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2일 주일아침예배설교
전병호
201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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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2일 주일아침 예배설교 골 3:1-4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008년에 상영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부제가 있는데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을 말합니다.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던 카터 체임버스(모건 프리먼)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진찰을 받은후 시한부 인생이란 판정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좌절하여 있던 어느 날,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철학교수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라고 했던 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46년이 지나 지금 신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그에게 터무니없는 생각이였습니다.
또한 사람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사업체를 늘려 돈 버는 일에 정신 없이 살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에드워드사장이 정비사 카터의 병실에 입원하게 됩니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게서 중요한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한부 인생인 자신들이 나는 누구인가 돌아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 또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두사람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함께 그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스카이 다이빙 해보기, 카레이싱 하기, 문신 새기기,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만리장성에서 오토바이 타기, 눈물나도록 웃어보기, 피라미드꼭대기 올라가기...신나는 모험을 즐기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카터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멋진 믿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혼이 하늘에 가면(죽으면) 신은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대답에 따라 천국에 갈지 말지가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가?”입니다.
카터가 에드워드에게 ‘당신은 인생의 기쁨을 찾았냐’ 물었을 때 자신있게 "Yes"라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에드워드는 어려운 질문이라며 자신이 딸과 담을 쌓고, 남남처럼 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질문 앞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습니까?"
"당신의 인생으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습니까?"
어느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무엇이라 할 것입니까?
예 저는 인생의 기쁨을 찾았습니다.
예 제 평생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하기 위해 오늘의 말씀의 제목대로 저 높을 곳을 향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작은 교회에서 3살짜리 아이의 장례식이 벌어졌습니다. 미국 장례식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관 뚜껑을 열어 놓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하는 도중에 30대의 한 거지가 죽은 아이의 신발을 훔쳐 400원( 35센트)에 팔아 술을 사 먹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입니다. 이 사람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술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에 희망을 주신 주님을 증거하러 다닙니다. 그분이 멜트라더 라는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교훈을 줍니까? 세상 것을 찾아 헤메이다가 급기야 죽은 아들 신발까지 빼앗아 술을 사먹은 사람이 마침내 위에 것을 찾게 되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의 인생의 방향을 돌이키니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제 2의 인생을 주시어 이제 그를 높이 들어 세우시니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위에 것을 찾으라. 위에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위에 것을 찾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누구나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당신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고, 보혈의 피를 흘려 나의 죄 값을 담당해 주심으로 내가 거듭났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백성 되었습니다" 라고 분명히 고백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다. 이제부터 나는 반드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 1월과 2월에 KBS에서 6부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마음”이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사람의 마음의 세계가 얼마나 오묘하고 놀랍고 이상한지 그야말로 무척 놀라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 책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혹 워너비(BIID환자, 신체통합정체성장애)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3인조 남성그룹인 SG워너비를 말하는 게 아니라 ‘want to be amputated’(팔다리를 자르고 싶어요)를 미국 발음으로 wannabe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Pd가 취재한 사람은 매우 평범한 50대 가장인데 그는 멀쩡한 왼쪽다리를 자르고 싶어했습니다. 왼쪽다리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아이가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것을 본 후 그는 그 아이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리가 두 개인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20년을 더 산다면 워너비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워너비들은 미국에서 수술 받을 수 없어서, 멕세코나 태국에 가서 수술을 받는데 평균 1200만원(1만달러)의 정도를 지불하면서까지 수술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다리를 절단하고 장애인으로 사는 삶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플라시보(Placebo) 효과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는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약이 아닌데도 단지 환자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복용함으로써 실제로 병세가 호전되는 형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플라시보의 반대개념인 노시보(Nocebo)가 있습니다. 노시보는 나빠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몸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의사가 건강한 할머니에게 “할머니 죄송한 말씀인데요. 할머니는 이 달을 넘기시기 힘들겠는데요.”하면 정말 할머니는 한 달 내에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점쟁이가 “당신 이름으로는 서른 살을 넘기기 힘들다”고 말하면 그 소리를 듣고 이름을 안 바꿀 강심장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점 집에는 가면 안됩니다. 점쟁이들은 인간의 심리적 약점인 노시보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실제로 노시보 실험을 했습니다. 다이어트 우유를 개발해 시음테스트를 한다고 인터넷에 광고를 내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총 일곱명 중 다섯명을 모집했고, 두 명은 실험하는 측에서 따로 불러 적당한 시기에 요구한 반응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싱싱한 우유를 진행자들이 먼저 마시면서 다이어트에 아주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효능 설명도 했습니다. 차례로 한 잔씩 마시면서 소감을 물었습니다. ‘연하다’, ‘부드럽다’, ‘다이어트용이라서 그런지 가볍다’, ‘좀 가벼운 느낌이다’, ‘고소하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때 미리 부탁받은 한 사람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배를 잡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왜 그러냐 묻자 갑자기 속이 안 좋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돌발상황이 생겨서 그렇다고 다시 맛에 대한 느낌을 물었습니다. 처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말했습니다. 이게 전형적인 노시보 반응입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을 돌려보내며,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기면 치료해 줄테니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한 명의 시음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 시음자는 온 몸에 두드러기처럼 발진이 생겼고 가려워 잠을 못 잤다는 것입니다. 아토피보다 더 심한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좋은 우유를 먹고 식중독이 생긴 것입니다.
왜 이런 노시보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그럼 플라시보 효과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잘 될 것을 생각합니까? 나빠지고 어렵겠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비판적 부정적 비관적인 말을 수없이 듣고 그 말에 따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이야기 중에 가나안 땅에 40일 동안 살펴보고 돌아온 12명의 탐정들의 보고가운데 10사람은 그곳은 분명히 살기 좋은 땅이지만 거인들이 살고 있어 우리가 그곳에 갔다가는 메뚜기처럼 발펴 죽을 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니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밥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열 사람의 부정적인 보고를 더 따랐습니다. 이것이 노시보 현상입니다. 결국 그들은 광에서 40년 간 방황하다가 다 죽었습니다. 다만 갈렙과 여호수아만 살아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요단강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요단강을 막아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그대로 믿고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프라시보 현상입니다.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아라 그러면 무너질 것이다. 그대로 믿고 돌았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프라시보 현상입니다.
만일 이 때에 요단강을 들어가라니 우리 모두를 요단강에 빠저 죽으란 것이냐.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이제 물에 빠져 죽으라는 것이냐 하고 어느 누가 선도해서 노시보 현상이 일어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광야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군산시민 1% 구원이라고? 언제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불가능하다 목사님이 괜한 말을 하고있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결코 1%가 아닌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이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은 부정적인 죗 된 말에 더 귀담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도 사단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보다는 나쁜 친구의 말을 더 따르는 학생들이 있고, 목사님의 말씀보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의 말을 더 따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노란 손수건 전도 백날 해봐라 우리 교인들 끔쩍 안 할 것이다' 라고 누가 노시보 현상을 말한다면 노란 손수건 단 한 장도 나무에 매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노시보 현상을 일으키는 말에 귀 기울려서는 아니 됩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신앙 역사는 언제나 이 노시보에 빠진 자들은 망하고 프라시보에 따르는 백성들은 승리하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부터 125년 전 언더우드 아펜셀러 두 청년이 당시 조선에 선교하러 오려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조선은 야만국이다. 조선에 갔다가는 당장 죽을 것이다. 심지어는 식인종 나라라고도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조선이 식인종나라라고 해도 복음을 전할 것이다라고 확신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125년이 지난 오늘날 1000만 명의 기독교인 7만 교회 2만 명의 세계선교사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선교역사상 기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말은 임자 따라 간다고 합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할 수 없을 것이고 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다는 사람을 따라 노시보 현상을 일으켜 하지 않을 것입니까? 아니면 할 수 잇다는 사람을 따라 프라시보 현상을 일으킬 것입니까?
봉독한 말씀 1절에서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찾으라"는 말은 '계속 힘들여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위의 것을 찾고 누리려면 우리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위의 것은 힘들여 찾는 자에게 보여집니다.
마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원어적으로 다시 번역하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찾이하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차게 성장하고 있는데, 힘있는 사람들, 열심 있는 사람들, 위의 것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는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 것을 찾고 위에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한 걸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절에서는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생각하라"란 말은 애착심을 가지라(Abbott), 즐기는 마음을 가지라(Bengel)는 의미입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염세주의(厭世主義)가 아니라 땅의 것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 위의 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고, 그것들을 제멋대로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고전 6:12,10:23). 우리 인간의 본성은 땅의 것에 애착을 갖기 쉬우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면 위의 것을 힘들여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에 것에 애착을 갖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면 “위의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위의 것이 무엇이냐’ 보다 ‘우리의 생각, 관점, 방향이 위의 것으로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살고 있지만 위에 것에 애착을 갖고, 위에 것이 무엇일까 찾는 삶의 자세가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약의 효능을 따지기 전에 긍정적 효과를 믿고 복용하면 플라시보 현상으로 질병이 호전되지만 반대로 나빠질 것이라 생각하면 정말 나빠지는 노시보 현상이 생기는 것처럼. 생각을 전환하면 우리의 인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위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위의 것을 찾아보십시오. 위의 것이라 하니 좀 망막할 것 같습니다. 직장 다니는 분들은 승진하고 인정받는 법을 아실 것입니다. 윗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일하는 것입니다. 아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윗분의 의도, 마음, 계획, 꿈을 알고 움직이는 사람은 잘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는 비결도 같습니다. “윗분의 눈치를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작고, 큰 일들 속에서 윗분의 뜻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 하나님이 밀어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윗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못 된 사람의 눈치를 먼저 살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지난번 제빵왕 김탁구 TV 연속극을 보면서 속이 시원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못 된 일 만 하는 비서실장의 못 된 짓을 도맡아 하던 깡패들이 김탁구가 어머니를 14년 만에 만나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물러서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눈치만 보고 따랐던 깡패들이었지만 진실 앞에 고개가 숙여졌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누구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까? 세상사람들의 눈치를 모아야 합니까? 우리를 죄 짓게 만드는 사탄의 눈치를 보아야 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하시면 하는 것이고 하지 말라하시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에 것을 찾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저 높을 곳을 향하여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작가 찰스 쉘던이란 사람이 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금요일 밤에 한 걸인이 목사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주일 예배시에 목사님이 설교가 끝나자 그 걸인이 교회 앞으로 나오더니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것입니까?"하고 말하더니 쓰러져 죽었습니다. 온 교회 교인들과 목사님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바로 미국 레이몬드시 제일교회의 맥스웰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앞으로 1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도록 합시다. 지금보다 더 큰 희생과 고통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릅시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행하든지, 우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정직하게 자문자답을 한 이후에 실천에 옮길 것을 서약합시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질문을 하며 순종할 때 놀라운 변화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일을 하실 것인가?
-예수님이라면 이 말을 하실 것인가?
-예수님이라면 거기를 가실 것인가?
-예수님이라면 그 사람을 만나실 것인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위의 것을 찾고 생각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는대로 순종하는 길은 우리에게 인생의 참된 행복과 기쁨도 주지만, 악한세상에서 희생과 고통도 따른다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사는 것도 축복 이상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 날에 부끄러움 없이 분명히 "예 저는 참으로 기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또 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박이화 여류 시인의 <정글의 법칙>이란 시에 이런 내용입니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 잡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거미는 나방 한 마리 잡기 위해 온 생을 짜낸다.
살아가는 일이 이렇듯 정글 아닌 곳이 없는데
어째서 너의 생엔 손톱도 발톱도 없는가?
“어째서 너의 생엔 손톱도 발톱도 없는가?” 여러분에게 손톱 발톱이 있습니까? 아니요 분명히 있지요 그런데 손톱도, 발톱도 없는 사자로, 동물원에 갇혀 있는 사자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 위의 것은 생각하지 않고 땅만 바라보고 살려 하지 않습니까?
이젠 그 유혹을 물리치고 좀 윗분의 눈치를 봅시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뭘 원하실까?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힘있게 뜨거운 믿음으로 살 수 있을까?
과연 저 높을 곳을 향하여 지금 나는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땅만 바라보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 것인가?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심리학 교수인 길슨박사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상자 속에 두 장의 그림을 넣고 들여다보게 하는 것입니다. 상자 속에 들어있는 그림 중 한 장의 그림은 웃는 얼굴이고, 다른 한 장은 슬픈 얼굴입니다. 두 개의 구멍에 눈을 대고 상자 안을 들여다 본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웃는 얼굴이 보인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슬픈 얼굴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느 쪽 눈으로 어떤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측정하는 실험인 것입니다. 길슨박사는 이 것을 인식의 차단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보는 태도가 어느 쪽 그림을 보는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슬픈 마음이나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상자 속의 슬픈 얼굴을 보게 되고, 기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상자 속에 들어있는 웃는 얼굴을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자 속에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이란 사진이 들어있다면 어느 것이 여러분의 눈에 보일 것 같습니까? 세상에, 땅의 것에 애착을 갖고 있으면 믿음으로 사는 것 같아도 땅의 것이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찾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한다면 하늘의 것이 보일 것입니다. 수많은 노란 손수건을 나운복음교회 나무 위에 펄럭이게 합시다. 천국을 침노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여 살아갑시다.
그러면 그 크신 일을 행하신 주님께서 영광 중에 위로부터 선물을 내려 주시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의 인생위로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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