. 이렇게 대화가 시작이 되어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물에 대해서 한 참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이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가 실제로 남편이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공식적인 남편이라 할 사람이 없는지 아마도 생활이 문란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한참을 이야기를 하는데, 이 여인이 예배의 문제를 들고나옵니다. 예수님과 얘기를 하는 도중에 예배의 문제가 마음에 부딪히게 되었던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정체가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시잖아요. 지금까지는 어둠 가운데서 그런 대로 자기의 비밀을 숨기며 살아왔는데, 빛 되신 예수님 앞에 설 때에 그것이 다 폭로가 되었으니 더 이상 자기의 죄를 숨길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속죄받기 위해서 성전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았기에 이 여인은 예수님께 사마리아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예배하였던 그리심 산으로 가야 합니까? 아니면 유대 사람들이 예배하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아주 분명하고 명료하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것이 23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배의 질서를 세우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장소의 개념,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를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느냐보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를 더 중요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심 산에서든지 예루살렘에서든지 영과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찾으시며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면 예배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매주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드실 지 모르지만, 예배는 신앙생활의 기본이며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소중한 의무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예배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교회가 이렇다할 만한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배드리는 일만 잘해도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면 큰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던, 오래되지 않았든 상관없이 예배를 잘 드리면 큰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심령에 기쁨을 얻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은혜를 받고 형통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병도 낳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능력도 받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선거 운동을 하느라고 얼마나 바쁘겠어요. 웬만하면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주일이면 큰 교회에 순회하며 선거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주일이면 고향의 작은 교회로 돌아갑니다.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23년 동안을 개근하며 교회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는데 그 날도 변함 없이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7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기자들이 이 바쁜 시간에도 고향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하고 질문을 했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부터는 여러분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
참 멋있는 분입니다. 대통령 출마를 해서 얼마나 바쁘겠어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예배가 먼저예요. 하나님 앞에 진실함이 있어요. 평소대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생각과 삶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맞는 말입니다.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 이예요. 예배가 가장 긴급한 것 이예요. 예배가 가장 영광된 일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잘 드리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러한 교회와 성도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실 때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기뻐하시는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냥 육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찬송하고 성령 안에서 봉헌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 밖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이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니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예배시간이 지루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알아듣지 못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아예 눈감고 잠을 청합니다. 전에 신풍교회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설교 시작하면 곧 잠이 듭니다. 어쩌다가 의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적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세상 지식으로만 읽으려 한다면 이해도 안되고 재미도 없습니다. 단 한 줄을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을 읽으면 말씀 속에 꿀이 있고 깨가 있습니다. 말씀의 맛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단 한 절을 읽어도 은혜를 받습니다. 찬송도 그냥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작사 작곡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가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부르지 않으면 은혜가 없습니다. 마치 영어로 된 노래 가사의 뜻도 모르고 미국노래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찬송을 부르면 가사에 은혜 받고 곡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러분, 찬송 부를 때에 눈물 흘려본 적 없다면 아직 성령의 감동으로 찬송을 안 불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도 성령의 감동 없이 헌금한다면 돈 천원이 아깝고 만원 헌금하는데도 화가 납니다. 당신 옷 사입을 때에 100만원 줘도 아깝지 않은데 교회에 특별감사헌금 5만원 하는 것도 아까워 3만원 할까 5만원 할까 망설이다가 4만원에 낙찰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이 예물을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봉헌예물을 드리는 사람은 1000원 밖에 없어 1000원을 드리지만 이 1000원에 제 몸까지 얹혀 드립니다고 고백합니다. 10만원인들 아깝습니까? 100만원인들 아깝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봉헌 하는 사람은 그 지폐에 적힌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힘껏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칫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도취에 빠지고 영광주의 신앙에 몰두해 자아를 상실한 채 격한 감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주님은 말씀하기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라는 말씀은 진리 안에서 드린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데, 예배 시간에 전해지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사모하는 사람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기도 하셨고, 이상으로 말씀하기도 하셨고, 또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찾아 오셨고, 백성들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예배 시간에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할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에 영적 암세포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우상숭배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바로 이 영적 암세포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죽일 것이다.’사람들은 들은숭만숭 입니다. 다음에 예언자 이사야가 또 말하고, 또 아모스가 말하고 호세아 미가라는 예언자들이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영적 암세포를 물리치라고 외쳤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귓등에도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등장하여 너희는 곧 죽을 것이다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긴급히 호소하였지만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영적으로 귀가 먹으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히도 아무도 예언자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가 망했습니다. 왕과 귀족들은 물론이요 수 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머나먼 나라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끌려간 포로들 중에 에스겔이란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제 이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죽었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말라버린 마른 뼈들을 향해서 외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열정과 마음을 깨닫고 마른 뼈들에게 외쳤습니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뼈에 살이 붙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생명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혼돈의 자리가 질서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자리가 희망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임하시듯 우리의 심령속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나 매 주일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드리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서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생각이 달라지게 되고 말이 달라지게 되고, 인격이 달라지게 되고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생활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이 꾸밈이 없어집니다. 순수해 집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위선자의 모습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해 집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은혜가 매주일 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예배의 절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죽은 자를 살립니다.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요 위로요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진리에 귀 기울 일 때에 하나님이 축복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과 진리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축복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금년 우리교회 목회 목표로 영과 진리의 교회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성생활의 발견과 진리로 새 생활이란 목회방향을 잡아 한해 우리의 신앙의 경주가 시작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여러분,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몰려온 미국 서부개척자들처럼 2011년 52주 하늘의 광맥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의 찾으신 바 되어 새초 부터 새 말까지 날마다 때마다 오직 하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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