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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19일 주일아침예배설교
전병호 2010-12-19 추천 0 댓글 0 조회 98
2010년 12월 19일 주일아침예배설교 요 3:16 최고의 선물



100년전 미국에 가장 유명한 부흥사로 알려진 '무디'목사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무디 목사님이 그의 동역자 무어하우스를 만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어하우스가 열 일곱 살 청소년으로서 무디 목사님의 교회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무어하우스의 설교를 듣고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래서 무디 목사님은 무어하우스를 6일 동안 교회부흥강사로 초청하였습니다. 무어하우스는 요 3:16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무디가 설교해 왔던 내용인 예수를 믿지 않으면 인간은 죄에 빠져 지옥에 간다는 설교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그의 독생자 예수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시켰다며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설교였습니다. 둘째 날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설교할 말이 그것뿐이 없는지 6일 동안 같은 주제의 설교를 했습니다. 마지막 날 그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지난 6일 동안 계속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나의 둔한 혀로는 그 사랑을 더 표현할 수 없었고, 오늘 내내 요 3:16보다 더 좋은 말씀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요한 복음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도 매일 처음 대하는 소식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마침내 무디 목사님은 무어하우스를 자기의 전도 동역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요 3:16 말씀에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된 세상의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는 말씀 속에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 등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낱말들이 다 있고, 그래서 기독교 진리의 골격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축소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신. 구약 성경 가운데 요 3:16 만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 이유를 자세하게 밝힌 곳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 3:16 한 곳만으로도 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무엇 하러 오셨는가를 밝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 3:16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외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과,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요 3:16은 신. 구약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 한 절만 알고 믿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됩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세계적 부흥사를 무디 목사님이라 하면 20세기의 유명한 세계적 부흥사를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라 할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미국의 휴스턴 시에 가서 대집회를 인도하면서 요 3:16을 가지고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 설교를 할 때는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들을 때 이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듣는 설교인 것처럼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일을 아무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바로 들으면 내일이 없다 해도 영원히 사는 자가 될 것이고, 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원히 불행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마지막 듣는 설교인 것처럼 겸허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이 보낸 심부름꾼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에 주신 요 3:16말씀은 내가 평생 들어야 할 말씀이며 내가 생을 떠날 마지막에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자세로 요 3:16 말씀을 전하고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참 신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영이신 하나님-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절대로 물질적인 존재로 형상화하여 섬겨서는 안되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2. 인격적이신 하나님-하나님은 뜨거운 사랑의 감성과, 완전한 지성, 거룩한 의지를 갖고 계시는 인격적이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3. 유일하신 하나님-비록 이 세상에는 자칭 타칭 신이라 칭하는 자가 많이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시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주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심판주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4. 자존하시는 하나님-천하 모든 만물이 다 그것을 있게 한 원인이 있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무원인적인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는 독립적인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5. 거룩하신 하나님-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존재적으로 거룩한 분이시며, 윤리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신 거룩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6. 영원하신 하나님-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영원하신 분이시며,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 안에 계시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영원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7. 전능하신 하나님-인간이 신을 찾고 의지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의 전능성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고 했습니다.
8. 전지 하신 하나님-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시어, 인간의 몸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일에서부터, 우주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모두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9.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초월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 혹은 편재하신 하나님 곧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10. 의로우신 하나님-하나님은 어떤 일을 판단하시고 집행하심에 있어서, 언제든지 공평하고 공정하시다 고 했습니다.
11. 사랑의 하나님-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요 3:16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12. 불변하신 하나님-이 세상은 인심도 변하고, 우정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유행도 변하고, 이데올로기도 변하고, 젊음도 변하고, 부귀영화도 변하고, 변하지 않을 듯 한 산천도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분이 한 분 계시니, 곧 우리 하나님 아버지뿐이시라고 했습니다.
13. 진실하신 하나님-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상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하심으로 자신의 진실성을 입증하셨고, 언약하신 말씀을 모두 성취하심으로 진실함을 입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라 하면 크게 말하면 우주전체를 말하지만 좁게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입니다.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는 우주 속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땅입니까? 태양계속에서도 지구는 그렇게 큰 별이 아닙니다. 태양만 하더라도 지구보다 109배가 더 큽니다. 태양계는 8개의 크고 작은 별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데 지구는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태양계는 또한 은하계속에서 작은 별무리일 뿐입니다. 하나의 은하계 별무리만 하더라도 200만개 내지는 1,000만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1,000만개로 구성된 은하계가 우주 안에는 1,000억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태양보다 1,000배 지구보다 10만 배 이상 더 큰 베델규스, 안타레스 같은 별들이 무수히 널려져 있습니다. 참으로 우주는 광대하기가 그지없고 지구는 우주 안에 모래알 같이 보잘것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마어마한 큰 별들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사랑하고 있으십니까? 이 우주 속에서 아주 작은 별 중의 하나인 지구가 없어진다고 우주가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 속에서 그토록 보잘 것 없는 지구 안에도 60억의 인간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인간들이 지구를 파괴하고 황폐케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수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시키고 있습니다. 지구는 이제 인간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지금 10초안에 45명이 태어나고 17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년이면 1억 4천만 명이 새롭게 태어나고 5천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뇌혈관 질환 하나만으로도 440만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운전사고 하나만으로도 150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독 곤충에 물려죽는 사람만 2만 명이 넘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죽어 가는 사람이 일년이면 3천만 명이 넘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인생이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세상의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 60억 중의 한 사람인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이란 말은 사랑의 한계를 말합니다. 어느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 만큼요 이 만큼 이만큼 아니 자로 잴 수 없을 만큼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냥 어마어마하게 하나님은 나를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나를 바라볼 때마다 왜 귀하다 존귀하다 사랑스럽다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이게 기적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고백이십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죄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배신자입니다. 마귀의 자식입니다. 멸망 받을 자입니다. 이런 조인인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있습니다.

요1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시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고,
요 15: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출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분명히 지적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께 불복종하고 하나님을 속이고 대적했습니다. 생명과 모든 것을 거저 받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대신 미움, 감사대신 불평, 복종대신 불순종으로 되 갚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심판과 죽음의 지경에 놓인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증오대신 사랑을, 심판대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생명 길을 마련하시고 모든 인간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먼저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 값으로 독생자의 피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완전한 표현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내 놓은 그 생명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의리를 위해 생명을 내 놓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순간적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남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은 듯 하나 그것은 참음이 없는 사랑이요, 희생이 없는 사랑이요, 행함이 없는 사랑일 뿐입니다.

어떤 남자가 결혼한지 오래 되어 결혼 생활의 권태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부부 싸움 끝에 그 아내를 나가라고 마구 학대를 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부인은 남편의 애정이 그렇게도 경박한 것에 대하여 실망한 나머지 눈물을 머금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와 얼굴을 단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행장을 차려 가지고 말없이 아무런 반항 없이 친정을 향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집밖으로 나가는 부인을 무끄럼이 바라보다가, 단장한 얼굴과 차려입고 나선 아내의 몸매를 보니까 당장에 마음이 변해서 다시 아내를 불러들여 달래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참으로 이상하오. 어째서 그렇게 미워졌다 고와졌다 하는 것이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 중에 그래도 가장 깊다고 하는 부부간의 사랑이란 것이 고작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세상적, 한시적, 조건적'입니다. 언제나 대상을 선별합니다. 아름답기에 가까이 하고, 크기에 선택하고, 가치가 있기에 따릅니다.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롬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 길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자요 거룩하신 분이신 데 비해, 사람은 피조물이며 죄 많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둘 사이에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사랑을 논할 처지가 됩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랑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사용해 가면서 사랑을 주고받을 만한 처지가 됩니까? 애시당초 상대가 안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데 비해 인간은 너무 낮고 비천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 거룩하신 데 인간은 썩은 걸레 조각처럼 냄새나는 존재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니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할 만한 대상이 못되는데 사람을 사랑하면 이것은 빅뉴스입니다. 그야말로 감동을 자아내는 불멸의 드라마가 되든지, 아니면 두고두고 눈물을 자아내는 비극의 스토리가 되든지 합니다. 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유명합니까? 두 집안이 원수 아닙니까? 두 집안이 사랑이라는 것을 도무지 논할 처지가 못되는 사이인데 사랑이라는 열매가 나타나자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지간인데, 원수 된 나를 사랑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보 온달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고구려 평강왕 때 찌들게 가난한 집안에서 눈이 먼 자기 어머니를 봉양해서 먹여 살리는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얼굴도 우습게 못 생겨서 사람들이 별명을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평강왕이 딸이 어려서부터 자꾸 울기만 하니까 '너 자꾸 울면 커서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귀가 아프도록 말했습니다. 나중에 나이 16살 먹어 고씨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니까 공주가 '나는 거기 안 갑니다. 어떻게 임금이 식언을 하십니까? 저는 온달에게 가겠습니다.' 그래서 온달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둘 사이에 어떻게 사랑이 오갈 수 있습니까? 하나는 왕의 딸이요, 하나는 비천한 오두막에서 빌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이라는 말이 오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결혼했습니다.
바보 온달이 나중에 유명한 장군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사랑해서는 안될 자기를 사랑해서 시집온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 황송하고 기가 막혀서 열심을 다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사이에 사랑이 싹트면 감동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감동이 되어 버립니다.

세상에서도 이런데 어마어마하신 하나님이 벌레만도 못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을 해도 적당히 사랑한 게 아니라, 너무너무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사랑을 볼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셨는가를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내 대신 세상에 보내신 것이 어떻게 평범한 사랑일 수 있습니까? 자기 아들을 내 대신 죽을 자리에 대신 집어넣으신 것이 어떻게 평범한 사랑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요즈음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믿음의 문제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이 없고 십자가 앞에서 감동이 없으니 눈물이 매마르고 눈물이 매마르니 영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에서 주셨으니 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멸망치 않는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자기가 받은 선물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으로 선물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1)선물을 누가 주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연 인. 대통령)
2)선물을 주는 사람의 동기를 들 수 있습니다. (뇌물? 사은?)
3)선물을 주는 방법도 문제가 됩니다.
4)받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선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받는 사람이 아무것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인지,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인지에 따라 그 선물은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네 가지 기준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평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 분입니까? 그러나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선물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2)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동기는 전적으로 순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신 동기는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3)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방법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겸손히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낮은 마구간에 주어졌습니다.
4)하나님의 선물은 죄악과 질병과 각종 더러움 속에서 시달리던 인생들에게 그 선물은 너무나도 필요하고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종교에도 신이 인간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만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 또는 생명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김소월 시인은 수 억 년 밤마다 뜨는 달에게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라고 볼 때마다 새로운 달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순간마다, 호흡마다, 사건마다, 영원히 새롭게 체험되는 감탄사가 있습니다. '주여 주님이 그토록 사랑인줄을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글 중에 온 우주에 온 지구상 60억 인구 중에 마치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랑은 질적으로 세상에는 없는 절대적으로 새것이며, 영원한 첫사랑이며, 개봉 안된 사랑의 편지이며, 주님과 내가 함께 쓰는 일기책이며, 함께 부르는 노래이고, 나는 날마다 새롭게 그의 생명을 잉태하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곧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성탄절을 기쁘다 구주 오셨네 라고 축하하는 것입니까? 그 아기 예수님이 장차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최고의 선물을 주신 주님께 우리의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 있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입은 성도는, 이웃 사랑으로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독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수 같은 마귀의 자신인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이처럼 큰 선물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세상에서 미운 사람 원수 같은 사람 하나 없도록 사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심은 그 사랑을 또 이웃에게 나누어주라고 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면 우리도 굶주린 이웃에게 양식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번 성탄절이 받은 큰 선물을 나눌 때 비로소 더욱 큰 선물을 내가 받았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선물이 여러분 가정과 생업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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