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31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전병호
201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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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1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요12:24-25 가을에 심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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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추수하는 계절입니다. 지난 봄 여름에 뿌리 씨앗들이 탐스럽게 자라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계절입니다. 농촌의 농민들은 논 밭의 곡식과 채소들을 거두기 위해 지금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 오면 늘상 생각나는 노래가 차중락씨가 불렀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입니다. 본래 원곡은 Elvis Presley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을 번안한 곡 ( I memorize the note you sent, Go all the places that we went....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 외우고 있어요. 우리가 들렀던 곳 다 가봅니다... 당신의 흔적이 담겨 있는 것이라면...")입니다. 곡의 노래 말이 다르지만 차중락씨와 엘비스 프레스리의 삶과 죽음과 함께 늦가을의 진한 감성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푸른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가을을 생각하면 왠지 숙연함과 허전함이 찾아듭니다. 여름내 풍성하고 화려한 자태는 사라지고 이제는 누렇게 색이 바래 떨어져 뒹굴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낙엽들을 바라보면 잔잔한 슬픔이 가슴에 파고듭니다. 저 풍성하게 일렁이던 황금벌판도 이제 스산한 가을 바람 앞에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가을 들녘을 바라보며 인생의 외로움과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 용해원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단 하나의 낙엽이 떨어질 때부터
가을은 시작하는 것 우리들 가슴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거리로 나서고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낙엽과 함께 날리며 갑니다.
그러면 가을이 이처럼 낙엽과 함께 가버리는 인생의 슬픔을 다만 우리는 노래 할 것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결코 인생이 슬프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낙엽과 함께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가을에 희망을 노래합니다. 낙엽을 바라보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며 우리는 내년에 다시 풍성해질 꿈을 꾸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지나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그 영원한 세상을 향해 오늘의 험한 인생 길을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희망을 잃지 않으며 기쁨으로 전진하며 그 모든 환난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을에 다만 열매를 거두는 것만 아니라 다시 씨를 뿌리게 됩니다.
가을에 뿌리는 씨들이 있습니다. 카네이션, 안개꽃, 금잔화, 양귀비, 물망초 등은 가을에 씨를 뿌립니다. 더욱 새 봄에 샛 노랑꽃을 피워 온 들판을 노랗게 물 드리는 유채 꽃 역시 가을에 씨앗을 뿌립니다.
오늘 우리는 나운복음교회 사랑 밭에 새 씨를 뿌리려고 노란손수건주일을 정하여 여러분들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나운복음교회 사랑밭 고랑 고랑에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이 뿌려져 아름다운 꽃향기가 천지에 가득하기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에 야곱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에게 쫒겨 고향 땅을 떠나 정처 없이 가다가 어는 들판에서 돌을 배게 삼아 잠을 잤습니다. 한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착하고 의롭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사람들에게만 가까이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버림받아 야반 도주하는 불행한 사람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죄인이라 할 지라도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붙잡아주시고 그를 그 죄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겨 주십니다. 실상 세상에 나는 의인이라고 자랑할 만한 사람이 몇 사람 있겠습니까?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이유 없는 사람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시었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행복과 성공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행복과 성공을 오해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행복이라고 착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욕망이란 전차를 타고 달려나가는 인생 결국 그 끝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법칙은 간단합니다. 뿌리대로 거둔다 입니다. 씨앗을 뿌리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씨앗을 뿌리면서 농부들은 행복해 합니다. 열매를 거두며 농부들은 성공의 기쁨을 가집니다. 진정 성공은 희망의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희망의 씨가 아니면 성공이 없습니다. 절망에 슬퍼 눈물 흘릴 뿐입니다,
서편제소설을 쓴 이청준(李淸俊, 1939년 8월 9일 ~ 2008년 7월 31일)씨가 들려주는 꽃씨 할머니 얘기가 있습니다.9월간에세이 1995년 3월호) 옛날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한 과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녀도 낳지 못하고 일찍 남편을 떠나 보냈습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끼며 항상 하나님께 빕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왜 자녀 생산의 능력을 주지 않으시고 제 남편은 일찍 죽고, 왜 저는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처지인가요. 하나님! 저도 정말 보람된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그 할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너는 생산의 능력은 없지만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들 능력을 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할머니에게 꽃씨 주머니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가는 곳마다 꽃씨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아름다운 들꽃들이 피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이란 꽃씨, 희망이란 꽃씨, 사랑이란 꽃씨, 평화란 꽃씨 주머니를 주시면서 온 세상에 다니며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꽃씨들을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꽃을 피워 아름다운 하나님의 에덴동산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희망을 전하고, 희망을 심고, 희망을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깝고 서글픈 일은 희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악은 다른 사람의 희망을 꺾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삶의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합니다. 그러므로 희망 상실 그것은 간접살인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전하는 것!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최고의 일입니다.
여러분! 복된 삶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의 억눌린 환경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희망의 따뜻한 빛을 전하는 삶! 그런 삶이 최고로 복된 삶일 것입니다.
그처럼 꿈과 희망으로 내 마음을 넓히고 내 이웃의 마음도 넓혀서 서로가 찾아갈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허락하고, 그것을 채워가면서 사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있는 장점을 격려하고, 상대방이 아름답게 살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요새 서비스 정신이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그 중에서 최고의 서비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해 격려하고 발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 서비스는 돈도 들지 않지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최고의 서비스입니다.
여러분! 꽃씨 할머니 이야기처럼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나가는 희망농사꾼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희망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우리는 환경 너머에 계신, 사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내일을 향한 꿈을 꾸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꿈과 희망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를 확실히 달라지게 만들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마 6:21) 저는 여기에서 보물을 재물보다는 <꿈과 희망>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네 꿈이 있는 곳, 네 희망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입니다. 꿈과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여라분들은 항상 희망을 가지고, 주변에 희망의 씨를 뿌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삶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첫번째로, 약한 자를 이해하고 돕는 삶이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어떤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하니까 "전교에서 1등 하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꿈이 아닙니다. "전교에서 1등!"은 전교에서 한 명밖에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꿈은 될 수 있어도 우리를 위한 꿈, 하나님의 꿈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은 1등의 성적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의 행복에 있습니다.
1등을 하는 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때 그 꿈은 나를 위한 꿈도 아닙니다. 그 꿈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신에게 실패와 나락과 좌절과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과 희망은 약한 자를 생각하고, 전체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생각하는 그런 꿈과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가을에 약한사람들을 돕는 희망의 씨를 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서로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사는 삶이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어지럽습니다. 곳곳에서 갈등과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평화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요? 상대방의 위치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때 평화가 생깁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는 무력의 힘이나 희생의 강요에 의한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상대방의 입장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생기는 평화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상대방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갈등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어느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강도가 주인에게 소리칩니다. "손들어!" 주인이 손을 드는데 한 손만 드니까 강도가 "오른손도 들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인이 말합니다. "오른손에 신경통이 있어서 들 수가 없습니다." 강도가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나도 손에 신경통이 있는데 몇 년 되었소!" "예, 한 십 년쯤 되었습니다." "아주 고생했겠는데. 나도 십 년 정도 되었는데. 많이 고생했죠!" "정말 많이 고생했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약이 잘 듣나요?" "신경통에는 특효약이 없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변했습니다. 오 헨리가 지은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이 얘기는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면 어떤 경우에도 대화가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이해해 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 모양이 어떻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모양만 진리라고 생각하면 분쟁이 그치질 않습니다.
얼마 전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이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 스티븐 코비는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윈윈 전략을 쓴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패배감을 안겨 주는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경쟁자일지라도 상대방을 파트너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도 이기고 상대방도 이기는 평화가 가장 바람직한 평화입니다.
여러분! 바둑을 잘 두는 사람과 못 두는 사람의 차이를 아십니까? 바둑을 못 두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 대마를 잡을 생각만 하다가 자기 대마가 잡힙니다. 그러나 고수는 한 집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그대로 타협을 합니다. 무모하게 싸우지 않습니다. 한 집만 이겨도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한 수 높은 고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식은 조금 부족해도 괜찮고, 이해력이 조금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기독교인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성공인생을 위한 희망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희망의 씨를 뿌리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분명히 하는 삶이 바로 희망을 뿌리는 삶입니다.
희망의 씨를 뿌리려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희망의 빛을 추구하는 전기 코드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의 빛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핸드폰 충전기에 핸드폰을 꽂고 한 시간 후에 보니 전혀 충전이 되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핸드폰이 고장이 났는지 아니면 충전기가 고장이 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비스센터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집에서는 충전이 안되어 고장났는지 알고 서비스센터에 가지고 왔는데 이상이 없다니 좀 자세히 살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사가 하는 말이 혹시 전기 코드를 연결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그때야 아차 싶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저기코드가 빠져 있었습니다. 참 바보같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저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언뜻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과연 나와 하나님과 코드가 제대로 맞춰저 있는 것인가? 왜 이렇게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고 답답한가 생각해 보니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 코드가 제대로 맞춰저 있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인생의 해답으로 알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에 관해서(know about God) 알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야(know God) 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을 만나서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 샌디에고에서 어떤 분이 물에 빠져 자살을 했습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그분의 자동차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Jesus is the Answer(예수님이 해답이시다)라는 팻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이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신사가 어느 추운 날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걷다가 따끈따끈한 커피한잔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한 소년이 "따끈따끈한 커피가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야 이 커피가 따끈따끈한 커피냐?" "그렇습니다" "한잔 다고" 그 신사는 그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크게 화를 내면서 소년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이게 어디 따끈따끈한 커피냐 이렇게 커피가 식어있는데 너 사기꾼이구나" 그 소년이 신사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 아저씨 이 커피 이름이 따끈따끈한 커피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름과 내용이 다른 것이 많이 있습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습니다. 이태리 타올은 이태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이름만 알고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여 살아야 기독교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닷물이 여기 한 컵이 있다면 이 컵의 물은 바닷물입니다. 바닷물을 담았기 때문에 한 컵의 물도 바닷물입니다.
엘리자베스 노벨이란 사람이 쓴 '조금'이라는 동시가 있습니다.
"설탕을 조금 써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누를 조금 써도 몸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햇볕이 조금 비춰도 새싹이 힘차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연필이 조금 남아도 아름다운 글 한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양초가 조금 남아도 주위에 환한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맛과 그 힘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만 잘 쓰여지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조금의 희망이 우리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이 작은 믿음이 산을 움직이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세요. 하나님을 접촉(toch)하세요. 하나님의 새끼손가락이라도 잡아보세요 그러면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직은 그 믿음 작다고 하더라도, 그 작은 믿음이 겨자씨만 해도 씨앗으로 심어지면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작은 믿음이란 희망의 씨앗이 심어지면 엄청난 희망의 나무로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운복음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처음교회에 오신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믿음과 희망의 씨앗을 뿌려 보십시오. 힘이 없다고, 무엇이 안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 여러분의 그 희망의 씨가 큰 나무로 자라 수많은 새들이 날아와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낙엽 따라 가버렸다고 슬퍼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생이 슬프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가능성이요 기쁨이요 찬란한 희망입니다.
이 가을에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란 사랑 밭에 믿음이란 희망의 씨앗을 심어 행복의 열매를 거우시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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