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4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전병호
201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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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4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고전 15:9-10 회 복
성탄절 절기에 잘 부르는 케롤송으로 “루돌프 사슴 코”라는 동화를 노래한 케롤 송이 있습니다. 이 동화를 쓴 <메이> 라는 젊은이는 괴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동화작가가 되려고 오랜 노력을 했지만 3류 잡지에서 원고를 사주었을 뿐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1938년 미국에 경제 공항까지 겹쳐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습니다. 5년을 앓고 누워있는 아내는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까지 돌보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아무런 희망이라곤 없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고 다시 글을 썼습니다. 그 해 성탄을 앞두고 쓴 동화가 “루돌프 사슴 코” 였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잡지사에 제출하기 전에 병상의 아내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루돌프라는 사슴이 살았는데 못생기고 코까지 빨갛게 부풀어 올라 꼴불견이어서 친구들의 조롱을 받고 늘 외톨이로 소외되었습니다. 루돌프는 날마다 괴로움 속에 살았고 못난 자기를 한탄했습니다. 어느 날 산타클로스가 사슴의 마을에 찾아 왔습니다. 썰매를 끌 사슴을 선발하기 위해 왔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많은 사슴들 중에서 뜻밖에도 루돌푸를 뽑았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사슴의 강한 다리나 잘생긴 얼굴보다 콧잔등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슴을 찾아 다녔는데 루돌프의 코가 빨갛긴 해도 빛나는 코였습니다. 못생긴 그것이 도리어 장점이 되었고 한탄 하던 그것이 변해 축복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읽어 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썼구려”하며 기뻐했습니다. 이 동화는 일류잡지 몽고매리 워드사에서 사 주었습니다.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힘든 인생을 살아왔나요. 하는 일 마다 제대로 된 일이 없어 못난 자신에 대하여 원망하고 실망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부족함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강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하나 붙잡을 것이 없다고 하여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로서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큰소리치면서 절대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던 그가 어린 소녀 앞에서도 조차 주님을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지만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 없어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자신도 그를 용서할 수 없었고, 형제들 앞에서도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그는 다시 그물을 들었습니다. 다른 제자 6명과 함께 배를 타고 그 밤에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 밤에 밤새 그물을 내려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한 3년 그물질을 안 했다고 하여 이렇게 고기를 못 잡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이 터오니 안개가 낀 호수에 추위가 엄습해 왔습니다. 점점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주님을 떠나니 되는 일이 없는가? 주님을 따르기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도 밤새도록 그물질하였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떠나 사명을 버리고 가는 그 길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행복하고 비로소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유럽에 동시대에 나타난 두 명의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폴레옹입니다. 참모가 말했습니다. “전쟁에 출정하시면서 목사님을 모셔다가 꼭 기도하고 가십시오.” 그러자 그는 “그런 것은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야.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어. 전쟁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계획과 지휘를 자기가 했습니다. 그는 전쟁도 지고 나라는 다 파멸되며, 자기를 따라가던 수많은 참모들을 다 죽이고 결국 자기도 귀양을 갔습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유럽의 장군이 있습니다. 영국 해군제독 넬슨 입니다. 넬슨장군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넬슨은 시편127편 1절 말씀을 늘 암송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전쟁에 나갈 때에는 갑판 위에서 군목과 함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넬슨은 나라를 살렸습니다. 자기도 영광을 얻었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부하도 다 살릴 수 있었습니다.
성경 예레미야 17:5,6절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고 하셨습니다.
탈북 시인 장진성씨가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란 시를 발표한바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을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원으로/ 밀가루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일본에서 뉴스 특보로 12분간 시인과 시집을 소개했습니다. 시인이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호텔로 가는 도중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배고파 죽어가던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에 서서 딸을 100원에 팔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북한 현실을 들을 때 마다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는 그 땅 사람들은 사막 같은 땅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회복이 없습니다. 회복이 없는 땅은 사막 같은 땅이요 저주의 땅입니다.
방송국에서 양로원에 대하여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상당히 병이 깊은 분들이 모여 사는 집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도 6개월, 1년, 2년 정도 밖에 살수 없는,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분들이 화투를 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몇 백원 딴 할머니는 기뻐하고 일은 할머니는 기분 나뻐 화를 내곤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 한쪽에 아련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슬픔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면 죽음이 찾아오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손에 돈 몇 푼 있다고 기뻐하고 잃었다고 슬퍼하는 인생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지요.
몇 년전 미국의 클리브랜드 클리닉에서 22시간에 걸쳐, 미국 최초로 한 여성의 얼굴 이식 수술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성형외과 의사인 마리아 시에미오노는, 몇 주전 사망하며 기증한 여성의 얼굴을, 이 여성의 얼굴에 80% 정도 대체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얼굴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바꾸어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앞으로는 공항으로 입국할 때 사진 찍어봐야 필요 없는 시대가 곧 옵니다. 여권 사진도 소용이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하도 많이 성형수술을 하여 일일이 천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주민등록증을 대조하기보다는 MRI를 찍어 확인한다고 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젊고, 예쁜 얼굴로 바꾼다고 해서, 그곳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 그리고 이 세상의 성공적인 일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 순간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회복이 없이는 참된 기쁨과 만족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한 마음과 곤한 몸을 가지고 헛된 그물질을 하고 있던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누가복음5장에서 빈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 을 내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같은 갈릴리 바다에서 빈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똑똑히 보았고 알고 있었으나 베드로는 세상 고기 잡으러 물로 갔습니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 먼 길을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누가복음22:32절에서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베드로가 배신하기 전에 이미 타락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가 다시 회복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과 멀어진 마음이 없었습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멀리하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이미 용서하시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이미 새로운 심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처음 우리를 붙잡은 그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시고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성경에 주님은 우리를 소중하고 존귀한 자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추위와 허기에 지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서 먹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뎀 나무아래 쓰러져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먹여주시며 어루만져 주셨던 것처럼, 주님은 새벽에 베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며 먹여 주셨습니다.
이 아침 시간에도 주님은 말씀의 떡으로 여러분을 먹이시고 성령의 불로 여러분을 뜨겁게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시고 환경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은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한 마디 서운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사명을 맡겨 주시었습니다. 베드로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베드로는 인생의 새로운 새벽을, 즉 주님을 만난 그 날 새벽에 회복의 체험을 통해 새 인생의 아침을 맞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잘못된 인생의 길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1993년 11월 4일 81세의 나이에 성철 스님이라는 분이 불교에서 말하는 입적,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결혼을 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10년 동안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16년 동안 솔잎 가루와 쌀가루만 먹고살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을 자는 ‘장좌불와’를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렸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 분은 수십 년 동안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았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의 고행이 죄인을 의인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 분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아무리 고행을 해도 죄인은 죄인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하얀 사람이나 검은 사람이나 빈부귀천, 남여노소, 피부색깔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오면 그의 죄가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탐하여 결국 간음죄를 지었고 살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으셔서 다시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이라도, 하나님을 실망시킨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지워버리지 않으시며 기억하고 잊지 못해 하십니다. 다시 그를 찾아가서 부르십니다. 우리가 실수했을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힘을 내십시오. 다시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장관들에 대한 임명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그들의 자난 도덕적 윤리적 법적인 각가지 비리와 불법에 대해 파헤쳐지고 당사자는 변명하며 은폐하기에 급급한 장면들을 보고 들으며 국민들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세상에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신앙 선조들이 모두 도덕군자요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 이였습니까? 유다는 어떤 사람 이였습니까 다윗은 어떤 사람 이였습니까? 그들은 참으로 파렴치한 죄인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의 회개와 죄사함을 받은 후 그들은 전혀 새론 사람들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제 내가 어떤 사람 이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떤 사람으로 회복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믿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씼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시고 또 새로운 사명까지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I am what I am by grace of God.)(고전15:10)."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낙심과 절망과 실패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이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1940년대 초,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라는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는 내려오는 길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53년 5월29일, 그는 네팔출신 셀파와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처음 시도에서 실패한 엔드먼드 힐러리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여 결국에는 세계 최고봉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도덕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낙심하고 절망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있습니까? 사업에, 직장생활이 어렵다고 고민하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실패하셨습니까?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했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지난 한 주 동안 신앙생활에 실패하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회복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실패를 회복의 디딤돌로 삼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패와 절망을 주님 앞으로 가져 올 때 우리 주님께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330 2절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 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바울선생님이 언제나 선교활동에 성공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덴에서 선교활동에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았습니다. 고린도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 이하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4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행18:1,4-5)
우리는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바울의 사역 스타일이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는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논쟁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아덴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는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주장하다가 교회 내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느 교회는 예배 후 된장국을 끓일 것인가 콩나물국을 끓일 것인가로 언쟁하다가 둘로 쪼개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된장국이면 어떻고 콩나물국이면 어떻습니까? 피아노를 이쪽에 놓을 것인가 저쪽에 놓을 것인가로 싸우다가 이쪽에 놓자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창문에 커튼을 하자는 교인들과 브라인드를 하자는 교인들간에 언쟁을 하다가 역시 교회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마음상하고 언쟁하고 불평하는 일은 없는지요.
교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핵심인 복음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이나 양보를 해서는 안 되지만, 핵심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교회 안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작사가인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키가 150센티미터로 서양사람 치고 작은 키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작았습니다. 그의 피부는 창백한 잿빛 색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벌레 같은 존재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살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로 찬송가 143장 가사를 그가 쓴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찬송가에 아이삭 왓츠의 찬송이 12곡이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그냥 한시간 습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 나의 죄 사함 받고 믿음과 사랑이 회복되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I am what I am by grace of God.)(고전15: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열정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자, 낙심이 된 상태에서 자신의 낡은 자동차를 몰고 빗속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참 달리던 자동차의 엔진이 멈춰버렸습니다. 그가 당황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느 자동차가 멈춘 후, 한 신사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차가 갑자기 멈춰버려 빗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고 사정을 설명하자, 그 신사는 차의 뚜껑을 열고는 무엇인가를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차의 시동이 다시 걸렸습니다. 운전자는 너무 놀라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 차의 엔진이 완전히 망가진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신사는 “어느 차든지 아주 작은 스파크만 있으면 적어도 한번 정도는 다시 시동을 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는 원리죠. 우리 삶에 작은 불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다시 시작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이 운전자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새롭게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목사가 되어, 교도소 사역을 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엔진에 불이 점화가 되면 시동이 걸리고 자동차가 힘차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불을 붙여 주기만 해도, 우리는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불이 붙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싹 마른 심령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단비가 임하면 열심을 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예전에는 펌프라는 것이 동네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펌프에 와서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물을 받아갔습니다. 그런데 펌프질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입니다. 이것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이 마중물을 펌프에 집어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얼마 있지 않아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어저께 남 선교회원들과 여 선교회원들 28명이 청남대와 부여를 관광하고 돌아 왔습니다. 부여 박물관에서 막 버스가 떠나려고 할 때에 한 장사꾼이 버스에 올라와 조그만 컵에 쌀과 잡곡을 튀긴 간식거리를 담아 나누어주었습니다. 받아먹으니 고소하고 먹을 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맛을 본 여러분들이 세 봉지에 만원씩 하는 그것을 샀습니다. 작은 컵에 담은 그 쌀 튀김은 바로 마중물 이였습니다. 그것을 받아 맛 본 사람들이 그것의 수십 배를 사게 되었습니다.
아무 열심을 내지 않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조금만 더 열심을 내 주십시오. 새벽예배에 일 주일 하루라도 아니 한 달에 한번이라도 나와 기도하는 이 작은 열심을 내 주십시오. 수요일 밤 예배 한 달에 한번이라도 나와 예배를 드려주십시오. 전혀 관계없고 관심 없다고 하지말고 작은 열심을 내 주십시오. 전도하는 일에도 한번 더 찾아가 권면 해 보십시오 이 작은 열심히 마중물이 되어 성령님께서 엄청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전혀 새로운 능력의 인생으로 회복될 것이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과 42절에서 제자들의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더 이상 겁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라고 하며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슴에 불을 품고 살았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이 불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태신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바울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과 환란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떠한 것들보다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은 열정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놀라운 열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I am what I am by grace of God.)(고전15: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 절기에 잘 부르는 케롤송으로 “루돌프 사슴 코”라는 동화를 노래한 케롤 송이 있습니다. 이 동화를 쓴 <메이> 라는 젊은이는 괴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동화작가가 되려고 오랜 노력을 했지만 3류 잡지에서 원고를 사주었을 뿐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1938년 미국에 경제 공항까지 겹쳐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습니다. 5년을 앓고 누워있는 아내는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까지 돌보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아무런 희망이라곤 없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고 다시 글을 썼습니다. 그 해 성탄을 앞두고 쓴 동화가 “루돌프 사슴 코” 였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잡지사에 제출하기 전에 병상의 아내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루돌프라는 사슴이 살았는데 못생기고 코까지 빨갛게 부풀어 올라 꼴불견이어서 친구들의 조롱을 받고 늘 외톨이로 소외되었습니다. 루돌프는 날마다 괴로움 속에 살았고 못난 자기를 한탄했습니다. 어느 날 산타클로스가 사슴의 마을에 찾아 왔습니다. 썰매를 끌 사슴을 선발하기 위해 왔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많은 사슴들 중에서 뜻밖에도 루돌푸를 뽑았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사슴의 강한 다리나 잘생긴 얼굴보다 콧잔등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슴을 찾아 다녔는데 루돌프의 코가 빨갛긴 해도 빛나는 코였습니다. 못생긴 그것이 도리어 장점이 되었고 한탄 하던 그것이 변해 축복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읽어 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썼구려”하며 기뻐했습니다. 이 동화는 일류잡지 몽고매리 워드사에서 사 주었습니다.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힘든 인생을 살아왔나요. 하는 일 마다 제대로 된 일이 없어 못난 자신에 대하여 원망하고 실망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부족함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강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하나 붙잡을 것이 없다고 하여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로서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큰소리치면서 절대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던 그가 어린 소녀 앞에서도 조차 주님을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지만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 없어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자신도 그를 용서할 수 없었고, 형제들 앞에서도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그는 다시 그물을 들었습니다. 다른 제자 6명과 함께 배를 타고 그 밤에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 밤에 밤새 그물을 내려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한 3년 그물질을 안 했다고 하여 이렇게 고기를 못 잡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이 터오니 안개가 낀 호수에 추위가 엄습해 왔습니다. 점점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주님을 떠나니 되는 일이 없는가? 주님을 따르기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도 밤새도록 그물질하였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떠나 사명을 버리고 가는 그 길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행복하고 비로소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유럽에 동시대에 나타난 두 명의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폴레옹입니다. 참모가 말했습니다. “전쟁에 출정하시면서 목사님을 모셔다가 꼭 기도하고 가십시오.” 그러자 그는 “그런 것은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야.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어. 전쟁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계획과 지휘를 자기가 했습니다. 그는 전쟁도 지고 나라는 다 파멸되며, 자기를 따라가던 수많은 참모들을 다 죽이고 결국 자기도 귀양을 갔습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유럽의 장군이 있습니다. 영국 해군제독 넬슨 입니다. 넬슨장군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넬슨은 시편127편 1절 말씀을 늘 암송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전쟁에 나갈 때에는 갑판 위에서 군목과 함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넬슨은 나라를 살렸습니다. 자기도 영광을 얻었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부하도 다 살릴 수 있었습니다.
성경 예레미야 17:5,6절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고 하셨습니다.
탈북 시인 장진성씨가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란 시를 발표한바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을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원으로/ 밀가루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일본에서 뉴스 특보로 12분간 시인과 시집을 소개했습니다. 시인이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호텔로 가는 도중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배고파 죽어가던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에 서서 딸을 100원에 팔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북한 현실을 들을 때 마다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는 그 땅 사람들은 사막 같은 땅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회복이 없습니다. 회복이 없는 땅은 사막 같은 땅이요 저주의 땅입니다.
방송국에서 양로원에 대하여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상당히 병이 깊은 분들이 모여 사는 집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도 6개월, 1년, 2년 정도 밖에 살수 없는,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분들이 화투를 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몇 백원 딴 할머니는 기뻐하고 일은 할머니는 기분 나뻐 화를 내곤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 한쪽에 아련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슬픔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면 죽음이 찾아오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손에 돈 몇 푼 있다고 기뻐하고 잃었다고 슬퍼하는 인생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지요.
몇 년전 미국의 클리브랜드 클리닉에서 22시간에 걸쳐, 미국 최초로 한 여성의 얼굴 이식 수술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성형외과 의사인 마리아 시에미오노는, 몇 주전 사망하며 기증한 여성의 얼굴을, 이 여성의 얼굴에 80% 정도 대체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얼굴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바꾸어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앞으로는 공항으로 입국할 때 사진 찍어봐야 필요 없는 시대가 곧 옵니다. 여권 사진도 소용이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하도 많이 성형수술을 하여 일일이 천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주민등록증을 대조하기보다는 MRI를 찍어 확인한다고 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젊고, 예쁜 얼굴로 바꾼다고 해서, 그곳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 그리고 이 세상의 성공적인 일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 순간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회복이 없이는 참된 기쁨과 만족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한 마음과 곤한 몸을 가지고 헛된 그물질을 하고 있던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누가복음5장에서 빈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 을 내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같은 갈릴리 바다에서 빈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똑똑히 보았고 알고 있었으나 베드로는 세상 고기 잡으러 물로 갔습니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 먼 길을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누가복음22:32절에서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베드로가 배신하기 전에 이미 타락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가 다시 회복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과 멀어진 마음이 없었습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멀리하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이미 용서하시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이미 새로운 심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처음 우리를 붙잡은 그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시고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성경에 주님은 우리를 소중하고 존귀한 자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추위와 허기에 지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서 먹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뎀 나무아래 쓰러져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먹여주시며 어루만져 주셨던 것처럼, 주님은 새벽에 베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며 먹여 주셨습니다.
이 아침 시간에도 주님은 말씀의 떡으로 여러분을 먹이시고 성령의 불로 여러분을 뜨겁게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시고 환경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은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한 마디 서운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사명을 맡겨 주시었습니다. 베드로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베드로는 인생의 새로운 새벽을, 즉 주님을 만난 그 날 새벽에 회복의 체험을 통해 새 인생의 아침을 맞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잘못된 인생의 길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1993년 11월 4일 81세의 나이에 성철 스님이라는 분이 불교에서 말하는 입적,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결혼을 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10년 동안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16년 동안 솔잎 가루와 쌀가루만 먹고살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을 자는 ‘장좌불와’를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렸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 분은 수십 년 동안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았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의 고행이 죄인을 의인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 분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아무리 고행을 해도 죄인은 죄인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하얀 사람이나 검은 사람이나 빈부귀천, 남여노소, 피부색깔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오면 그의 죄가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탐하여 결국 간음죄를 지었고 살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으셔서 다시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이라도, 하나님을 실망시킨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지워버리지 않으시며 기억하고 잊지 못해 하십니다. 다시 그를 찾아가서 부르십니다. 우리가 실수했을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힘을 내십시오. 다시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장관들에 대한 임명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그들의 자난 도덕적 윤리적 법적인 각가지 비리와 불법에 대해 파헤쳐지고 당사자는 변명하며 은폐하기에 급급한 장면들을 보고 들으며 국민들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세상에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신앙 선조들이 모두 도덕군자요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 이였습니까? 유다는 어떤 사람 이였습니까 다윗은 어떤 사람 이였습니까? 그들은 참으로 파렴치한 죄인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의 회개와 죄사함을 받은 후 그들은 전혀 새론 사람들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제 내가 어떤 사람 이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떤 사람으로 회복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믿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씼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시고 또 새로운 사명까지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I am what I am by grace of God.)(고전15:10)."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낙심과 절망과 실패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이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1940년대 초,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라는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는 내려오는 길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53년 5월29일, 그는 네팔출신 셀파와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처음 시도에서 실패한 엔드먼드 힐러리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여 결국에는 세계 최고봉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도덕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낙심하고 절망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있습니까? 사업에, 직장생활이 어렵다고 고민하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실패하셨습니까?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했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지난 한 주 동안 신앙생활에 실패하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회복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실패를 회복의 디딤돌로 삼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패와 절망을 주님 앞으로 가져 올 때 우리 주님께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330 2절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 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바울선생님이 언제나 선교활동에 성공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덴에서 선교활동에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았습니다. 고린도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 이하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4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행18:1,4-5)
우리는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바울의 사역 스타일이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는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논쟁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아덴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는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주장하다가 교회 내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느 교회는 예배 후 된장국을 끓일 것인가 콩나물국을 끓일 것인가로 언쟁하다가 둘로 쪼개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된장국이면 어떻고 콩나물국이면 어떻습니까? 피아노를 이쪽에 놓을 것인가 저쪽에 놓을 것인가로 싸우다가 이쪽에 놓자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창문에 커튼을 하자는 교인들과 브라인드를 하자는 교인들간에 언쟁을 하다가 역시 교회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마음상하고 언쟁하고 불평하는 일은 없는지요.
교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핵심인 복음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이나 양보를 해서는 안 되지만, 핵심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교회 안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작사가인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키가 150센티미터로 서양사람 치고 작은 키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작았습니다. 그의 피부는 창백한 잿빛 색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벌레 같은 존재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살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로 찬송가 143장 가사를 그가 쓴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찬송가에 아이삭 왓츠의 찬송이 12곡이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그냥 한시간 습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 나의 죄 사함 받고 믿음과 사랑이 회복되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I am what I am by grace of God.)(고전15: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열정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자, 낙심이 된 상태에서 자신의 낡은 자동차를 몰고 빗속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참 달리던 자동차의 엔진이 멈춰버렸습니다. 그가 당황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느 자동차가 멈춘 후, 한 신사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차가 갑자기 멈춰버려 빗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고 사정을 설명하자, 그 신사는 차의 뚜껑을 열고는 무엇인가를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차의 시동이 다시 걸렸습니다. 운전자는 너무 놀라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 차의 엔진이 완전히 망가진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신사는 “어느 차든지 아주 작은 스파크만 있으면 적어도 한번 정도는 다시 시동을 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는 원리죠. 우리 삶에 작은 불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다시 시작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이 운전자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새롭게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목사가 되어, 교도소 사역을 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엔진에 불이 점화가 되면 시동이 걸리고 자동차가 힘차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불을 붙여 주기만 해도, 우리는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불이 붙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싹 마른 심령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단비가 임하면 열심을 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예전에는 펌프라는 것이 동네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펌프에 와서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물을 받아갔습니다. 그런데 펌프질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입니다. 이것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이 마중물을 펌프에 집어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얼마 있지 않아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어저께 남 선교회원들과 여 선교회원들 28명이 청남대와 부여를 관광하고 돌아 왔습니다. 부여 박물관에서 막 버스가 떠나려고 할 때에 한 장사꾼이 버스에 올라와 조그만 컵에 쌀과 잡곡을 튀긴 간식거리를 담아 나누어주었습니다. 받아먹으니 고소하고 먹을 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맛을 본 여러분들이 세 봉지에 만원씩 하는 그것을 샀습니다. 작은 컵에 담은 그 쌀 튀김은 바로 마중물 이였습니다. 그것을 받아 맛 본 사람들이 그것의 수십 배를 사게 되었습니다.
아무 열심을 내지 않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조금만 더 열심을 내 주십시오. 새벽예배에 일 주일 하루라도 아니 한 달에 한번이라도 나와 기도하는 이 작은 열심을 내 주십시오. 수요일 밤 예배 한 달에 한번이라도 나와 예배를 드려주십시오. 전혀 관계없고 관심 없다고 하지말고 작은 열심을 내 주십시오. 전도하는 일에도 한번 더 찾아가 권면 해 보십시오 이 작은 열심히 마중물이 되어 성령님께서 엄청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전혀 새로운 능력의 인생으로 회복될 것이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과 42절에서 제자들의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더 이상 겁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라고 하며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슴에 불을 품고 살았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이 불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태신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바울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과 환란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떠한 것들보다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은 열정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놀라운 열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I am what I am by grace of God.)(고전15: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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