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칼럼 >
  • 칼럼
2010년 9월 26일 주일아침예배설교
전병호 2010-09-26 추천 0 댓글 0 조회 312

2010년 9월 26일 주일아침예배설교 행 10: 24-33 나의 생명리스트



백부장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선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가이사랴에 와 있는 한 로마 군인 곧 이방 사람으로서 첫 기독교인이 되는 이야기로 성경에는 나타납니다.

신약성경에는 4명의 백부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 가버나움의 백부장(마 8:13 눅 7: 6)으로 하인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 예수님께 간절히 병고쳐 주시기를 간구한 사람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힐 때 현장을 책임진 백부장(눅 23:47).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합니다.
3. 바울을 로마로 호송한 백부장(행 21장)으로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유라굴로 광풍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4. 그리고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는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 군대 백부장(행 10장)입니다.

이들 4명의 백부장은 한결같이 기독교 신앙을 소유했거나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백부장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봅니다.

1절에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고넬료라는 이름은 명성있는 가문 출신임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주전 82년 1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로마의 유명한 장군 푸볼리우스 코넬리우스 슐라(Publius Cornelius Sulla)의 가문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하겠습니다. 다른 기록에는 본래 노예출신이었는데 고넬료가문에서 그를 자유인으로 하고 이름도 그렇게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개인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군인이고 따라서 뒷 배경도 무시 못할 그런 인물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은 고급 장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임지에서 근무하는 약 2, 3년 동안 많은 돈을 긁어모아 재산도 증식시키고 진급에 필요한 상납금도 마련해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사람들을 많이 괴롭히고 착취를 위한 공갈도 예사롭게 행하였을 것입니다.

백부장이란 백 명의 사병을 거느린다고 해서 백부장인데 로마의 한 군단은 6천 명으로서 6백 명 단위로 10개 부대를 편성합니다. 또 각 부대를 1백 명씩 6대로 편성하는데 이것이 마지막 단위로서 천부장이나 군단장은 저 뒤의 사령부에 앉아서 명령을 내릴 뿐이고 실제로 최일선에서 군대를 통솔하는자는 바로 백부장이 감당하게 됩니다. .

여기 가이사랴라고 하는 지역은 당시 로마에서 파송 된 유대의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 총독부가 있는 곳으로서 총독의 안전과 통치 유지를 위하여 로마의 본국인으로 구성된 황제의 직할 정예군 이달리야대 약 5백 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예루살렘의 치안유지를 위해 주둔하는 1백 명의 병력을 포함해서 중동 지구 전체를 다스리는 사령부가 배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넬료가 그 사령부에 속해있는 백부장임을 보아 지성적으로 상당히 높게 인정을 받는 사람 즉 엘리트 장교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지위를 볼 때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높은 계급이 아닌 그저 중대장 정도의 신분이겠지만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파송 된 정예 군대의 지휘관으로서는 상당한 높은 지위에 속하는 고급장교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를 정복한 로마 군인로서 대부분 군인들은 모든 면에서 즉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교만하고 스스로 우월감에 차있기 마련인데, 고넬료는 유대인들의 신앙적 유산이나 믿음의 계승이라는 전통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절에 말씀하기를 "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넬료가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의 위치에서 안 어울리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자로서 앞으로의 자신의 승급에도 상당한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로마인들은 당시 많은 우상을 지키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여 섬겼으므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뜻밖의 일 상식 밖의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로마군인들은 황제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성 서약을 하였기 때문에 정복자이면서도 피정복 민족의 종교를 따랐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요 모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믿음은 경건하였다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것은 유대교 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한마디로 경건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룬 사람이 그렇다고 증거 할 때 비로소 불려지게 됩니다. 이 말은 다만 교리적으로 충실하다는 것만이 아닌 실제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모습이 들어 날 때 인정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기독교인은 경건한 신앙을 가져야 하는데 누가 나는 경건하다고 감히 말할 것입니까? 아니 저 사람은 참 경건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증언할 사람이 얼마나 될 것입니까?

고넬료가 자신의 신변에 여러 가지의 장애가 있음에도 경건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그가 경건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으로 경건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놀라운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경건하다는 말을 듣게된 이유를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자기만 아니라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것이요,
두 번째로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는 것이요
세 번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 항상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절 말씀에 "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제 9시 기도 시간에 고넬료가 환상 중에 밝히 보았다는 것은 그의 기도가 높은 영적 수준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 환상을 통하여 천사를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셨다고 하심은 인간들의 세세한 모든 일들에까지 다 감찰하고 계신다는 말씀이며, 특히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고넬료는 일상생활 중에서도 유대인의 관례처럼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 등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과 그 외에도 무시로 기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위급 장교로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님에도 이렇게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은 기도야말로 모든 일의 해결점이 된다는 것을 이미 그는 체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은 지금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입니다. 원문 상으로 볼 것 같으면 계속해서 모든 경우에 라는 말인데 적어도 일을 시작할 때에 기도로 시작하고 일을 끝낼 때에 기도로 마치고, 아침에 기도하고, 저녁에 기도하고, 시간 맞춰 기도하니 항상 기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문제는 고넬료가 무슨 제목으로 기도했을까? 뭐라고 기도했을까 입니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추측을 합니다만 그러나 적어도 이 사람은 출세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이렇게 기도했을 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지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쪼록 가르치는 지도자를 보내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밝히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진정한 기도는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고 있으니 좀 더 경건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도록 해 주세요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4절에 "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니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바리새인처럼 외식적으로 기도하지 않닸다는 것입니다. 당시 스스로 잘 믿는다고 하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는 형식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런 외식적인 기도자들이기에 예수님을 모함하고 십자가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렇게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인정하시고 그 원대로 응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기도하는 척하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 앞에 자랑하는 기도가 아니었고 사람 앞에 나타내는 외식적인 기도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중요하게 인정해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도록 진심으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하여도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허공 속에 사라지는 독백에 불과하며 나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구제를 한다 할지라도 사람 앞에 잘 보이려는 자선행위라 한다면 하나님은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바라기 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만한 그런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를 항상 되새기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 7: 21 말씀에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어서 22절 말씀에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절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기적들을 일으켰다 할지라도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하였다면 그 행한 일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고넬료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른 일을 다하고 남아도는 무료한 시간에 그저 심심해서 기도나 한번 해볼까? 라며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바쁜 시간에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규칙적인 기도의 생활로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의 시간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그의 지도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넬료는 즉각적으로 실행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듣는데 자기만 아니라 자기 가족만 아니라 자기 집에서 일하는 종들과 일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33절 말씀에 고넬료는 "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들 때에 46절 말씀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고 방언으로 말하였으며 그래서 47절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넬료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고넬료의 놀라운 신앙생활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일이 아니요 바로 베드로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으려 할 때 이미 고넬료의 심중에는 나와 더불어 누가 함께 말씀을 들을 것인가 함께 말씀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의 명단이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과 일가친척 친구들 심지어 종들까지 불러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가족들 나의 사랑하는 이웃들의 영혼까지 염려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며 그들의 영혼이 병들지 않고 타락하지 않도록 지켜 주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의 영혼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의 믿음이라면 분명 나의 영혼조차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영혼을 지키는 그 믿음이 바로 나의 영혼을 지키는 믿음인 것입니다.

언젠가 예화로 쉰들러라는 사람에 대해서 소개한바 있습니다. 다시 소개하면,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유태인을 마구 학살하고 있을 때, 독일에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견사업가로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태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사업가는 그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태인은 마땅히 죽어야 할 민족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노인, 아이, 남자, 여자, 부모와 자식 가릴 것 없이 가스실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죽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발가벗겨져 가스실로 들어간 유태인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가스를 덜 먹도록 부둥켜안고 애쓰다가 쓰러져 가는 처절한 모습을 보고는 그는 어떻게 하든지 힘닿는 대로 죽음의 수렁에 있는 유태인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당시 독일인 관리들이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돈만 주면 가스실로 갈 유태인들을 구해 내어 다른 곳으로 피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몇 년 동안 그가 구해낸 유태인 숫자가 천백 명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해낸 후, 그는 마침내 빈 털털이 무일푼이 됩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재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 돈을 다 털어 유태인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기차를 태워서 떠나 보낸 후, 그는 선로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일어나 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목에 차여있는 시계와 손가락에 끼어있는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시계와 반지를 팔았더라면 몇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하며 탄식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쉰들러(Schindler)입니다.
수년 전에 스필버그 영화 감독을 통해서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란 영화가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쉰들러가 구해준 유태인들과 그 후손들이 현재 약 6,000명이 되어서, 자신들을 'Schindler's Jews(쉰들러의 유태인들)이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후 쉰들러는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아서 유태인들의 큰 환영을 받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태인 학살 기념관과 박물관에 기념 식수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 텔아비브의 '영웅의 공원'에는 그를 기리는 글을 담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귀의 마지막에는 이 쉰들러를 추억하면서 유태인들이 이런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천기원 이란 분이 1995년 사업차 중국연변지방을 여행하던 중 가슴아픈 모습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북한에서 탈북한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가 중국 경찰(공안_에게 두둘겨 맞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거너다 총에 맞아 죽은 탈북자의 시신이 강물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수많은 북한 소녀들이 중국에서 마치 노예들처럼 매매되고 있는 것도 보게 됩니다. 천기원씨는 엄청난 충격에 그들을 돕기로 작정하고 서울에 돌아와 바로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가 1999년부터 작년 2009년까지 무려 900명의 북한 사람들을 탈북시켜 한국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2001년도에는 본인도 중국 경찰에게 붙잡혀 8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게 됩니다. 천기원 목사님을 취조하던 중국 검사 한사람이 천목사님의 일에 그만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보내어 신학을 공부하게 하고 목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목사님의 딸과 결혼 시켜 사위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천목사님은 중국 어느 곳에서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일들을 열심히 펼치고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그냥 한 명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에게는 온 세상보다도 큰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으로서 한 영혼의 가치와 귀중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의 귀중성을 아시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그 영혼을 건져 구원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영혼들을 사망의 길에서 구해 내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족 친척 친구들을 불러낸 고넬료의 명단처럼 그리고 한 생명이라도 더 살려내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한 쉰들러의 명단처럼 천기원 목사님의 그 한 영혼 그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다 희생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에게 그 명단이 있으며 그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 묻고 십 습니다.

이제 우리나라 인구가 5044만 3168명이라고 합니다. 북한 인구는 약 28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민족까지 합하면 8000만 명 정도 될 것입니다. 우리 남한 인구가 5000만 명인데 기독교 인구를 정부통계와 교회 통계간에 차이가 있습니다만 1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5분의 1이 기독교인이요 5분의 4가 비 기독교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4000만 명이 지금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의 가족 친척 친구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차대전 당시 독일의 힛틀러가 600만 명의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내어 죽였다고 힛틀러를 욕하고 당시 그 같은 일을 보고만 있었던 독일인들을 비난하며 그 천인공노할 끔찍한 일에 몸서리를 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나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그 끔찍한 지옥 불로 떨어져 가는데 그냥 보고만 있다면 우리 역시 비난받아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구원한, 혹은 구원해야 할 '쉰들러리스트'와 같은 명단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낸 혹은 구해 내야 할 영혼의 명단을 가지고 있는가? 쉰들러는 자기 재산을 다 없애며 구해낸 천여 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 후손들이 6천 명에 이르고 있는데, 내가 구원한 영혼의 리스트에는 과연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는가? 또 몇 명이나 쓰여 있는가? 나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오늘 우리는 진지하게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누욕에서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리는 엄청난 테러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그 다음해 일주년 행사가 그 사건 현장에서 있었습니다. 그 기념식에서 일년 전 그 날에 희생당한 2801명의 이름을 한 명씩 낱낱이 부르며 기념식을 치렀습니다. 2801명이나 되는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대통령 이하 모든 참석자들은 엄숙한 자세로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희생자 한 사람 한사람 이름을 부르는 그것은 한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미국인들은 그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불려지는 듯 가슴에 슬픔이 가득하였을 것이고 다시는 이런 끔직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라는 결의를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나라 같은 경우라면 아무게 외 몇 사람이라고 말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가 너무 한 사람의 인생을 경히 여기고 인권을 업수히여기고 한 사람의 생명을 대수롭게 생각하는 경향을 도처에서 보게 됩니다. 아직은 우리나라의 가치관의 수준이 거기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 어린아이 한 명이라도 실족케 하면 맷돌을 메고 바닷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가 인권을 존중히 하고 생명을 존중이 하는 일에 앞장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면 인권도 생명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조차 한 생명, 한 영혼을 소홀히 여기게 된다면 이 나라와 사회는 희망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란손수건 전도운동을 위해 태신자 명단은 바로 나의 생명리스트입니다. 우리가 태신자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도하려고 합니다. 이일은 먼저 하나님 앞에 크게 인정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부르셨고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과 함께 저와 여러분을 이 세상에 파송 하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가 얼마나 됩니까? 죽은 영혼들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아픈 마음에 동감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됩니까? 내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내 사랑하는 남편이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일가와 친구들이 불타는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책망하시면서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11: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만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영혼 사랑하라는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주의 종들을 통해 때로는 피를 불고, 때로는 애곡을 하는데도 별 반응이 없는 세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전도합시다. 한 영혼이라도 주께로 인도합시다!"라고 외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 영혼은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며, 또한 그 피 값을 하나님께서는 전하지 않은 우리에게서 찾으신다고 엄하게 경고하셨지만 거기에 대하여 무감각한 우리가 된 것입니다.

고넬료를 귀감을 삼읍시다. 고넬료에게는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고,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모든 가족들이 구원받도록 먼저 믿은 사람이 가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나만의 구원으로 끝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나의 집이 함께 구원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번 추석에도 많은 손님이 여러분의 댁에 방문하신 가정도 있고 또 방문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초대하고 방문하는 일!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노력과 희생과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의 식사는 누가 준비합니까? 설거지는 누가 합니다. 시장은 누가 봐옵니까? 잠은 어디서 잡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먹고 노는 일에 안 불러주면 섭섭하게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생명을 살리는 예배에 초청하면 얼마나 이 핑계 저 핑계 대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그들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했고 은혜 받기를 강하게 원했기에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기쁨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란손수건전도주일에 여러분의 가족과 일가와 가까운 친척들을 고넬료처럼 초청하십시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기에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노란손수건전도주일을 사모하며 준비하십시오. 여러분의 태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정중히 그들을 초청하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쉰들러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구해내지 못한 영혼에 대한 탄식 소리를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까? 천기원 목사님처럼 탈북자의 절망의 모습을 여러분은 그냥 무심히 보고 있을 것입니까? 쉰들러가 아우쉬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어 가는 유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 인간으로서 그냥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전 재산과 삶을 드려 그들을 구원해 냈듯이, 천기원 목사님이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고 탈북자 구조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듯이, 아니 그렇게 까지는 못 할지라도, 우리의 영적인 눈을 떠서 지옥 유황불 속으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보고 우리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과 친구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 리스트에 누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직 누구의 이름도 없다면 지금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붕이자원방래 하니 불역낙호 아라 (有朋 自遠訪來 不亦樂乎) 나의 가까운 벗들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미국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대학 캠퍼스에 가면 설립자 하버드 목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이 까만데 발등이 반들반들합니다. 그것은 하버드의 발을 만지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입소문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찾아오는 학부형들이 으레 그 발을 만진다는 것입니다. 미국인 부모나 한국인 부모나 자녀가 공부 잘하는 것은 동일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기독교인들은 자녀의 신앙을 위해 더 큰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부디 여러분의 가정이 고넬료 가정처럼 온 가족이 자자손손 예수 믿고 복을 누리는 가정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제 39과 텃밭 공과 전병호 2010.09.26 0 161
다음글 제 38과 텃밭 공과 전병호 2010.09.19 0 153

573160 전북 군산시 창성동 주공아파트 상가 204호 TEL : 063-445-0724 지도보기

Copyright © 라온 코이노니아.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0
  • Total26,073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