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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9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전병호 2014-10-19 추천 0 댓글 0 조회 677

20141019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눅 15:3-7 100=99+1의 원리

 

 

가을이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흔히 가을은 말이 살찌는 天高馬肥 계절이라 하는데 가을에는 먹을거리가 풍성한 계절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쯤 되면 대하 소금구이가 먹을 만합니다. 추어탕이나 낙지볶음도 늦가을 음식으로 권 할 만합니다. 그러나 늦가을의 대표적 음식을 말하라고 하면 저는 비빔밥을 말하고 싶습니다. 비빔밥하면 뭐니 뭐니 해도 전주비빔밥을 말합니다. 23일부터 전주에서 비빔밥축제를 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전주에 가면 많은 비빔밥 전문 식당들이 있는데 어쩌다 한번가면 언제나 가족회관을 들릅니다. 제가 마지막 간적은 한 4년 전 쯤 됩니다. 1979년부터 비빔밥전문 식당으로 3대째 내려오고 있는데 다른 식당보다 정갈하고 맛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올 가을엔 한번 가보고 싶기도 합니다. 비빔밥하면 전주비빔밥만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기름으로 볶은 밥에 닭고기 얹은 해주비빔밥, 제사상 나물을 간장으로 버물린 안동 헛제사비빔밥, 해초를 넣은 통영비빔밥 그리고 황등육회비빔밥이 먹을 만합니다. 전주비빔밥보다 더 유명한 진주비빔밥이 있습니다. 진주비빔밥은 꽃밥이라고도 하는데 일곱색깔로 칠보화반(七寶花飯) 이라고도 합니다. 둥근 놋그릇과 흰빛 쌀밥 그리고 다섯 가지 나물이 어우러진 데 여기에 보탕국으로 묽은 엿고추장과 고기를 채로 썰어 깨 소금, 마늘, 참기름 등으로 양념한 육회를 반드시 얹어 먹는데 시각적으로나 영양적으로 매우 우수한 음식입니다.

 

비빔밥에 여러 가지 음식재료들이 들어가는데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고사리도 들어가고 호박도 들어가고 시금치 무 당근 숙주나물 또는 콩나물 물론 고추장도 맛깔스럽게 만들어 들어가는데 비빔밥이 나올 때 맨 위에 얹어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달걀 후라이입니다. 이 달걀 후라이가 빠지면 무언가 허전합니다. 비빔밥은 예부터 오행에 근거해 푸른색 붉은 색 황색 백색 흑색이 기본색으로 어울려집니다. 푸른색의 시금치와 미나리 나물류는 봄기운을 담아 간을 보하고, 쇠고기 살과 고추장의 붉은색은 여름기운을 담아 심장을 보한다고 합니다. 흰색의 밥과 무는 가을기운을 담아 폐를 보하고, 밥과 함께한 검은 콩과 살짝 뿌린 검은깨는 겨울기운을 담아 신장을 보하며, 한가운데 살짝 얹은 계란의 황색이 장하長夏의 기운을 담아 비장(소화기)을 보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계란이 비빔밥의 畵龍點睛으로 꼭 들어가게 됩니다.

 

비빔밥이라는 것이 집에서 양푼에다 여러 가지 채소와 고추장을 넣어 싹싹 비벼 먹기도 합니다만 격식에 따라 다섯 가지 색상을 맞춤으로 세계적인 한류 음식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 비빔밥을 길게 설명을 하는 것은 어느 한 색깔이라도 빠지면 세계에 내 놓을만한 격식을 차린 비빔밥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음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100=99+1으로 유치원생도 아는 셈입니다. 100이 되려면 99만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되고 꼭 1이 더해져야 합니다.

 

100이 완벽한 것이라 하면 하나가 빠진 채 99으로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99도 중요하지만 그 빠진 하나가 매우 중요합니다. 언젠가 100개 쪼가리로 그림퍼즐을 맞추는 게임을 하였습니다. 거의 30분 이상 인내와 집중을 통해 마침내 완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완성을 못하였습니다. 99개 쪼가리는 다 맞추었는데 하나를 맞추지 못하였습니다. 맞추는 동안 세 살 손자 아이가 하나를 슬쩍 가져가 어디론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 하나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여 99개로 맞춘 그림에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한 가운데가 훵 하니 뚫어져 있어 결국 완성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한 개가 없는 99개 쪼가리는 쓰레기가 되어버렸습니다.

 

100이 되려면 99개로는 미완성입니다. 반드시 하나가 더해져야 합니다. 그 하나가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나 한사람은 오직 나뿐입니다. 두 사랑하는 연인이 풀밭에 앉아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말하면서 옆에 있는 풀을 뜯었습니다. 여자가 말하기를 왜 하나밖에 없는 그 풀을 뜯느냐 그러지 말라고 말합니다. 남자가 말하기를 여기에 풀들이 많은데 왜 하나 밖에 없다고 하느냐고 하니 당신이 뜯고 있는 풀은 이 지구상에 오직 그 풀 하나 뿐이라고 여인이 대답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만 여인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자는 너무 슬퍼 엉엉 울다가 얼마 전에 여인이 하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수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바로 그 한 사람 뿐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여인들이 많지만 내 사랑하는 그 한 여인이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 여러분 각자는 오직 여러분 한 사람뿐입니다. 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지 지금 나 한 사람 없으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도 말씀 들였는데 바로 우리 각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아니 될 가장 중요한 핵심 맴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핵심멤버입니다. 나 없는 내 가정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 가정의 필수멤버입니다. 가정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여러분의 가정은 캄캄한 절벽위에 서있는 것 같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직장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핵심 맴버입니다. 지난번 정다운 요양원에 가서 보니 김광진집사님은 그 요양원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핵심멤버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김광진집사님 없는 그 요양원은 아마 쓰러질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는 여러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친구들 가운데 그러므로 핵심멤버여야 할 것입니다. 대학생 때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그 친구와 더불어 자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군대에 입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과도 만남이 뜸했습니다. 그 친구가 제대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뜸하였던 친구들이 다시 어울려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친구들 중에 핵심 멤버였습니다.

 

성경에는 성경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핵심멤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는 이 핵심맴버인 한사람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아한사람으로 홍수심판에서 모든 동물들이 살아남았습니다. 아브라함한사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한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구출하였습니다. 다윗한사람이 이스라엘 왕국을 반석위에 세웠습니다. 예수님한사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바울한사람이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이룩하였습니다. 그리고 루터한사람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칼빈 한사람이 장로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웨슬레목사 한사람이 감리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최태용목사 한사람이 복음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역사와 기독교 역사에서 그 한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기독교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마다 그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완벽하게 진행시켜 나가셨습니다.

오늘도 그 한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완벽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 한사람이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달리 말씀드린다면 바로 옆에 있는 그 한사람을 통해서 내 앞에 있는 그 한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두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소중하고 귀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핵심맴버들입니다. 그 핵심맴버가 빠진다면 우리의 인생은 불완전한 인생이 됩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그 한사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나의 인생이 완벽하게 완성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있기에 나의 인생은 살맛나는 인생이 됩니다. 나의 인생이 성공하는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그 한사람으로 정해진다하면 그 한사람이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혹 가깝게 하고 싶지 않은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그 한 사람을 가깝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실패된 인생이 될 지도 모릅니다. 여기 자석이 있습니다. 이 자석에는 서로 반대되는 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극끼리는 밀치고 다른 극끼리는 달라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하나님의 세계가 완벽하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하나 되어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려야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완벽하게 됩니다. 만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불완전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원수는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먼 당신을 가장 가깝게 해야 하는 그 한사람으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원리입니다. 완벽한 창조의 세계를 이루는 원리입니다. 그 하나를 버리면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에게 가까운 친구가 99명이 있다할 지라도 가장 미워하는 그 한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다면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먼 그 한사람을 우리는 찾으려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물을 가지고 예배하러 오다가 다툰 사람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내려놓고 그를 찾아가 화해 한 다음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한사람을 찾아 가는 일이 바로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100=99+1 원리입니다. 그 한사람이 나의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하나님의 축복인생으로 만들어 줄 핵심맴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므로 싫어하므로 멀리하므로 그 한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인생을 완벽한 구원받은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없이는 나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 한사람은 나의 인생에 잃어버린 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바로 잃었던 양의 비유와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기에 온갖 수고를 다하였습니다. 여인은 잃어버린 돈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졌고, 아버지는 잃어버린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목자가 잃었던 양을 천신만고 끝에 찾아 돌아와서 친구들을 모아 잔치를 하였습니다. 동전 한 닢을 마침내 찾아 친구들을 모아 잔치를 열었습니다. 잃었던 아들이 돌아오니 온 동리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열었습니다. 일어버린 것을 찾은 기쁨을 잔치를 차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마도 잔치비용이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나갔을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양 한 마리를 찾음으로 울안에 백마리 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완벽한 목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한 연주자라도 빠지면 물론 안 됩니다. 연 주중에 한 음이라도 빼먹거나 틀린 음을 냈다면 완벽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보시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인가?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것인가? 못마땅하게 여기시고 고개를 돌리실 것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기 위해 우리에게 부족한 그 한 가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한 부자 청년이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청년은 나는 성경의 모든 계명을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재산이 많은 고로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99개가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가 부족하면 부족한 것입니다. 그 한 가지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찾아 나가야합니다. 그것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고난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찾아 기쁨으로 돌아와 잔치를 열어야 우리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행복한 성공적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무관심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미움이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제 어렸을 때 대통령이름은 물론 장관들 이름도 좔좔 외우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이 누구고 대법원장이 누구고 그 이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현재 장관들의 이름을 모름니다. 요즈음 학생들 가운데 대통령이름도 모르는 학생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 어떤 아이에게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으닌까? 박 대통령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성이 박씨이고 이름이 대통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아니 어떻게 아이가 우리나라 대통령이름도 모르느냐 대통령이름을 안 가르쳐 주었냐 라고 물으니, 선생님 대답이 제가 지난번 대통령 투표를 안 해서 모른다고 말하더랍니다. 우스게 이야기겠죠 설마 이런 선생님은 없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시골마을 버스 안에서 예쁘게 생긴 여자를 험악하게 생긴 두 건달이 희롱합니다. 버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른 체합니다. 급기야 두 건달은 운전사에게 정지할 것을 명하고 말을 듣지 않자 운전사를 마구때려 실신을 시킵니다. 그리고 두 건달은 버스에서 여자를 강제로 끌어내려 버스 옆 풀밭으로 데려가 돌아가며 성폭행을 합니다. 버스 안에는 건장한 남자도 수십 명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정의롭게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냥 차창너머로 슬금슬금 눈치 보며 그 광경을 구경만 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일에 참견했다가 칼이라도 맞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보다 못한 한 청년이 나서서 건달과 싸웁니다. 건달들은 청년을 칼로 몇 차례를 찌르고 달아납니다. 여자가 울면서 옷을 차려입습니다. 여자가 버스에 오르자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창피한건 아는지 여자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두가 무관심한 척 창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운전사는 기절해서 운전할 수 없고 그때 여자가 헝클어진 상태로 운전석에 앉습니다. 그때, 피를 흘리며 청년이 차에 타려하자 여자가 소리칩니다. “왜 남의 일에 참견하시는 겁니까?” 라며 그 여자는 청년에게 화를 내고 버스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여자가 운전하는 버스는 출발합니다. 청년은 고통스런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 자동차 교통사고현장을 목격합니다. 교통경찰관이 말하길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승객이 모두 사망한 사고라고 합니다. 멀리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방금 자신이 타고 왔던 바로 그 버스였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짓지 않았지만 어찌 보면 모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산 사람은 그 청년 뿐 이였습니다.

 

무관심의 결과는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무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99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에 무관심 할 때 그 하나로 나의 인생이 깨어질 수 있으며 그 하나에 관심을 기울일 때 나와 나의 이웃들이 함께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사람을 좋은 이웃으로 소개한 이유는 그 사람은 정말로 무관심하게 지나가도 누가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이었지만 그는 관심을 가지고 강도 맞은 한 사람을 보살펴 줌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선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한 마리 양의 실종사건은 오늘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시각으로는 현명하지 못한 행동 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되고 있는 현대사회의 풍조 속에서 한 마리쯤 잃어버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겠다고 나서는 목자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양을 찾아 바쁘게 다니셨습니다. 수가성 우물터에서 동리사람들이 잃어버렸던 한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사람들이 내버렸던 삭개오를 찾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돌파매질을 당해 죽게 될 한 여인을 찾아 예수님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위에서 옆에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한 강도를 찾아 낙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양을 찾아 낸 목자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찾은바 그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찾은 기쁨으로 천국잔치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찾은바 된 그 한 사람입니다. 나를 찾으신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기뻐 천국잔치를 여셨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뻐하셨을 까요. 바로 나 한 사람 찾으셔서 기뻐하신 예수님. 바로 내 옆에 있는 그 한 사람을 찾으셔서 기뻐하신 예수님. 어떻게 예수님은 그들을 찾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향한 마음이 열려계셨습니다.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들만 보이셨습니다. 그 한 사람을 찾으러 이동네 저 동리 찾아다니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실 그 한사람이 있으십니까? 세월호 선장의 죄가 무엇입니까? 자기만 살겠다고 뛰쳐나온 죄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만 천국 가겠다고 하면서 그 한사람을 무관심한 것이 너에게 부족한 한가지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도 고개 숙이고 슬퍼하며 뒤 돌아 설 것입니까?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그 한사람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그를 지옥에서 건져 내는 일이 우리의 그 어떤 일 보다 우선 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한두 번 관심을 가지다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관심을 가지고 집요한 사랑으로 그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낙심도 나고 고난도 받고 힘들어 에라 모르겠다 나나 잘 믿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끊어지는 날 우리에게 관심 줄을 길게 느리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나를 향한 관심도 놓아 버리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은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까지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는 포기란 말이 없다란 의미입니다. 포기하는 것이 가장 잘 못 믿는 일입니다. 만일 내가 포기 하면 그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에 구원사역에는 결코 포기가 없어야 합니다.

 

150년 전 영국교회가 깊은 어둠과 부도덕에 빠져 있었을 때 영국의 한 목사님이 영국의 교회들이 잘 못 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인들의 신앙 상태가 전혀 기독교인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 믿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이토록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 당시의 영국교회를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마음에 맞는 기독교인들을 조직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전도를 전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찬송가를 군가처럼 불렀습니다. 성가대를 군악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사관학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무리를 일컬어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구세군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윌리암 부쓰라는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구세군 입니다. 그런데 이 구세군의 영향력이 대단한 충격을 불러일으키면서 영국의 교회들이 새로워졌고 영국이 새로워 졌습니다. 많은 범죄가 물러갔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 7세가 윌리암 부쓰를 버킹검 궁전으로 초대 하였습니다.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하고 계신 놀라운 구세군 활동에 대해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당신의 소원은 무엇 입니까? 내가 들어 드리고 싶기 때문 입니다.” 이런 왕의 질문 앞에 윌리암 부쓰는 대답하기를,

 

왕이시여, 어떤 사람들의 야망은 정치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야망은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야망은 명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My ambition is the souls of man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 영혼 입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비젼! 이것이 주님의 꿈이고, 주님의 소원이고, 주님의 야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입니다. 그 한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열정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열정은 부활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가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랫동안 여러분과 함께 한 꿈을 가졌습니다. 바로 군산신민 1%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 꿈을 주셨다고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꿈을 이루기는 요원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야말로 한 낮의 꿈이련가? ‘꿈이여 다시 한번 백합꽃 마음속에저는 이 비전을 제 후임으로 오신 임진생 목사님이 함께 공유되어 다시금 여러분과 함께 우리 나운 복음교회에 주신 이 꿈을 이루어 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 자신도 이 꿈을 계속 꾸리라. 새롭게 꿈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13년 전 제가 군산기독교연합회 총무시절, 군산시민 복음화를 위해서 100년 전 처음으로 복음 들고 군산에 온 한 사람 전킨 선교사 그리고 또 한사람 드류 선교사의 선교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피력하며 그분들의 선교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기점으로 복음화 기치를 높이 세우자고 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2년 전 다시 제가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시절 다시 초창기 선교사들의 선교정신을 되살려 군산복음화를 이루자고 하였지만 또 다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 왔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 처음 들어와 복음을 전한지 12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에 전킨 두류 선교사 기념관을 세우는 일을 백의종군하는 믿음으로 몇몇 목사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 들어 올 때 군산은 아주 작은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군산의 그 한사람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지금의 영광여고와 제일고등학교입니다. 또 전주에 기전여자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구암병원도 세우고 군산 주민들의 구원을 위해 살신성인 선교활동에 매진하다가 그의 세 아들과 함께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십자가 신앙으로 그 한 사람을 찾아 나선 그분의 믿음을 오늘에 되살려 군산의 모든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그 뒤를 따를 때 군산의 복음화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저는 목사님들에게 강권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에게 그 한사람은 군산입니다. 저에게 100은 군산의 복음화입니다. 그것은 23년 전 오성산에서 기도할 때 주님이 저에게 주신 비전 이였습니다. 저의 야망입니다. 99는 현재 군산의 교회이며 여기에 구원받을 군산 시민 그 한사람이 더해져서 군산의 복음화 100이 달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100=99+1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찾아야할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구에게는 원수처럼 여기는 그 한 사람일 것이고, 누구에게는 아직 구원 받지 못하고 있는 이웃이기도 할 것이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아직 못다 이룬 비전이기도 합니다. 그 한 사람을 찾을 때 나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음으로 나의 믿음생활이 완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 이십니다. 나 한 사람을 죄 가운데 찾아내시고 나의 평생을 광야 같은 세상에서 인도하시니 우리들의 삶이 복되고 아름답고 안전히 거하게 됨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도 선한목자 우리주님이 여러분의 인생길을 지도하시고 우리가 어렵고 힘들고 눈물 흘릴 때 우리를 찾아와 주시어 우리의 부족을 채워주시고 그 하나를 더 해주시므로 여러분의 인생이 풍성한 하늘의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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