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6일 주일아침 예배설교
전병호
201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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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6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수 3 : 5 거룩한 삶 부흥하는 교회
흔히 중국 상품은 믿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실상 중국 상품가운데 훌륭한 상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비호아래 중국은 짝퉁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나 음식을 먹을 때 색안경을 끼고 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명풍과 짝퉁의 차이를 아십니까? 요즘 하도 기술이 좋아 명품과 짝퉁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터넷을 보닌까 명풍과 짝퉁을 구별하는 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비가 올 때 핸드백을 머리 위에 올려 비를 가리고 있으면 그것은 100% 짝퉁이랍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슴에 안으면 그것은 틀림없는 명품이랍니다. 커피숍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무릎 위에 핸드백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명품이랍니다. 그러나 핸드백을 의자 옆에 놓으면 그것은 짝퉁이랍니다. 남편이 사준 것은 대개 짝퉁이고. 애인이 사준 것은 명품이랍니다. 교인들이 낮 예배시간에 들고 온 것은 대개 명품이고 새벽기도 때 들고 온 것은 대개 짝퉁이랍니다.
물건에만 명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도 신앙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명품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명품신앙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서서 지난 40년 동안 그처럼 가고 싶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모든 백성은 삼일동안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요단강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기적을 베푸실까.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합니다. 수3 : 5, “너희는 자신을 성결케 하라. 여호아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
여러분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 서 있습니까? 들판이 아니라 요단강 가입니다. 광활한 초원이 아니라 때는 우기라 흉흉한 물결이 흘러내리는 강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할 일은 강을 건너가는 일입니다. 어떻게 강을 건너 갈 것인가 그들이 연구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성결하라. 너는 내 앞에 거룩하라. 그리하면 내가 행하리라?”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말씀은 어떻게 강을 건너가라는 방법론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결하라, 거룩하라”는 성전에서 제사장이 할 말씀이요 앞으로 건너갈 땅에서 주실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건너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차제에 무슨 성결하라 거룩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아한 생각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때는 상황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고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면 이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8월 뜨거운 여름날에 기쁘다 구주오셨네 찬송을 부르면 잘못택한 찬송일 것입니다. 이처럼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뜬금없이 “성결하라”, “거룩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은혜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거룩하라. 성결하라” 말씀합니다. 직장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데 거룩하라 성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에서 아침식사 끝내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빨래하고 청소한다음 잠시 쉬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거룩하라. 성결하라”. 새벽기도 끝나고 돌아와 잠깐 쉬는 데 그 사이를 못 참으시고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거룩하라. 성결하라”.
성경을 보면 성경의 인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거의 이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세겠다고 약속하신지 24년이 지나가는데 감감 무소식입니다. 이미 비록 서자이지만 이스마엘도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 아브라함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창17:1,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지금 아브라함이 원하는 것은 아들인데 하나님은 아들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완전하라, 내 앞에서 완전하라” 모처럼 아브라함에게 오셨으니 아들은 언제 주겠다든지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든지 약속과 위로의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약속도 위로도 없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완전하라. ”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매우 현실적인 데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영적인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들, 딸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내산에서 받을 축복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요단강 건너가 살게 될 미래의 가나안땅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오늘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거룩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잘하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잘한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야곱은 누가 봐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였습니다. 벧엘 광야에서 기도할 때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환상 중에 본 사람입니다. 그는 형 에서보다 확실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세상적인 성공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굼치를 잡더니 자라서 형의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양의 탈을 쓰고 형으로 변장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그러다가 탄로가 나 하란으로 도망 갔는 데 하란에서도 야곱은 욕망의 길을 갔습니다. 삼촌 라반의 두 딸과 그 재물에 눈독을 들였고 그것을 얻기 위해 20년동안 온갖 고난을 참고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고 금의환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 대해 전혀 다른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야곱이 인간적인 성공을 향하여 줄달음칠 때 하나님은 야곱의 영적 거룩함을 위해 저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야곱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를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도망가게 한 것도, 라반을 만나 많은 고생을 한 것도 야곱의 거룩함을 이루어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과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만났습니다. 야곱과 천사가 만난 것 뿐 아니라 인간적인 욕망이냐 영적인 거룩함이냐가 판가름 나는 일대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야곱이 이긴 것 같았으나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이겼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서지고 부서진 인간의 욕망사이로 브니엘,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며 거룩한 자가 되기 원했던 하나님의 뜻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적인 거룩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큰 자가 되기 원하나 하나님은 작은자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넘치도록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가난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으시되며 잘난척하며 멋지게 살아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온유하고 겸손히 영적으로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건너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제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일 요단강 건너는 일이 그들의 목표라고 하면 하나님은 수단이 되고 나는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선물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목표가 되고 내가 수단이 됩니다. 요단강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의 목표는 요단강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기만 하면 요단강 건너는 일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일입니다. 목표가 내 일이라면 선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일생 다가도록 하나님만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루고 싶은 것을 목표로 삼으려고 하는데,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으려고 하여야 합니다. 목표로 삼으면 이루기 힘들고 이루어도 내가 했다고 교만합니다. 그러나 선물로 받으면 이루기도 쉽고 이루어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성공하면 모든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면 다른 모든 것은 다 주시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면 건강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면 물질을 선물로 받게됩니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축복을 선물로 받게됩니다. 새벽에 나와 기도하면 사업의 축복을 선물로 받게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면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면, 직장에서 진급하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분명히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목표 삼으면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天父賜福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우리의 물질적 욕망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데 바로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거룩입니까? 많은 사람이 거룩을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엡1:4절,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가 흠과 티가 없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본래 구약에서 흠 없는 제물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결격사유가 없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한 쪽 눈이 먼 양이나, 발이 저는 염소, 귀가 하나 없는 소는 흠 없는 제물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정성껏 편지를 쓰고 마지막에 “You are so beauiful”이라고 썻 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자세히 보니 뷰티풀에 t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뷰티풀은 가운데 t가 있는 데 t자를 빼놓으셨군요”. 그때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본래 t없이 아름다운 분이라 t를 뺐습니다”. 이 남자는 잘못 타자를 처서 t가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상에 티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얼굴은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과 영혼에 티 없고 흠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완전”한 거룩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죄악 세상에서 살면서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로 거룩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빛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은 만큼 그 빛을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빛을 촛불만큼 받았으면 촛불만큼 세상을 밝히고 예수님의 빛을 100와트 전등만큼 받았으면 그 만큼 세상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네가 받은 대로 그대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두 부처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오래 참선하고 불공을 드리면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부처 된 사람이 있습니까? 옛날 신라시대에 노칠부득과 달달박박이란 스님이 있었습니다. 두 스님은 부처가 되기 위해 깊은 산 속에 암자를 짓고 참선하기를 수 십년이 지난 어느 날 밤입니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달달박박 암자를 찾아와 하룻밤 제워달라고 합니다. 달달박박은 내가 홀로 불공을 드리고 있으니 재워줄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노칠부득 암자로 갔습니다. 노칠부득은 들오라고 합니다. 여인이 목욕을 하고 싶으니 목욕물을 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욕물을 방안에 들여 주었습니다. 여인은 벌거벗고 목요 통에 들어가 목욕을 하며 등을 밀어달라고 합니다. 역시 등을 밀어 줍니다. 나와 같이 함께 목욕하자고 합니다. 노칠부득은 옷을 벗고 목욕통으로 들어갑니다. 그 순간 천지가 환해지면서 그 여인은 관세음보살로 화하고 노칠부득은 금빛 찬란한 부처가 된다는 신라설화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된 노칠부득은 그 암자에 앉아 사람들로부터 불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적인 이해로 한다면 노칠부득은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금빛 찬란한 빛을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바로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주는 일이지 산곡간 암자에 금칠을 하고 앉아 불고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룩하다는 의미도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믿는 그만큼 세상 가운데 거룩해 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톱만큼 가졌다면 손톱만큼이라도 거룩해 질 것입니다. 주먹만큼 가졌다면 주먹만큼은 거룩해 져야 합니다. 네 믿음의 분량만큼 사람들 앞에 거룩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니고 있는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만큼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느냐 그만큼이 바로 그의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만큼의 거룩함을 세상에 나타낼 때 그 만큼의 10배 30배 60배 100배의 부흥의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2010년 우리교회의 목표로 거룩한 삶 부흥하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아마도 오늘 처음 듣는 것 같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보에 매 주일 표기되었어도 관심 없는 분들에게는 낫 설은 말입니다. 어린이 부에서는 주일아침 예배 때마다 이 표어를 어린이들이 제창하고 예배를 들였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서 있듯 건너편 새해를 바라보며, 오늘 송년 주일에 우리는 지나온 한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믿음만큼 복을 받았고 우리가 거룩하게 산 것 만큼 은혜를 선물로 받았음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더 많은 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고 더 많은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으며 더 많은 부흥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는데 우리의 믿음의 부족함과 거룩함의 모자람 때문에 한 해 살아오면서 세상가운데 다 흘려버리고 더 이상 선물도 받지 못하고 여기까지만임을 아쉽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다짐합시다. 새해에는 달라져야 합니다. 2010년 언덕에 올라 요단강 건너편 2011년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그 큰 부흥의 축복을 새해에 주시는 선물로 받으리라고 다짐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송년을 맞이한 여러분과 가정에 다시금 주시는 넘치는 축복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흔히 중국 상품은 믿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실상 중국 상품가운데 훌륭한 상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비호아래 중국은 짝퉁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나 음식을 먹을 때 색안경을 끼고 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명풍과 짝퉁의 차이를 아십니까? 요즘 하도 기술이 좋아 명품과 짝퉁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터넷을 보닌까 명풍과 짝퉁을 구별하는 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비가 올 때 핸드백을 머리 위에 올려 비를 가리고 있으면 그것은 100% 짝퉁이랍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슴에 안으면 그것은 틀림없는 명품이랍니다. 커피숍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무릎 위에 핸드백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명품이랍니다. 그러나 핸드백을 의자 옆에 놓으면 그것은 짝퉁이랍니다. 남편이 사준 것은 대개 짝퉁이고. 애인이 사준 것은 명품이랍니다. 교인들이 낮 예배시간에 들고 온 것은 대개 명품이고 새벽기도 때 들고 온 것은 대개 짝퉁이랍니다.
물건에만 명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도 신앙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명품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명품신앙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서서 지난 40년 동안 그처럼 가고 싶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모든 백성은 삼일동안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요단강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기적을 베푸실까.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합니다. 수3 : 5, “너희는 자신을 성결케 하라. 여호아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
여러분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 서 있습니까? 들판이 아니라 요단강 가입니다. 광활한 초원이 아니라 때는 우기라 흉흉한 물결이 흘러내리는 강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할 일은 강을 건너가는 일입니다. 어떻게 강을 건너 갈 것인가 그들이 연구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성결하라. 너는 내 앞에 거룩하라. 그리하면 내가 행하리라?”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말씀은 어떻게 강을 건너가라는 방법론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결하라, 거룩하라”는 성전에서 제사장이 할 말씀이요 앞으로 건너갈 땅에서 주실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건너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차제에 무슨 성결하라 거룩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아한 생각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때는 상황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고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면 이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8월 뜨거운 여름날에 기쁘다 구주오셨네 찬송을 부르면 잘못택한 찬송일 것입니다. 이처럼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뜬금없이 “성결하라”, “거룩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은혜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거룩하라. 성결하라” 말씀합니다. 직장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데 거룩하라 성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에서 아침식사 끝내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빨래하고 청소한다음 잠시 쉬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거룩하라. 성결하라”. 새벽기도 끝나고 돌아와 잠깐 쉬는 데 그 사이를 못 참으시고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거룩하라. 성결하라”.
성경을 보면 성경의 인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거의 이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세겠다고 약속하신지 24년이 지나가는데 감감 무소식입니다. 이미 비록 서자이지만 이스마엘도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 아브라함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창17:1,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지금 아브라함이 원하는 것은 아들인데 하나님은 아들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완전하라, 내 앞에서 완전하라” 모처럼 아브라함에게 오셨으니 아들은 언제 주겠다든지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든지 약속과 위로의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약속도 위로도 없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완전하라. ”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매우 현실적인 데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영적인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들, 딸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내산에서 받을 축복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요단강 건너가 살게 될 미래의 가나안땅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오늘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거룩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데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잘하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잘한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야곱은 누가 봐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였습니다. 벧엘 광야에서 기도할 때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환상 중에 본 사람입니다. 그는 형 에서보다 확실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세상적인 성공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굼치를 잡더니 자라서 형의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양의 탈을 쓰고 형으로 변장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그러다가 탄로가 나 하란으로 도망 갔는 데 하란에서도 야곱은 욕망의 길을 갔습니다. 삼촌 라반의 두 딸과 그 재물에 눈독을 들였고 그것을 얻기 위해 20년동안 온갖 고난을 참고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고 금의환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 대해 전혀 다른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야곱이 인간적인 성공을 향하여 줄달음칠 때 하나님은 야곱의 영적 거룩함을 위해 저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야곱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를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도망가게 한 것도, 라반을 만나 많은 고생을 한 것도 야곱의 거룩함을 이루어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과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만났습니다. 야곱과 천사가 만난 것 뿐 아니라 인간적인 욕망이냐 영적인 거룩함이냐가 판가름 나는 일대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야곱이 이긴 것 같았으나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이겼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서지고 부서진 인간의 욕망사이로 브니엘,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며 거룩한 자가 되기 원했던 하나님의 뜻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적인 거룩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큰 자가 되기 원하나 하나님은 작은자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넘치도록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가난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으시되며 잘난척하며 멋지게 살아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온유하고 겸손히 영적으로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건너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제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일 요단강 건너는 일이 그들의 목표라고 하면 하나님은 수단이 되고 나는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선물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목표가 되고 내가 수단이 됩니다. 요단강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의 목표는 요단강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기만 하면 요단강 건너는 일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일입니다. 목표가 내 일이라면 선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일생 다가도록 하나님만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루고 싶은 것을 목표로 삼으려고 하는데,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으려고 하여야 합니다. 목표로 삼으면 이루기 힘들고 이루어도 내가 했다고 교만합니다. 그러나 선물로 받으면 이루기도 쉽고 이루어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성공하면 모든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면 다른 모든 것은 다 주시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면 건강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면 물질을 선물로 받게됩니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축복을 선물로 받게됩니다. 새벽에 나와 기도하면 사업의 축복을 선물로 받게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면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면, 직장에서 진급하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분명히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목표 삼으면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天父賜福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우리의 물질적 욕망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데 바로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거룩입니까? 많은 사람이 거룩을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엡1:4절,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가 흠과 티가 없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본래 구약에서 흠 없는 제물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결격사유가 없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한 쪽 눈이 먼 양이나, 발이 저는 염소, 귀가 하나 없는 소는 흠 없는 제물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정성껏 편지를 쓰고 마지막에 “You are so beauiful”이라고 썻 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자세히 보니 뷰티풀에 t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뷰티풀은 가운데 t가 있는 데 t자를 빼놓으셨군요”. 그때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본래 t없이 아름다운 분이라 t를 뺐습니다”. 이 남자는 잘못 타자를 처서 t가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상에 티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얼굴은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과 영혼에 티 없고 흠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완전”한 거룩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죄악 세상에서 살면서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로 거룩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빛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은 만큼 그 빛을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빛을 촛불만큼 받았으면 촛불만큼 세상을 밝히고 예수님의 빛을 100와트 전등만큼 받았으면 그 만큼 세상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네가 받은 대로 그대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두 부처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오래 참선하고 불공을 드리면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부처 된 사람이 있습니까? 옛날 신라시대에 노칠부득과 달달박박이란 스님이 있었습니다. 두 스님은 부처가 되기 위해 깊은 산 속에 암자를 짓고 참선하기를 수 십년이 지난 어느 날 밤입니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달달박박 암자를 찾아와 하룻밤 제워달라고 합니다. 달달박박은 내가 홀로 불공을 드리고 있으니 재워줄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노칠부득 암자로 갔습니다. 노칠부득은 들오라고 합니다. 여인이 목욕을 하고 싶으니 목욕물을 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욕물을 방안에 들여 주었습니다. 여인은 벌거벗고 목요 통에 들어가 목욕을 하며 등을 밀어달라고 합니다. 역시 등을 밀어 줍니다. 나와 같이 함께 목욕하자고 합니다. 노칠부득은 옷을 벗고 목욕통으로 들어갑니다. 그 순간 천지가 환해지면서 그 여인은 관세음보살로 화하고 노칠부득은 금빛 찬란한 부처가 된다는 신라설화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된 노칠부득은 그 암자에 앉아 사람들로부터 불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적인 이해로 한다면 노칠부득은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금빛 찬란한 빛을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바로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주는 일이지 산곡간 암자에 금칠을 하고 앉아 불고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룩하다는 의미도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믿는 그만큼 세상 가운데 거룩해 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톱만큼 가졌다면 손톱만큼이라도 거룩해 질 것입니다. 주먹만큼 가졌다면 주먹만큼은 거룩해 져야 합니다. 네 믿음의 분량만큼 사람들 앞에 거룩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니고 있는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만큼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느냐 그만큼이 바로 그의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만큼의 거룩함을 세상에 나타낼 때 그 만큼의 10배 30배 60배 100배의 부흥의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2010년 우리교회의 목표로 거룩한 삶 부흥하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아마도 오늘 처음 듣는 것 같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보에 매 주일 표기되었어도 관심 없는 분들에게는 낫 설은 말입니다. 어린이 부에서는 주일아침 예배 때마다 이 표어를 어린이들이 제창하고 예배를 들였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서 있듯 건너편 새해를 바라보며, 오늘 송년 주일에 우리는 지나온 한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믿음만큼 복을 받았고 우리가 거룩하게 산 것 만큼 은혜를 선물로 받았음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더 많은 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고 더 많은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으며 더 많은 부흥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는데 우리의 믿음의 부족함과 거룩함의 모자람 때문에 한 해 살아오면서 세상가운데 다 흘려버리고 더 이상 선물도 받지 못하고 여기까지만임을 아쉽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다짐합시다. 새해에는 달라져야 합니다. 2010년 언덕에 올라 요단강 건너편 2011년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그 큰 부흥의 축복을 새해에 주시는 선물로 받으리라고 다짐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송년을 맞이한 여러분과 가정에 다시금 주시는 넘치는 축복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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