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0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전병호
20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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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0일 주일아침 예배설교 우리의 자랑 갈 6 : 14
흔히 밀하기를 이 시대를 개성시대라고 말들 합니다. 자신을 알리고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들을 합니다. 티브이 광고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자기의 상품을 알리기 위해 별의 별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상품은 평소에 손해만 잔뜩 보고 있었는데 광고가 대박이나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합니다. 가수들도 재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3류 가수 취급을 받았는데 어느 날 어느 연예프로그램에 나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됨으로 일약 스타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자기 자랑을 제대로 하느냐가 실패와 성공을 가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보다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본성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이 자식자랑을 침이 마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로 뛰어난 것 같지 않는데 부모가 보기에는 자랑스럽고 대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애는 똥이 황금색이라고 하면서 똥 자랑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랑은 무엇이 있습니까? 잠시 생각해봅시다. 아마도 “나는 자랑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랑할 것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자랑거리가 무엇이 있는가? 열심히 자랑하며 살아가십시오 자랑하다 보면 어쩌면 대박치는 인생이 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육체적인 자랑보다도 물질적인 자랑보다도 영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란한 자기의 이력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집을 자랑하고 자기의 자동차를 자랑하고 자기의 미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랑은 지나가 버립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랑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삶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랑은 곧 "자존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랑에도 참된 자랑이 있고 헛된 자랑이 있다고 합니다. 참된 자랑은 사람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삶을 향상시키는 유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헛된 자랑은 낙심을 주고 좌절을 주고, 불안에 떨게 하며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렘 9장 23절 24절 말씀에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최고의 학벌을 가졌습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앞날이 창창대로로 뚤어 진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진리를 알고, 그것을 믿은 다음부터는 지난 날 자랑거리로 여기던 그 모든 것이 분토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갈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 복음의 사람으로서 그는 십자가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자유가 있고, 무한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볼 때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1:23).
그 당시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치욕적인 형벌과 죽음의 표징이었고, 완전한 파멸을 나타내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라고 하였습니다(갈3: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날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이룬 날이었습니다. 또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려 버린(창3:15),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십자가를 바울은 유일한 자랑의 근거로 삼았고, 모든 소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은 육체로 자랑을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두려워해 할례를 주장했습니다. 저들은 오직 자신들의 명예와 안일만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행15:1).
앞서 말씀드린바 대로, 사실 바울이야말로 육체를 신뢰할 만한 자요, 자랑할 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5-6).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고상한 지식 때문에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던 것입니다(빌3:7-8).
사람들은 자기가 보지 못한 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일은 잘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중국 연길시에 노블 구강병원에 박의식 선교사라는 미국에서 온 치과의사가 계셨습니다. 이분이 하루는 북한의 청진을 다녀오시더니 친구들에게, "내가 북한에 가보니 개들이 풀을 먹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무슨 개가 풀을 먹냐?" 하고 물으니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박 선교사는 "내가 직접 보았다는 데 왜 안 믿느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북자 한사람에게 정말 북한에서는 개가 정말 풀을 먹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그럼 개가 풀을 안 먹으면 무얼 먹습네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개는 사람이 먹다가 남긴 밥이나, 개들이 먹는 먹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니, "아니, 사람 먹을 밥이 없는 데 개 먹을 밥이 오데 있습네까?" 하고 말하더라고요. 이북에서는 개가 풀을 먹는 것이 당연한 데, 그것을 우리는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북한 사람과 그분의 조선족 누님이 사는 댁에서 중국 선교사 한분이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던 중에, 함께 있던 매형 되시는 분이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남조선 사람들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다던데, 선교사님도 서울에 있는 댁에 자동차가 있나요?", "그럼요", "그 자동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건 길에 차가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있지요. 평일 새벽 시간에 길에 차가 많지 않으면 4시간 정도 걸리고, 추석이나 명절에 자동차가 길에 좍 깔리면 12시간도 걸리고 그렇습니다." "4시간에 부산까지 가려면 꽤 빨리 달리시는 모양입니다." "네 저는 차를 좀 빨리 몰아서 교통순경만 안 보이면 140-150Km도 달리지요." 그랬더니 함께 밥을 먹던 북한 사람이 갑자기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집 아들이 선교사님에게 하는 말이 "북조선에서 온 우리 삼촌 말씀에 선교사님이 순 사기꾼이래요." 그래서 선교사님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전날 밤 그 삼촌이 조카들이 모여있는 방에 갔답니다. 그리고서는 하는 말이 "야, 저 남조선에서 왔다는 녀석이 순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구나" 하더랍니다. 그 집 아들과 딸이 놀래서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니, "아, 세상에 무슨 자동차가 한 시간에 백 키로를 넘게 달린다는 말이냐? 그런데 저놈은 150 Km를 달린다고 하니 저런 사기꾼이 어데 있나?" 하더랍니다. 그 집 아이들이 남조선에는 자동차도 좋고 길도 좋아서 그렇게 달릴 수 있다고 설명해도 절대로 믿지 않더랍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경험과 사고의 한계를 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개가 풀을 먹는다는 것 직접 본 적도 없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150 Km를 달리는 것 본적도 없으니 북한 사람이 믿지 멋하는 것 당연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경험 자기의 지식의 한도를 떠나서는 생각도 못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은 조건 없이 희생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착한 사람이 착한 뜻을 가지고 행동해도 항상 그것을 왜곡하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의료선교사들이 중국에 병원을 지으니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절대로 자기들을 위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선교사들이 무슨 흉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고 합니다. 즉 한국에서 살 수 없어서 도망온 범죄자이든지, 아니면 안기부의 특무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지 남조선 괴뢰가 중국 인민을 위하여 봉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 믿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죄로 가득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는 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을 맞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것 같은데 십자가에서 성취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게 될 때 두려움에서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 해 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떤 판사가 범죄자를 재판하기 위해서 재판 석에 나아갔는데 그 죄인은 바로 젊은 시절에 둘도 없이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모두 망해서 빈 털털이가 되고 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상당한 액수의 벌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판사는 둘도 없던 옛 친구의 범법 행위가 선고 받아야할 벌금을 한푼도 감하지 않은 채 큰 액수의 벌금형을 판결했습니다. 방청객 중에서 그들이 지난날 둘도 없는 친구 관계였던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인정머리 없는 판사를 욕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난 후 이 판사는 친구를 끌어안고 위로하면서 친구가 물어야할 거액의 벌금을 대신 납부해 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 아래 살다가 죄인으로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끊임없는 관심은 죄와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친구가 아닌 죄인을 위하여 우리주님은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기 까지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감격하게 되고 진정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도 덜도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사랑으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바르게 깨달으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정말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언제나 두 가지 태도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철저한 죄인이고 무능한 자인 알고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게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놀랍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열등감을 가지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것을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305장
1.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십자가의 귀한 복음을 바로 깨닫고 바울처럼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때로는 양처럼 겸손하게 때로는 사자처럼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형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노랑손수건 전도 운동은 바로 십자가 자랑운동입니다. 이 좋은 십자가를 어찌 나만 바라볼 것입니까? 어찌 나만 믿고 감격할 것입니까?
사람들은 눈만 들면 사방의 교회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자신을 죄에 죽음의 자리에서 지옥의 길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손길을 우리가 내밀어 그들을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노란 손수건 전도는 바로 내 한손은 십자가 굳건이 붙잡고 또 한손은 태신자의 손을 붙잡아 주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손을 놓치면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금이 아주 중요한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힘을 더 하여 저들을 붙잠아 올리십시오 그리고 10월 31일 저들을 십자가 앞에 얻데이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우리와 저들에게 함께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하지 말고 헛된 것을 붙들지 말고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높이며 살아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흔히 밀하기를 이 시대를 개성시대라고 말들 합니다. 자신을 알리고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들을 합니다. 티브이 광고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자기의 상품을 알리기 위해 별의 별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상품은 평소에 손해만 잔뜩 보고 있었는데 광고가 대박이나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합니다. 가수들도 재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3류 가수 취급을 받았는데 어느 날 어느 연예프로그램에 나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됨으로 일약 스타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자기 자랑을 제대로 하느냐가 실패와 성공을 가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보다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본성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이 자식자랑을 침이 마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로 뛰어난 것 같지 않는데 부모가 보기에는 자랑스럽고 대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애는 똥이 황금색이라고 하면서 똥 자랑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랑은 무엇이 있습니까? 잠시 생각해봅시다. 아마도 “나는 자랑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랑할 것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자랑거리가 무엇이 있는가? 열심히 자랑하며 살아가십시오 자랑하다 보면 어쩌면 대박치는 인생이 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육체적인 자랑보다도 물질적인 자랑보다도 영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란한 자기의 이력서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집을 자랑하고 자기의 자동차를 자랑하고 자기의 미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랑은 지나가 버립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랑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삶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랑은 곧 "자존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랑에도 참된 자랑이 있고 헛된 자랑이 있다고 합니다. 참된 자랑은 사람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삶을 향상시키는 유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헛된 자랑은 낙심을 주고 좌절을 주고, 불안에 떨게 하며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렘 9장 23절 24절 말씀에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최고의 학벌을 가졌습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앞날이 창창대로로 뚤어 진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진리를 알고, 그것을 믿은 다음부터는 지난 날 자랑거리로 여기던 그 모든 것이 분토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갈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 복음의 사람으로서 그는 십자가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자유가 있고, 무한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볼 때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1:23).
그 당시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치욕적인 형벌과 죽음의 표징이었고, 완전한 파멸을 나타내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라고 하였습니다(갈3: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날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이룬 날이었습니다. 또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려 버린(창3:15),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십자가를 바울은 유일한 자랑의 근거로 삼았고, 모든 소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은 육체로 자랑을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두려워해 할례를 주장했습니다. 저들은 오직 자신들의 명예와 안일만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행15:1).
앞서 말씀드린바 대로, 사실 바울이야말로 육체를 신뢰할 만한 자요, 자랑할 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5-6).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고상한 지식 때문에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던 것입니다(빌3:7-8).
사람들은 자기가 보지 못한 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일은 잘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중국 연길시에 노블 구강병원에 박의식 선교사라는 미국에서 온 치과의사가 계셨습니다. 이분이 하루는 북한의 청진을 다녀오시더니 친구들에게, "내가 북한에 가보니 개들이 풀을 먹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무슨 개가 풀을 먹냐?" 하고 물으니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박 선교사는 "내가 직접 보았다는 데 왜 안 믿느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북자 한사람에게 정말 북한에서는 개가 정말 풀을 먹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그럼 개가 풀을 안 먹으면 무얼 먹습네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개는 사람이 먹다가 남긴 밥이나, 개들이 먹는 먹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니, "아니, 사람 먹을 밥이 없는 데 개 먹을 밥이 오데 있습네까?" 하고 말하더라고요. 이북에서는 개가 풀을 먹는 것이 당연한 데, 그것을 우리는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북한 사람과 그분의 조선족 누님이 사는 댁에서 중국 선교사 한분이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던 중에, 함께 있던 매형 되시는 분이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남조선 사람들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다던데, 선교사님도 서울에 있는 댁에 자동차가 있나요?", "그럼요", "그 자동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건 길에 차가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있지요. 평일 새벽 시간에 길에 차가 많지 않으면 4시간 정도 걸리고, 추석이나 명절에 자동차가 길에 좍 깔리면 12시간도 걸리고 그렇습니다." "4시간에 부산까지 가려면 꽤 빨리 달리시는 모양입니다." "네 저는 차를 좀 빨리 몰아서 교통순경만 안 보이면 140-150Km도 달리지요." 그랬더니 함께 밥을 먹던 북한 사람이 갑자기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집 아들이 선교사님에게 하는 말이 "북조선에서 온 우리 삼촌 말씀에 선교사님이 순 사기꾼이래요." 그래서 선교사님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전날 밤 그 삼촌이 조카들이 모여있는 방에 갔답니다. 그리고서는 하는 말이 "야, 저 남조선에서 왔다는 녀석이 순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구나" 하더랍니다. 그 집 아들과 딸이 놀래서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니, "아, 세상에 무슨 자동차가 한 시간에 백 키로를 넘게 달린다는 말이냐? 그런데 저놈은 150 Km를 달린다고 하니 저런 사기꾼이 어데 있나?" 하더랍니다. 그 집 아이들이 남조선에는 자동차도 좋고 길도 좋아서 그렇게 달릴 수 있다고 설명해도 절대로 믿지 않더랍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경험과 사고의 한계를 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개가 풀을 먹는다는 것 직접 본 적도 없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150 Km를 달리는 것 본적도 없으니 북한 사람이 믿지 멋하는 것 당연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경험 자기의 지식의 한도를 떠나서는 생각도 못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은 조건 없이 희생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착한 사람이 착한 뜻을 가지고 행동해도 항상 그것을 왜곡하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의료선교사들이 중국에 병원을 지으니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절대로 자기들을 위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선교사들이 무슨 흉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고 합니다. 즉 한국에서 살 수 없어서 도망온 범죄자이든지, 아니면 안기부의 특무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지 남조선 괴뢰가 중국 인민을 위하여 봉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 믿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죄로 가득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는 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을 맞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것 같은데 십자가에서 성취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게 될 때 두려움에서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 해 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떤 판사가 범죄자를 재판하기 위해서 재판 석에 나아갔는데 그 죄인은 바로 젊은 시절에 둘도 없이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모두 망해서 빈 털털이가 되고 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상당한 액수의 벌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판사는 둘도 없던 옛 친구의 범법 행위가 선고 받아야할 벌금을 한푼도 감하지 않은 채 큰 액수의 벌금형을 판결했습니다. 방청객 중에서 그들이 지난날 둘도 없는 친구 관계였던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인정머리 없는 판사를 욕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난 후 이 판사는 친구를 끌어안고 위로하면서 친구가 물어야할 거액의 벌금을 대신 납부해 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 아래 살다가 죄인으로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끊임없는 관심은 죄와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친구가 아닌 죄인을 위하여 우리주님은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기 까지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감격하게 되고 진정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도 덜도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사랑으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바르게 깨달으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정말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언제나 두 가지 태도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철저한 죄인이고 무능한 자인 알고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게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놀랍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열등감을 가지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것을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305장
1.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십자가의 귀한 복음을 바로 깨닫고 바울처럼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때로는 양처럼 겸손하게 때로는 사자처럼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형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노랑손수건 전도 운동은 바로 십자가 자랑운동입니다. 이 좋은 십자가를 어찌 나만 바라볼 것입니까? 어찌 나만 믿고 감격할 것입니까?
사람들은 눈만 들면 사방의 교회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자신을 죄에 죽음의 자리에서 지옥의 길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손길을 우리가 내밀어 그들을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노란 손수건 전도는 바로 내 한손은 십자가 굳건이 붙잡고 또 한손은 태신자의 손을 붙잡아 주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손을 놓치면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금이 아주 중요한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힘을 더 하여 저들을 붙잠아 올리십시오 그리고 10월 31일 저들을 십자가 앞에 얻데이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우리와 저들에게 함께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하지 말고 헛된 것을 붙들지 말고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높이며 살아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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