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마 16:1-4 초윤장산(礎潤張傘)의 신앙
오늘 아침 설교제목이 초윤장산(礎潤張傘)이란 사자성어로 정하였습니다. 이 말은 중국의 대 학자인 한비자가 한 말로서 주춧돌 초礎자에 젖을 윤潤자, 주춧돌이 촉촉이 젖어 있으면, 펼 장자張자에 우산 산傘자, 우산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위기 전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었습니다. 민생이 불안해지고 민심이 이반되며 불미스러운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역시 한비자가 기록한 '망징편亡懲篇' 이란 글이 있는데 이글에서 나라가 망하기 전에 반드시 47가지 징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징조의 첫 번째가 법을 소홀이 하고 음모와 계략에만 힘쓰며 국내정치는 어지럽게 두면서 외세만을 의지한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두 번째가 선비들이 논쟁만 즐기며 상인들은 나라밖에 재물을 쌓아두고 대신들은 개인적인 이권만을 취택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세 번째는 군주가 누각이나 연못을 좋아하여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하면 그 나란믄 망한다. 마흔 일곱 번째가 군주의 사위나 손자가 백성과 같은 고을에 살며, 그 위세를 앞세우고 마을에서 설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이 한비자의 47가지 망징을 ‘분열’, ‘부패’, ‘무원칙’, ‘안보의식 해이’, ‘가치 혼돈’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는 1930년대 영국 식민치하 인도의 암울한 현실을 바탕으로 망국론(亡國論)을 펼치며, 7가지 요소가 나라를 난국에 빠뜨린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 일곱가지 나라가 망하는 요소는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심 없는 상거래’,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지만, 대개 그 전에 몇 가지 징조를 보이기 마련이라 한비자가 말하기를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반드시 벌레가 파먹었기 때문이고,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틈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200여 년 전에 중국에 살았던 한비자의 망징편과 간디의 망국론을 오늘 우리나라에 대비해 보니 틀림없이 우리나라가 망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징조가 여기저기에서 보여집니다.
천년왕국이었던 로마가 망했습니다. 왜 망하였는가 많은 역사가들이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망한 원인을 정치적으로 또는 외적의 침입등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의 기본 윤리와 도덕, 사회의 질서와 기강이 헤이 해 졌기 때문입니다. 귀족이고 일반 백성이고 사치와 방종 성적 문란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수십개의 공중목욕탕이 있었는데 당시 로마사람들이 공중목욕탕에 중독에 빠지듯 다녔는데 실은 목욕이 목적이 아니고 매음이 목적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의 침략이 있었지만 세계 최강의 로마 군대가 저절로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313년 이래 로마는 기독교가 국교였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로마인들의 정신과 생활을 지배하여야 했는데 그렇치 못하였고 더군다나 당신 로마 카토릭교회는 세속화 되었거나 세속의 타락에 대해 무관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선 오백년 왕국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국 하버드대에서 우리나라 족보를 연구해 유명해진 교수가 있습니다. 그가 조선의 멸망에 관해 연구해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첫째로 세계의 변화를 너무 몰랐으며, 두 번째는 정치지도자들의 부정부패이고 세 번째는 국론 분렬이라는 것입니다. 동인과 서인이 싸우고, 남인과 북인이 싸우고 노론과 소론이 싸우고, 김씨와 이씨가 싸우고, 개화파와 보수파가 싸우니 조선의 미래는 암담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청나라 군대가 5만 명이 들어오고 일본 군대가 10만 명이 들어와 우리나라 안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을 하였습니다. 마치 구운 생선을 앞에 두고 고양이와 개가 싸우듯 누가 조선을 차지하느냐 싸우다가 일본이 이기니 일본이 조선을 꿀떡 집어 삼켜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우스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탈렌트 김응수 입니다. 대왕 태종이란 드라마에서 태종장인 역할을 하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합니다. 성종대왕시절을 배경으로 한 해를 품은 달에서는 왕비의 아버지로 나오면서 못된 짓을 합니다. 효종대왕시절을 배경으로 한 무사 백동수에서는 역시 유소강이란 못된 역할을 합니다.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설별곡에서는 벽파의 2인자로 나라 망할 짓을 합니다. 철종시절을 배경으로 한 닥터 진에서는 세도부리는 안동김씨 김병희 역할을 하며 이때부터 조선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각시탈에서는 총독부 경무국장 콘노고지로 나와 독립운동가를 잡아 드리는 역할을 합니다. 시대를 따라 김응수가 나타나 나라 망할 짓을 하니 조선이 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라 망하는 일에 각자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국내에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건 사고는 바로 나라가 망할 징조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가 파괴되고 윤리도덕 관념이 무너진지가 오래며, 산지사방에서 다툼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방귀가 잦으면 뭐 싸기 쉽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꾸 사고가 많이 일어나면 결국 대형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를 지키는 확실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만고의 진리가 바로 합하면 이기고 흩어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분쟁을 멈추고 모든 다툼을 쉬고 모든 미움을 버리고 무조건 하나 되면 흥합니다. 내가 옳다 네가 틀리다 따질 것 없습니다. 세월 지나가면 모두가 옳고 모두가 틀립니다. 우리 백성들이 함께 손에 손잡고 하나 되면 3년 안에 세계 일등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조선이 망한 것 먼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1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금 세월호의 침몰사건을 바로 대한민국의 침몰의 징조로 기록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여기서부터 우리는 영적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입니까? 모든 분열의 원흉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분쟁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다툽니까?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갈등과 알륵 자기주장 자기 고집 교만과 욕심의 발로 때문이요 이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바로 아담과 이브간의 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분쟁의 결과는 살인입니다. 예수님은 친구에게 노하고 라가라하는 즉 욕을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마5:22)
그냥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원죄가 다툼이니 원죄를 가진 인간이 태초 이래로 하나가 되어 온 적이 없습니다. 다투고 싸우고 분쟁하고 인간이 하는 일이란 서로 미워하는 일이니 세상이 평화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시계가 고장이 났습니다. 구 시장에 있는 시계방을 찾아 갔습니다. 오래된 시계방인지 매우 좁고 실애가 지저분했습니다. 한쪽에는 마늘을 잔뜩 싸 놓고 있어 마눌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한 60대 되신 주인이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가니 기쁘게 맞아주었습니다. 손목시계를 받아 쥔 주인은 능숙한 솜씨로 시계 뒤 뚜껑을 열더니 이리저리 살펴보고 아주 조그만 나사를 꺼내어 다른 것으로 바꿔 꼈습니다. 그랬더니 시계가 고쳐졌습니다. 시계방이 지저분한 것과 시계 고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마늘냄새와 시계고치는 것과 관계 없습니다. 다만 시계 고치는 주인이 전문가이냐 아니냐가 관계 일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악의 역사요 마귀의 역사입니다. 누가 이 병들고 고장낝 세계와 인류를 고칠 수 있을 것입니까?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홀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미래를 전혀 모릅니다. 누가 한 걸음 앞을 알 것이며 누가 일초 앞을 알 것입니까? 그러나 많은 동물들이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예지의 능력이 있어 추측을 합니다. 개미는 홍수를 예측하고서 일주일 전부터 대피합니다. 산에 사는 멧돼지는 그해 풍년과 흉년을 예측하고 식구를 조절한답니다. 멧돼지는 풍년이 드는 해에는 새끼를 많이 낳고 흉년드는 해에는 새끼를 적게 난다는 겁니다. 겨울철 철새도 이동하는 곳에 먹이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 거기에 갑니다. 먹이가 부족하면 떼를 나눠서 간다는 거예요. 이 미물들이 예측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마7:25-31)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원리대로, 순리대로 사는데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삽니다. 모든 생물은 본능대로 사는데 인간만이 하나님의 순리대로 순종하고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인간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날씨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지금 태풍 나크리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 서해안으로 지나간다고 합니다. 최근 기상대는 현대적인 설비와 기술로 거의 정확하게 기후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오성산에 있는 군산 기상대는 우리지역의 기상 상황을 정확하게 관측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천기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는 분별할 줄을 모르고 있다고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 사람을 피하라. 알지 못하면서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린아이니까 이 사람을 가르치라. 자기가 알면서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잠자는 사람이니까 깨우라. 알면서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그를 따르라.”이렇게 사람을 안다, 모른다를 가지고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이 네 종류의 사람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볼 수 있고, 사업장에서도 볼 수 있고, 여러분의 이웃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교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각각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다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네 종류로 나눠볼 수는 있지만, 구별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어떻게 그 사람들을 알고, 피할 사람은 피하고 따를 사람은 따르고 가르칠 사람은 가르칠 것입니까? 이게 소위 분별력입니다. 세상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지혜 또는 기술, 무엇이 진실인지를 바로 알 수 있는 능력, 겉으로 보이는 것 뒤의 참된 상황이나 참된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능력, 지혜라고도 하고 분별력이라고도 하고 영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 분별력-영력이 있는 사람은 내가 누구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어떤 적을 조심해야 할지도 압니다. 이 일을 이렇게 하면 결과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이 이런 면에서 영력이 있어야 하는데, 영력은 오직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얻게 됩니다. 지금 세상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사이비 종교가 많습니까? 성령충만하지 못한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어 이사람 저사람 따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유병언같은 사람을 그렇게 따를까 의아해 합니다.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력이 없을 때 교회 안에 사탄이 수많은 거짓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어도 그게 거짓인지 참인지 모르고 같이 휘둘릴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해서 이단에게도 쉽게 넘어가갑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요한일서에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 분별력이 없을 때에는 과연 이 사람의 말이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아닌가 구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충만 받지 못하였다면 성령충만 받기를 사모하여 열심을 더할 뿐 아니라 말씀 앞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아직 성령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박사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받지 못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역시 우매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지혜롭다 하는 것이 뭐예요? 모든 일을 잘 알고, 돈을 잘 벌고, 세상일에 경험이 많던가 이런 것을 세상적으로 지혜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대통령 주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 머리가 가장 좋은 사람들이 싱크탱크라 하여 수 백 명이 있습니다. 그들의 지혜가 우리나라를 이끌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월호 사건이 나고 이 일을 제대로 해결을 못해 지금 얼마나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까? 그래서 TV를 보면 저마다 전문가라고 예측발언을 하고 해결방법을 말합니다만 그것도 지나가는 바람소리 일 뿐입니다. 저는 유병언씨의 죽음을 보면서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측을 하였을까?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하여 온 행위가 불법적이고 불의한 일이라는 것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불의한 일을 한 사람은 영력이 사라지고 마귀의 손아귀에 마치 꼭두각시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자신의 비극적인 최후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의 동북부 지역이 우리나라와 상당히 계절이 비슷한 4계절이 있습니다. 여름이 지난 9월부터 가을이 시작이 되는데 그런데 9월말이나 10월쯤에 다시 여름처럼 따뜻해집니다. 그 기간이 한 일주일에서 열흘 갑니다. 그 기간을 불러서 인디안 섬머(Indian summer)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디안 섬머가 딱 지나고 나면 갑자기 늦가을이 되어서 쌀쌀한 가을, 겨울로 완전히 바뀝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 인디안 섬머의 따뜻한 기간 동안에 월동준비를 합니다. 집이 크고 난방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그 인디안 섬머 기간 동안에 창문마다 다 비닐을 치고 쫄대를 해서 답니다. 그래서 창문마다 전부 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자동차도 타이어를 스노우 타이어로 전부 갑니다. 엔진오일도 체크하고 철저하게 월동준비를 합니다. 날은 더운데 집집마다 다 월동준비를 합니다. 마치 천지의 기상을 그런 식으로 지혜롭게 분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여러 가지 시대의 징조가 나라 망할 징조라 바라만 보면 나라는 망합니다. 징조는 아직 망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니 이때 철저히 나라를 바로 세워 나가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무조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왜 다툽니까? 뭣 때문에 마귀의 조종을 당하며 싸웁니까? 예의 도덕을 바로하고 지서와 준법을 철저히 지키고 하나님 앞에 의와 진실히 믿음 생활을 하면 우리나라는 세계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징조를 봅니다. 그것은 매일같이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입니다. 그 변화의 속도를 우리는 가히 따라 갈 수 없습니다. 10여년전만해도 100년 만에 일어날 변화가 10년 만에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은 10년 만에 일어날 변화가 하루 동안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세가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있습니다. 자동차와 신용카드와 헨드폰이라는 것입니다. 10년 전 만해도 길가에 공중전화박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앞 길가에 하나 있습니다. 이 핸드폰도 일 년에 몇 번씩 바뀝니다. 만일 자동차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살아간다면 아마도 우리 할머니들께서는 전혀 불편함을 모를 것이지만 여기 젊은이들은 큰 곤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를 정상적으로 살아가려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변화된 생활방식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해 가는데 인간의 심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가인 시절이나 아브라함 시절이나 모세 시절이나 예수님 시대 사람들과 오늘의 사람들의 심성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지 않다는 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마귀의 조종 받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가운데 생베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가 있습니다. 낡은 옷에 생베조각을 대어 기우면 어찌되겠습니까? 옷이 찢어집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어 봉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터져버릴 것입니다. 과학은 생베와 같은데 인간심성은 낡은 옷 같으니 그 인생이 온전하겠는가? 나날이 변화되는 기술의 발전은 우주를 나는데 인간심성은 여전히 땅을 기어가고 있으니 어찌 그 인생이 터져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이 혼미하고 분별력이 제로로 그냥 거대한 사회라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끼여 살다가 마모되어 버려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새누리 새정치 새경제 새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새것이 되지 못한 것은 그 말하는 사람이 새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흙 발에 먼지구덩이 옷을 입고 더벅머리에 이가 득실거리는 사람이 고급 새 자동차를 타고 간다면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 그런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타령 해 봤자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듭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고 외쳤습니다.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새사람이 되었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그 생각이 새롭고 그 행동이 새롭고 그 사는 방식이 새롭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다면 뭔가 새로워진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전히 옛 방식으로 새 시대를 살아가려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믿었지만 전혀 기쁨을 모릅니다. 변화된 즐거움을 모릅니다. 새 사람 된 기쁨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주일성수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봉사하는 일이 얼마나 넘치는 기쁨인지 모릅니다. 가족 간에 휴가의 즐거움도 있지만 자원봉사 단기선교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 행복을 모릅니다.
바울 선생님이 골로새 교안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하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방법대로 여전히 살고 있느냐”(골2:20)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사람들이 어찌 살고 있습니까? 마치 죽을 자리로 끌려가듯 괴로운 인생길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과학문명을 만끽하며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은 언제나 잔치인생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대로 우리는 지금 여기 혼인잔치에 초청받듯 서로 기뻐하며 웃으며 즐겁게 해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기쁨이 없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권력은 누릴 수도 있고 못 누릴 수도 있습니다. 인기는 얻을 수도 있고 못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절대 못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기쁨이며 즐거움이며 자랑거리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하거니와 성도의 삶은 잔치입니다.
여러분의 집 창문을 활짝 여십시오. 우중충한 집은 우리의 예수님과 함께 살집이 아닙니다. 답답한 폐쇄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어둠 컴컴한 골방이 아닙니다. 밝고도 화창한 집입니다. 그런 세상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겨야만 마음이 놓이지만 성도는 이기든 지든 늘 평안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구속이 없어야 자유롭지만 성도는 감옥에 갇혔어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해야 자존감이 높아지지만 성도는 실패해도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 쾌락을 즐기지만 성도는 죄를 이기면서 정결함을 누립니다. 성도의 기쁨을 앗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무리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한다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희망입니다. 바로 십자가는 세상의 희망의 표적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기쁨의 삶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시니 누구든지 성령충만 받은 사람은 시대를 분멸하여 희망을 말하며 기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망하는 징조가 보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망하게 가도록 할 것입니까? 누가 이 나라를 다시 살려 낼 것입니까? 누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것입니까? 세상의 사람들처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통해 희망을 보게 하고 기쁨을 공유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초윤장산이라 했습니다. 주춧돌이 젖어 있으면 우산을 펼쳐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징조가 망하는 징조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을 활짝 펼치고 모두가 하나 되어 희망과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로 죄악을 이기는 기쁨 마귀를 이기는 기쁨 그래서 마침내 천국잔치에 함께 참석하는 기쁨의 표적입니다. 오늘도 함께 초운장산의 믿음으로 행복하시기를 주인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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