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제 41과 텃밭 공과
전병호
20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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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1과 우리의 자랑
성 경 갈 6 : 14
찬 송 250 511
사람들은 누구나 남보다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본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란한 자기의 이력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집을 자랑하고 자기의 자동차를 자랑하고 자기의 미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랑은 지나가 버립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랑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삶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랑은 곧 "자존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랑에도 참된 자랑이 있고 헛된 자랑이 있다고 합니다. 참된 자랑은 사람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삶을 향상시키는 유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헛된 자랑은 낙심을 주고 좌절을 주고, 불안에 떨게 하며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해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최고의 학벌을 가졌습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앞날이 창창대로로 뚤어 진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진리를 알고, 그것을 믿은 다음부터는 지난 날 자랑거리로 여기던 그 모든 것이 분토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갈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치욕적인 형벌과 죽음의 표징이었고, 완전한 파멸을 나타내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라고 하였습니다(갈3: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날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이룬 날이었습니다. 또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려 버린(창3:15),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십자가를 바울은 유일한 자랑의 근거로 삼았고, 모든 소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지 못한 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일은 잘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어떤 북한 사람과 그분의 조선족 누님이 사는 댁에서 중국 선교사 한분이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던 중에, 함께 있던 매형 되시는 분이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남조선 사람들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다던데, 선교사님도 서울에 있는 댁에 자동차가 있나요?", "그럼요", "그 자동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건 길에 차가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있지요. 평일 새벽 시간에 길에 차가 많지 않으면 4시간 정도 걸리고, 추석이나 명절에 자동차가 길에 좍 깔리면 12시간도 걸리고 그렇습니다." "4시간에 부산까지 가려면 꽤 빨리 달리시는 모양입니다." "네 저는 차를 좀 빨리 몰아서 교통순경만 안 보이면 140-150Km도 달리지요." 그 다음날 북한에서 온 그 사람이 조카들에게 하는 말이 "야, 저 남조선에서 왔다는 녀석이 순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구나 세상에 무슨 자동차가 한 시간에 백 키로를 넘게 달린다는 말이냐? 그런데 저놈은 150 Km를 달린다고 하니 저런 사기꾼이 어데 있나?" 하더랍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경험과 사고의 한계를 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동차가 150 Km를 달리는 것 본적도 없으니 북한 사람이 믿지 못하는 것 당연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경험 자기의 지식의 한도를 떠나서는 생각도 못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 믿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죄로 가득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는 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랑을 바르게 깨달으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정말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언제나 두 가지 태도로 살아갑니다.
1) 자기가 철저한 죄인이고 무능한 자인 알고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게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2) 동시에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놀랍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열등감을 가지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것을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형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노랑손수건 전도 운동은 바로 십자가 자랑운동입니다. 이 좋은 십자가를 어찌 나만 바라볼 것입니까? 어찌 나만 믿고 감격할 것입니까?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십자가가 자신을 죄에 죽음의 자리에서 지옥의 길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손길을 우리가 내밀어 그들을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노란 손수건 전도는 바로 내 한 손은 십자가 굳건히 붙잡고 또 한 손은 태신자의 손을 붙잡아 주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손을 놓치면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금이 아주 중요한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힘을 더 하여 저들을 붙잡아 올리십시오 그리고 10월 31일 저들을 십자가 앞에 업드리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우리와 저들에게 함께 임하실 것입니다.
질 문 1.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 십자가 의미를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기 도 1.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2. 노란손수건 전도를 위해 기도합시다.
광 고 1. 아직도 태신자를 잉태치 못하였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번 주일 아침예배 모든 성도들은 한사람이
한사람의 태신자 명단을 적어 제출합시다. 이를 강권하여
알리는 것은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 경 갈 6 : 14
찬 송 250 511
사람들은 누구나 남보다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본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란한 자기의 이력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집을 자랑하고 자기의 자동차를 자랑하고 자기의 미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랑은 지나가 버립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랑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삶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랑은 곧 "자존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랑에도 참된 자랑이 있고 헛된 자랑이 있다고 합니다. 참된 자랑은 사람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삶을 향상시키는 유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헛된 자랑은 낙심을 주고 좌절을 주고, 불안에 떨게 하며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해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최고의 학벌을 가졌습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앞날이 창창대로로 뚤어 진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진리를 알고, 그것을 믿은 다음부터는 지난 날 자랑거리로 여기던 그 모든 것이 분토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갈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치욕적인 형벌과 죽음의 표징이었고, 완전한 파멸을 나타내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라고 하였습니다(갈3: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날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이룬 날이었습니다. 또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려 버린(창3:15),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십자가를 바울은 유일한 자랑의 근거로 삼았고, 모든 소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지 못한 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일은 잘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어떤 북한 사람과 그분의 조선족 누님이 사는 댁에서 중국 선교사 한분이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던 중에, 함께 있던 매형 되시는 분이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남조선 사람들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다던데, 선교사님도 서울에 있는 댁에 자동차가 있나요?", "그럼요", "그 자동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건 길에 차가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있지요. 평일 새벽 시간에 길에 차가 많지 않으면 4시간 정도 걸리고, 추석이나 명절에 자동차가 길에 좍 깔리면 12시간도 걸리고 그렇습니다." "4시간에 부산까지 가려면 꽤 빨리 달리시는 모양입니다." "네 저는 차를 좀 빨리 몰아서 교통순경만 안 보이면 140-150Km도 달리지요." 그 다음날 북한에서 온 그 사람이 조카들에게 하는 말이 "야, 저 남조선에서 왔다는 녀석이 순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구나 세상에 무슨 자동차가 한 시간에 백 키로를 넘게 달린다는 말이냐? 그런데 저놈은 150 Km를 달린다고 하니 저런 사기꾼이 어데 있나?" 하더랍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경험과 사고의 한계를 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동차가 150 Km를 달리는 것 본적도 없으니 북한 사람이 믿지 못하는 것 당연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경험 자기의 지식의 한도를 떠나서는 생각도 못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 믿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죄로 가득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는 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랑을 바르게 깨달으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정말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언제나 두 가지 태도로 살아갑니다.
1) 자기가 철저한 죄인이고 무능한 자인 알고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게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2) 동시에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놀랍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열등감을 가지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것을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형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노랑손수건 전도 운동은 바로 십자가 자랑운동입니다. 이 좋은 십자가를 어찌 나만 바라볼 것입니까? 어찌 나만 믿고 감격할 것입니까?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십자가가 자신을 죄에 죽음의 자리에서 지옥의 길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손길을 우리가 내밀어 그들을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노란 손수건 전도는 바로 내 한 손은 십자가 굳건히 붙잡고 또 한 손은 태신자의 손을 붙잡아 주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손을 놓치면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금이 아주 중요한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힘을 더 하여 저들을 붙잡아 올리십시오 그리고 10월 31일 저들을 십자가 앞에 업드리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우리와 저들에게 함께 임하실 것입니다.
질 문 1.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 십자가 의미를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기 도 1.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2. 노란손수건 전도를 위해 기도합시다.
광 고 1. 아직도 태신자를 잉태치 못하였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번 주일 아침예배 모든 성도들은 한사람이
한사람의 태신자 명단을 적어 제출합시다. 이를 강권하여
알리는 것은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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