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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25일 성탄절 설교
전병호 2014-12-25 추천 0 댓글 0 조회 1217

2015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  눅 2:11-14   땅에는 평화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은 세상을 평화롭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를 이루시기위해 이 땅에 평화의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평화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이 천사들이 들에 양을 치는 가난한 목자들에게 온 목적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화를 받으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첫째로 평화를 받으려면 목자들처럼 가난해져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평화로운 우주를 창조 하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닌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곧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를 깨트리려고 에덴동산을 찾아 온 불청객이 있었으니 바로 뱀의 탈을 쓴 마귀였습니다. 그 마귀로 에덴의 평화가 깨지고 하나님과 사람간의 평화도 깨지고 사람과 사람간의 평화도 깨어졌습니다. 평화를 깨트리는 원흉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처럼 지금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평화를 깨트립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쫓겨 난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인간 세상은 온통 싸움과 투쟁의 역사를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3000년 동안 지구상에는 3300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 온 수보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지금도 지구상 어디에 선가 전쟁과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은 다른 나라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날마다 35000여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세력 확장을 위해 전 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50조원에 이릅니다. 그러닌까 사람들의 평화롭고 잘 살아가는데 쓰여 질 비용을 마귀는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고 못살게 하는데 엄청난 돈을 쓰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평화로운 세상은 돈이 없어도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니 엄청난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얻기 위해 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은 돈을 움켜지고 돈으로 인간을 죄짓게 하며 돈 장난을 하여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돈으로 망하게 합니다. 그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어 쌀을 수확했는데 99가마 밖에 되지 않아 가난한 사람의 쌀 한가마를 빼앗아다가 100가마를 채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들의 현실입니다. 이런 사회에 어떻게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혼을 마귀에게 쌀 한가마로 팔아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말로가 어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말씀가운데 그런 부자가 지옥 밑바닥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돈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하셨다면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으시고 로마 황제 궁에서 출생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첫 번째 누우신 곳이 말 먹이 통 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하게 태어나신 아기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은 외치기를 땅에는 기뻐하는 사람들의 평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평화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평화로우려면 가난해 지라는 것입니다. 네 손에 쥔 것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호주머니가 평화요 비어있는 마음이 평화입니다. 가난한자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지만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분쟁이 가득합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싸움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세상에 오시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비워 세상에 오신 그 자리가 말 먹이 통 이였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 마음을 가지라 이 빈 마음을 가지라고 바울사도께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채 살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의 기적의 손을 바라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어 배고픈 허기진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먹지 못하고 말씀을 듣고 있는 그들을 밥 먹여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엘 보면 하루 종일 역시 굶은 채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피곤하시고, 얼마나 허기지실까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도 아침식사를 먹지 못한 채 예배 한 시간 인도 하면 기운이 빠지고 허기가 심한데 하루 종일 말씀하신 예수님을 보면 가만히 앉아서 말씀 듣고 있는 사람들 보다 몇 배나 힘드셨을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얼마나 허기지실까 염려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로우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는 사람을 떡으로 유혹하지만, 그러나 영원한 양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말씀으로 배부르며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살롬의 의미 입니다. 그래서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 곧 평화의 나라가 저희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살롬은 배부름에 있지 않습니다. 배부른 자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3절 마리아의 노래에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오해 마십시오 모든 부자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사로잡힌 돈 욕심에 빠져 있는 부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TV드라마를 보면 수많은 부자들이 나오는데 거의 다 돈 욕심에 사로잡혀 온갖 권모 술수 비리 악덕을 저지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화가 가득한 부자의 이야기를 TV드라마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고 따라합니다. 조용하던 집안에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면 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심한 경우 돈 때문에 법정에까지 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서부 아프리카에 감비아라는 나라가 있죠. 그곳에서 오래 사역하던 선교사님의 말에 의하면, 감비아와 옆에 있는 시에라리온 두 나라는 겉보기에 비슷합니다. 그런데 감비아는 평화로운 나라이고, 시에라리온은 내전이 끊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감비아는 너무 가난해서 평화롭다는 겁니다. 반면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어 이권 때문에 늘 싸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해 하지 마십시오. 가난한자가 다 평화롭다는 말은 아닙니다. 목자들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나해 짐을 말합니다. 성 프랜시스에 대한 유명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 하겠습니다. 프랜시스가 젊은 시절 믿음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니 아버지가 아들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키토 감독이 주관하는 재판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유산과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말하자 프랜시스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을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남은 것은 팬티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주시했는데 프랜시스는 눈 깜짝 할 사이에 팬티까지 홀랑 벗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참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장내에서는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불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페트로 베르나드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흐느끼는 사람들 중에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을 쏟던 아릿다운 12세 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나중에 프랜시스를 따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어머니가 된 성녀 클라라(Sancta Clara Assisiensis, 1194716- 1253811)였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라는 성프랜시스의 평화의 노래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으로부터 평화를 받으려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오직 욕망에 사로잡혀 온갖 죄를 짓고 싸우고 다투고 죽이고, 마음에 칼을 품고 눈에 살기 가득한 사람들이 늑대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에 사는 누구에나 이런 늑대의 마음들을 품고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어 그 첫 번째 누우신 말 먹이통은 그야말로 아무런 방어할 것 없는 말에게도 먹혀질 그런 가냘픈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수많은 늑대들이 예수님의 주변을 배회하며 예수님을 잡아먹으려 하였습니다. 사두개란 사나운 개가 으르렁 거리며 달려들고, 바리새란 사나운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예수님에게 날아들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달려 그들에게 먹이로 자기를 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평화로우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조용히 운명하시였습니다.

 

2: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하신 예수님을 그대로 무덤에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우주의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로 높이 셨습니다.

 

이래서 십자가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는 평화의 동산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 아래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하니 십자가아래 있지만 그는 죄 아래 있으며 마귀아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는 교회는 항상 평화가 넘칩니다. 그러나 교회도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자기의 욕망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쟁이 있기 마련이다. 가정도 십자가가 있는 가정은 항상 평안이 있습니다.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녀 관계에 있어서 서로 대립이 있다가도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모든 문제는 다 해결이 됩니다. 어떤 단체든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단체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단체는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심지어는 회사도 십자가가 중심인 회사는 노사 분규가 없이 항상 평화롭습니다.

 

예화 책을 보니 영국 사람이 그린 개통(開通)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한 통신병이 부대 간의 교신을 하는 전화선을 수리하러 갑니다. 적진에 총탄이 빗발치듯하는데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전화선이라 목숨을 걸고 뛰어갑니다. 드디어 끊어진 데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전선을 이어줄 아무런 기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양쪽 전선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적의 탄환을 맞고 쓰러졌지만 두 손을 움켜쥔 채로 사력을 다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바로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이겁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신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개통시키셨고 우리와 우리사이를 개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개통된 평화를 이루 셨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는 평화는 평화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평화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자가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짊어진 십자가가 무슨 십자가 입니까? 바로 평화입니다, 성탄절 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는 착한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짊어지고 분쟁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는 곳에,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나누어주는 평화의 싼타크로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특권이요 무한한 책임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탄절을 맞이하였지만 이 평화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나누지 못한다면 아직 그에게 성탄절은 오지 않은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가득히 부풀은 풍선처럼 평화를 마음에 가득히 채우십시오. 그리고 여기 저기 둥둥 떠다니면서 평화를 선물하십시오. 천사가 양을 치고 있는 목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었듯이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해 주십시오.

 

고후5:18~20 말씀에 기독교인을 평화의 사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가득하면 육신의 건강도 좋아지고, 가정에도 평화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이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평화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 불화와 갈등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오늘 천사들이 평화를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평화의 구주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임하시기를 아기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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