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5일 주일아침예배설교
전병호
201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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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5일 요 8장 12절 빛 되신
매년 11월 달에 영국에서는 두 개의 기념일을 국가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된 뻬뻬로 데이란 11월 11일은 영국에서 영령기념일(remembrance day) 이라 하여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일을 기념하여 매년 들 양귀비꽃 조화를 가슴에 달고 이날 오전 11시에 묵념 싸이렌이 울리면 2분간 엄숙한 자세로 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요란스럽게 지키는 '가이폭스의 날(Guy Fawkes Day)'이 있습니다. 11월5일되면 400여 년간 이어온 전통적인 풍습인 불꽃놀이와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장작 등을 태우는(fireworks and bonfires night) 축제가 이날에 펼쳐집니다. 1605년에 로마 가톨릭교도를 탄압하는 제임스1세 왕과 모든 귀족들 상하 의원들을 암살하려고 가이폭스 등 13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당시 교황의 허가 하에 영국 국회 개회의 날을 맞추어서 지하에 36통의 화약통을 설치하여 웨스트민스터 궁전(국회의사당)을 폭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공모자중 한사람이 자기의 처남을 살리려고 미리 귀 띰을 해준 것으로 인하여 사건 전모가 밝혀져 폭발 직전에 발각이 되었습니다. 가이 폭스와 주동자들이 붙잡아 공개처형(Hanged, drawn and quartered; 매달아서 사지를 찢고 참수하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 능지처참과 비슷함)을 하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여 매년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전국에서 불꽃놀이를 하거나 가이폭스의 인형 같은 것을 태우며, 오랜 세월동안 왕권에 대한 저항적 반역적 행위를 엄두도 못 내도록 국민들에게 널리 의식을 심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 날에 아이들이 너덜너덜한 넝마 옷을 입은 가이 폭스 인형(effigy)을 들고 다니면서 동전을 달라고(a penny for the guy)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칩니다. 이 가이 폭스의 ‘guy’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금 사용되는 놈 자식으로 쓰이는 guy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he is good guy 그놈은 좋은 놈이야 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영국을 위시한 영 연방 나라에선 11월 5일에 성대한 불꽃놀이 축제를 벌리는 데 이런 영향에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퍼지면서 무슨 축제할 일이 있으면 밤하늘에 불꽃으로 수놓는 불꽃 축제를 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꽃 축제행사는 과거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소위 ‘초막절‘이라고 하는 절기에 이것이 행해졌습니다. 1년의 모든 추수를 끝낸 후, 집 앞에 초막을 지어놓고 거기에서 7일 동안 기거하였습니다. 초막절 첫날 저녁이 되면 이 축제가 시작되는데, 이 때에는 밤마다 큰 등불을 성전 뜰 안에 밝혀 놓습니다. 그런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은지 예루살렘 온 도시가 환해지고 여인들은 불빛 아래에서 뜨개질을 할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 광장 한복판에 여러 개의 봉화대를 만들어 놓고 불을 밝힘으로써 예루살렘 시내 구석구석까지 밝게 비춥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밤새도록 춤을 추며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과거 자기 민족이 애굽에서 수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불기둥으로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이 행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초막절 마지막 날인 7일째가 되면 등불이 서서히 꺼지게 되는데, 그 동안 즐겁게 춤을 추며 노래하는 소리도 멈추면서 예루살렘 도시의 밤은 또 다시 어두워집니다.
어느 해인가 이같은 초막절 불꽃 축제가 서서히 끝나 가는 그 때 갑자기 군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이 선언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1주일 내내 밝혀진 세상의 불은 시간이 지나면 꺼지게 되어 결국에는 또 다시 깜깜한 어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빛은 다시 꺼져버리는 세상의 불이나 어둠에 묻혀 버리는 태양 빛과 다릅니다. 한번 켜지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 온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어 도무지 어둠이 깃들지 못하도록 하는 생명의 빛이 왔다고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선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는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과 10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창조 전부터 생명의 빛으로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워진 이 세상을 비추시려고 직접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5절과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세상은 참 밝은 세상이 되지만,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은, 세상 어느 나라 가보아도 아직도 어둠 가운데 죽어버린 세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밤거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밝다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의 밤 거리는 매우 어둡습니다. 그래서 저녁 6시가 되면 거의 상점들은 문을 닫습니다. 거리는 어둡고 조용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 거리를 질주 하는 자동차의 헫드라이트 빛 만이 길게 밤거리에 줄을 긋듯 합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무서워 합니다. 모든 죄악은 어둠 속에서 벌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밤거리가 대 낮같이 환하게 한 것은 그만큼 범죄가 많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밤거리를 대 낮같이 밝게 한다고 하여도 영혼의 어두움은 오히려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서울 신사동 압구정동 홍익대 앞 등 등 어두운 영혼들이 타락과 방종으로 날 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진정 이 시대에 영혼을 환하게 밝혀 주는 생명의 빛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한 옛날에는 지식이 부족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서 어둡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앉아서 수 만리를 보고 있는 시대이지만, 그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어떤 정보가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코앞의 일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래서 다시 어두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진정 이 시대에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 인지 무엇 선이고 악인지를 밝혀주는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이 발달하고 옛날보다 경제적 수준이 높아져 단군이래 가장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만 2008년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이 2422명이나 됩니다. 옛날에는 걸어서 다니거나 소달구지를 타고 가거나 바쁘면 말을 타고 가기도 하여 무슨 교통사고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이카시대라 얼마나 신나게 달리며 좋은 세상이라 하지만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2008년에 5155명 이였다고 합니다. 북한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말 거의 듣지 못합니다. 1000원만 있어도 한끼 충분히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살기 싫다고 죽는 사람이 작년에 15413명이나 됩니다. 우리나라 의사가 10만 명이요 약사가 6만 명이요 양의원 양 약사 한의원 한약사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런데 작년 암으로 죽은 사람이 68902명이요 다른 질병을 합치면 십 수 만 명에 이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였다고 해서 사람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안심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죽엄의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마치 그물로 잡듯 잡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어디가 안전지대이며 어디가 평화의 터입니까? 죽음이 내 코앞에 다가와 있어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영적 귀가 막혀서 드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왔으되 어둠에 빠져 있는 사람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이 밝아 왔는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 1:5에 "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진정 생명의 빛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이 되신다고 요한 사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어둠도 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오시므로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빛을 비추시므로 그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가 오시지 않아도 이미 빛으로 창조된 세계인데, 어째서 다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마귀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둠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세상은 하나님의 빛이 없는 캄캄한 밤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세상'이란 단어가 78회 나오는데, 대체로 모두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며, 따라서 어둠으로 덮여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 세상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온갖 범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래 빛으로 창조된 세상이기 때문에 빛을 받지 않으면 그 세상이 병들고 시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들도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겨울이 긴 북극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많이 걸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가 짧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자주 햇볕에 벌거벗고 누워 햇볕을 쪼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특히 북유럽의 경우 흐린 날이 많고 해가 짧기 때문에 해가 비추는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 앞에 나와 썬팅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건강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가 주님의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면 병들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오래 갈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으로 살게 되며, 감사와 기쁨 대신 짜증과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며, 화해와 관용과 용서 대신에 분쟁과 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으며, 정의와 평화는 사라지고 불의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며,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일상화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의 열매인 선과 의와 진실은 없고 악과 불의와 거짓만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감사함과 기쁨과 사랑 대신 짜증과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 이! 내 영이 하나님의 빛이 필요하다고 하는구나 ' 그래서 서구 사람들이 옷을 벗고 햇볕을 쪼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위선과 체면의 꺼풀들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므로 주님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어둠의 요소들을 몰아내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둠의 세력이 계속 우리를 위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만나고 시련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해가 있어도 밤이 오는 것과 같고, 혹은 해가 떠도 짙은 구름이 끼어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은 잠시이며, 그 환난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내하며 그 어둠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며, 환난을 믿음으로 뚫고 나가면, 거기에 새로운 길이 나타나며, 오히려 환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용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에게는 어둠의 위협이나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긍정적인 요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빛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밤도 안전한 합니다. 밤에 우리의 육신은 잠이 들지만 우리의 영혼은 더욱 빛을 발하며 우리의 육신을 지켜줍니다. 우리의 영은 잠들지 않습니다.
겨울은 동 식물들이 쉬는 동면 시간입니다. 농부들에게 겨울은 휴식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으로 우리의 심령을 따뜻하게 지켜주고 새 힘을 더하여 줌으로 세상가운데 언제나 승리자로 살게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전인 1700년대 유럽 역사를 보면, 프랑스와 영국은 극히 대조적인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혁명이 계속되고 또 그 혁명에 대한 반대혁명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하루도 사회가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프랑스에는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영국은 달랐습니다. 부패하기는 프랑스나 영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 이상으로 영국에도 부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랐습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영국을 프랑스와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영국을 다르게 만든 것은 바로 존 웨슬리나 조지 휘필드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영국에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 빛이 비추이자, 영국이 변화된 것입니다. 부패한 영국이 영적으로 부흥되었습니다. 혼돈의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빛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복음의 빛에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곳마다 변화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한국 최초 맹인 박사가 된 강영우 박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원래 그 분은 어렸을 때에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이 떨어져 나가 앞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입원하며 눈을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현대의학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실명 선고를 받았을 때, 어린 강영우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맹인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나 되고 인간 구실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데 격으로 가정은 매우 가난하여 고픈 배를 움켜지며 캄캄하고 지루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며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후, 문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 주님은 이것 뿐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로 정규 유학생이 되어 미국에 도착 한 후,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 대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조지 부시 대통령(George W. Bush)의 종교 및 사회봉사 분야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 실명과 언어의 이중 장애에도 불구하고 미국 12만 명 중 1명 꼴로 오르는 미국명사 인명사전(Who's who in America)은 물론 세계명사사전(Who's who in the world)에도 약력이 수록된 저명인사가 되었습니다. 1983년에 출간한 “빛은 내 가슴에“라는 그분의 책은 일본어, 스페인어 등의 여섯 개 나라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지도자 중 한 분이시며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널리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강영우박사의 “빛은 내 가슴에“라는 책을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박사, 당신의 생애를 알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산증인입니다.“ 이렇게 생며의 빛 되신 주님께서는 장님이 된 어린 강영우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빛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그들은 항상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진위에 멈추면 그들은 그들의 행군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나든지, 몇 달이 지나든지 그냥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움직이면 그들도 전진했습니다.
성경에는 이 장면을 (출13:21,22)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40년 광야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인생 여행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항상 생명의 빛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길을 비추어 주시는 진정한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느 대학에 들어가야 할지, 어느 회사에 들어가야 할지, 누구하고 결혼해야 할지, 무슨 사업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나는 잘 모르지만, 주님은 다 아십니다.
성도여러분, 생명의 빛 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길을 한 걸음씩 늘 인도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2010년 성탄절에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사람들이 폭탄 테러에서 구원받은 날인 가이폭스날에 불꽃축제를 벌리듯이 우리는 우리를 죄악의 어둠 사탄의 테러에서 생명 빛을 비추어 주신 예수님의 탄생의 날, 이 날에 큰 축제의 날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므로 빛으로 어두웠던 세상을 이제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며, 혼돈은 더 이상 무질서가 아니며,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비쳐진 그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 어둠과 혼돈과 죽음은 모두가 생명의 빛 속으로 흡수되어 그 속에 지녔던 독소들은 빠져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깃들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탄 목에 장식하고 불을 밝히는 것은 다만 성탄목 장식에 의미가 있음이 아니요 바로 나 자신이 성탄목이 되어 주님의 빛으로 장식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믿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에 여러분의 삶이 반짝 반짝 빛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빛 가운데 거하면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열매인 선함과 정의와 진실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다 하더라도 빛 되신 주께서 여러분의 인생 길을 한 걸음씩 늘 인도 하심으로 이 생명의 빛 속에 사는 여러분에게 승리가 있고 행복이 있고 성공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년 11월 달에 영국에서는 두 개의 기념일을 국가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된 뻬뻬로 데이란 11월 11일은 영국에서 영령기념일(remembrance day) 이라 하여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일을 기념하여 매년 들 양귀비꽃 조화를 가슴에 달고 이날 오전 11시에 묵념 싸이렌이 울리면 2분간 엄숙한 자세로 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요란스럽게 지키는 '가이폭스의 날(Guy Fawkes Day)'이 있습니다. 11월5일되면 400여 년간 이어온 전통적인 풍습인 불꽃놀이와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장작 등을 태우는(fireworks and bonfires night) 축제가 이날에 펼쳐집니다. 1605년에 로마 가톨릭교도를 탄압하는 제임스1세 왕과 모든 귀족들 상하 의원들을 암살하려고 가이폭스 등 13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당시 교황의 허가 하에 영국 국회 개회의 날을 맞추어서 지하에 36통의 화약통을 설치하여 웨스트민스터 궁전(국회의사당)을 폭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공모자중 한사람이 자기의 처남을 살리려고 미리 귀 띰을 해준 것으로 인하여 사건 전모가 밝혀져 폭발 직전에 발각이 되었습니다. 가이 폭스와 주동자들이 붙잡아 공개처형(Hanged, drawn and quartered; 매달아서 사지를 찢고 참수하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 능지처참과 비슷함)을 하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여 매년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전국에서 불꽃놀이를 하거나 가이폭스의 인형 같은 것을 태우며, 오랜 세월동안 왕권에 대한 저항적 반역적 행위를 엄두도 못 내도록 국민들에게 널리 의식을 심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 날에 아이들이 너덜너덜한 넝마 옷을 입은 가이 폭스 인형(effigy)을 들고 다니면서 동전을 달라고(a penny for the guy)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칩니다. 이 가이 폭스의 ‘guy’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금 사용되는 놈 자식으로 쓰이는 guy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he is good guy 그놈은 좋은 놈이야 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영국을 위시한 영 연방 나라에선 11월 5일에 성대한 불꽃놀이 축제를 벌리는 데 이런 영향에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퍼지면서 무슨 축제할 일이 있으면 밤하늘에 불꽃으로 수놓는 불꽃 축제를 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꽃 축제행사는 과거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소위 ‘초막절‘이라고 하는 절기에 이것이 행해졌습니다. 1년의 모든 추수를 끝낸 후, 집 앞에 초막을 지어놓고 거기에서 7일 동안 기거하였습니다. 초막절 첫날 저녁이 되면 이 축제가 시작되는데, 이 때에는 밤마다 큰 등불을 성전 뜰 안에 밝혀 놓습니다. 그런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은지 예루살렘 온 도시가 환해지고 여인들은 불빛 아래에서 뜨개질을 할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 광장 한복판에 여러 개의 봉화대를 만들어 놓고 불을 밝힘으로써 예루살렘 시내 구석구석까지 밝게 비춥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밤새도록 춤을 추며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과거 자기 민족이 애굽에서 수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불기둥으로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이 행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초막절 마지막 날인 7일째가 되면 등불이 서서히 꺼지게 되는데, 그 동안 즐겁게 춤을 추며 노래하는 소리도 멈추면서 예루살렘 도시의 밤은 또 다시 어두워집니다.
어느 해인가 이같은 초막절 불꽃 축제가 서서히 끝나 가는 그 때 갑자기 군중들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이 선언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1주일 내내 밝혀진 세상의 불은 시간이 지나면 꺼지게 되어 결국에는 또 다시 깜깜한 어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빛은 다시 꺼져버리는 세상의 불이나 어둠에 묻혀 버리는 태양 빛과 다릅니다. 한번 켜지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 온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어 도무지 어둠이 깃들지 못하도록 하는 생명의 빛이 왔다고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선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는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과 10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창조 전부터 생명의 빛으로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워진 이 세상을 비추시려고 직접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5절과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세상은 참 밝은 세상이 되지만,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은, 세상 어느 나라 가보아도 아직도 어둠 가운데 죽어버린 세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밤거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밝다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의 밤 거리는 매우 어둡습니다. 그래서 저녁 6시가 되면 거의 상점들은 문을 닫습니다. 거리는 어둡고 조용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 거리를 질주 하는 자동차의 헫드라이트 빛 만이 길게 밤거리에 줄을 긋듯 합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무서워 합니다. 모든 죄악은 어둠 속에서 벌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밤거리가 대 낮같이 환하게 한 것은 그만큼 범죄가 많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밤거리를 대 낮같이 밝게 한다고 하여도 영혼의 어두움은 오히려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서울 신사동 압구정동 홍익대 앞 등 등 어두운 영혼들이 타락과 방종으로 날 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진정 이 시대에 영혼을 환하게 밝혀 주는 생명의 빛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한 옛날에는 지식이 부족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서 어둡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앉아서 수 만리를 보고 있는 시대이지만, 그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어떤 정보가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코앞의 일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래서 다시 어두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진정 이 시대에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 인지 무엇 선이고 악인지를 밝혀주는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이 발달하고 옛날보다 경제적 수준이 높아져 단군이래 가장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만 2008년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이 2422명이나 됩니다. 옛날에는 걸어서 다니거나 소달구지를 타고 가거나 바쁘면 말을 타고 가기도 하여 무슨 교통사고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이카시대라 얼마나 신나게 달리며 좋은 세상이라 하지만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2008년에 5155명 이였다고 합니다. 북한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말 거의 듣지 못합니다. 1000원만 있어도 한끼 충분히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살기 싫다고 죽는 사람이 작년에 15413명이나 됩니다. 우리나라 의사가 10만 명이요 약사가 6만 명이요 양의원 양 약사 한의원 한약사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런데 작년 암으로 죽은 사람이 68902명이요 다른 질병을 합치면 십 수 만 명에 이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였다고 해서 사람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안심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죽엄의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마치 그물로 잡듯 잡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어디가 안전지대이며 어디가 평화의 터입니까? 죽음이 내 코앞에 다가와 있어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영적 귀가 막혀서 드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왔으되 어둠에 빠져 있는 사람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이 밝아 왔는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 1:5에 "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진정 생명의 빛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이 되신다고 요한 사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어둠도 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오시므로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빛을 비추시므로 그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가 오시지 않아도 이미 빛으로 창조된 세계인데, 어째서 다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마귀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둠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세상은 하나님의 빛이 없는 캄캄한 밤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세상'이란 단어가 78회 나오는데, 대체로 모두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며, 따라서 어둠으로 덮여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 세상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온갖 범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래 빛으로 창조된 세상이기 때문에 빛을 받지 않으면 그 세상이 병들고 시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들도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겨울이 긴 북극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많이 걸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가 짧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자주 햇볕에 벌거벗고 누워 햇볕을 쪼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특히 북유럽의 경우 흐린 날이 많고 해가 짧기 때문에 해가 비추는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 앞에 나와 썬팅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건강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가 주님의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면 병들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오래 갈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으로 살게 되며, 감사와 기쁨 대신 짜증과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며, 화해와 관용과 용서 대신에 분쟁과 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으며, 정의와 평화는 사라지고 불의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며,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일상화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의 열매인 선과 의와 진실은 없고 악과 불의와 거짓만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감사함과 기쁨과 사랑 대신 짜증과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 이! 내 영이 하나님의 빛이 필요하다고 하는구나 ' 그래서 서구 사람들이 옷을 벗고 햇볕을 쪼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위선과 체면의 꺼풀들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므로 주님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어둠의 요소들을 몰아내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둠의 세력이 계속 우리를 위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만나고 시련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해가 있어도 밤이 오는 것과 같고, 혹은 해가 떠도 짙은 구름이 끼어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은 잠시이며, 그 환난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내하며 그 어둠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며, 환난을 믿음으로 뚫고 나가면, 거기에 새로운 길이 나타나며, 오히려 환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용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에게는 어둠의 위협이나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긍정적인 요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빛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밤도 안전한 합니다. 밤에 우리의 육신은 잠이 들지만 우리의 영혼은 더욱 빛을 발하며 우리의 육신을 지켜줍니다. 우리의 영은 잠들지 않습니다.
겨울은 동 식물들이 쉬는 동면 시간입니다. 농부들에게 겨울은 휴식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으로 우리의 심령을 따뜻하게 지켜주고 새 힘을 더하여 줌으로 세상가운데 언제나 승리자로 살게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전인 1700년대 유럽 역사를 보면, 프랑스와 영국은 극히 대조적인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혁명이 계속되고 또 그 혁명에 대한 반대혁명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하루도 사회가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프랑스에는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영국은 달랐습니다. 부패하기는 프랑스나 영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 이상으로 영국에도 부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랐습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영국을 프랑스와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영국을 다르게 만든 것은 바로 존 웨슬리나 조지 휘필드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영국에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 빛이 비추이자, 영국이 변화된 것입니다. 부패한 영국이 영적으로 부흥되었습니다. 혼돈의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빛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복음의 빛에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곳마다 변화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한국 최초 맹인 박사가 된 강영우 박사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원래 그 분은 어렸을 때에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이 떨어져 나가 앞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입원하며 눈을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현대의학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실명 선고를 받았을 때, 어린 강영우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맹인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나 되고 인간 구실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데 격으로 가정은 매우 가난하여 고픈 배를 움켜지며 캄캄하고 지루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며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후, 문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 주님은 이것 뿐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로 정규 유학생이 되어 미국에 도착 한 후,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 대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조지 부시 대통령(George W. Bush)의 종교 및 사회봉사 분야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 실명과 언어의 이중 장애에도 불구하고 미국 12만 명 중 1명 꼴로 오르는 미국명사 인명사전(Who's who in America)은 물론 세계명사사전(Who's who in the world)에도 약력이 수록된 저명인사가 되었습니다. 1983년에 출간한 “빛은 내 가슴에“라는 그분의 책은 일본어, 스페인어 등의 여섯 개 나라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지도자 중 한 분이시며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널리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강영우박사의 “빛은 내 가슴에“라는 책을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박사, 당신의 생애를 알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산증인입니다.“ 이렇게 생며의 빛 되신 주님께서는 장님이 된 어린 강영우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빛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 곁에 항상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그들은 항상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진위에 멈추면 그들은 그들의 행군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나든지, 몇 달이 지나든지 그냥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움직이면 그들도 전진했습니다.
성경에는 이 장면을 (출13:21,22)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40년 광야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인생 여행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항상 생명의 빛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길을 비추어 주시는 진정한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느 대학에 들어가야 할지, 어느 회사에 들어가야 할지, 누구하고 결혼해야 할지, 무슨 사업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나는 잘 모르지만, 주님은 다 아십니다.
성도여러분, 생명의 빛 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길을 한 걸음씩 늘 인도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2010년 성탄절에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사람들이 폭탄 테러에서 구원받은 날인 가이폭스날에 불꽃축제를 벌리듯이 우리는 우리를 죄악의 어둠 사탄의 테러에서 생명 빛을 비추어 주신 예수님의 탄생의 날, 이 날에 큰 축제의 날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므로 빛으로 어두웠던 세상을 이제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며, 혼돈은 더 이상 무질서가 아니며,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비쳐진 그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 어둠과 혼돈과 죽음은 모두가 생명의 빛 속으로 흡수되어 그 속에 지녔던 독소들은 빠져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깃들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탄 목에 장식하고 불을 밝히는 것은 다만 성탄목 장식에 의미가 있음이 아니요 바로 나 자신이 성탄목이 되어 주님의 빛으로 장식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믿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에 여러분의 삶이 반짝 반짝 빛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빛 가운데 거하면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열매인 선함과 정의와 진실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다 하더라도 빛 되신 주께서 여러분의 인생 길을 한 걸음씩 늘 인도 하심으로 이 생명의 빛 속에 사는 여러분에게 승리가 있고 행복이 있고 성공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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