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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과 텃밭 공
전병호 2014-12-08 추천 0 댓글 0 조회 801

제  목   보라! 너희의 하나님 이시다!

성  경   이사야 40:1-11

찬  송   

 

 이사야 1장에서 39장 까지는 하나님을 떠난 유다 백성들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 후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세상이 녹녹치 않음을 알지만 그로인해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다림에 끝에 희망이 있고, 희망 넘어 하나님이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과 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로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27절에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하나님의 무관심과 침묵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실의와 절망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위로”라는 말씀을 반복하여 말씀하시면서 ‘위로’와 ‘회복’의 말씀이 확실한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또한 1절에서 ‘너희의 하나님’과 ‘내 백성’이라는 표현을 나란히 사용하시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관계(7:23)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2절에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드럽고 완곡한 말로 그들을 설득하고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의 뜻이 전달되고 이해가 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은 강한 어조의 말이나 큰 소리가 아니라 작고 잔잔한 소리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 위로의 말씀은 9절과 10절로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에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하시는데 원문 힌네 엘로헤켐은 “보라! 너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번역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힌네 엘로헤켐 - 보라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절망속에서 눈을 들어 그분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팔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을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시며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시던 그분의 팔로 그들을 다스리실 것이며, 그들에게 줄 위로와 상급을 가지고 오실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목자와 같이 자기 양떼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호하실 것이고,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어린양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관심과 주의가 필요한 젖먹이는 암컷들을 조심스럽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너희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힌네 엘로헤켐 - 그런 분이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시니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고달픈 백성들에게 그 생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될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오시는 그 길은 광야 사막에 있습니다. 큰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닦여진 도로가 놓여 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서 더 절망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길이 없는 곳, 길이 보이지 않는 곳, 그래서 인간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그 곳에 길을 내시며 그 길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에게 찾아오시며 만나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저 거칠고 황량한 사막에 탄탄한 대로가 생기고 높고 낮은 곳이 메어져 평지가 되고 인적 하나 없어 적막하고 사람이 살 수 없어 보이던 곳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게 되고…

 

이사야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앙망하라고 말합니다.  '仰望'이란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앙망하려면 먼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던 것에서 눈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분주함 속에서도 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고 것, 우리가 이러한 삶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둘째, 여호와를 바라보고, 기다리며 앙망하는 사람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결과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은 '맡김'입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족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셋째, 여호와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앙망한다는 말에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아멘'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때 그것을 이루어낼 수단과 시간을 함께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과 압박감도 몰아내십니다. 물론 인생이라는 게 날마다 호시절일 수는 없어서 어려운 일도 겪게 마련이지만, 그 어려움을 겪어내는 방식은 저마다 다릅니다. 성도들은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시는'(2:15)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회피하고 싶고, 도망하고 싶은 저주의 장소를 오히려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신다는데 겁낼 게 뭐 있겠습니까?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시며, 절망의 인생에게 길을 내어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몸이 무거우면 사소한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지지만, 힘이 넘칠 때는 웬만한 장애물을 만나도 쉽게 넘어갑니다. 성도들은 작은 일 앞에서 앙앙불락(怏怏不樂:마음에 차지 아니하거나 야속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아니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우리의 목자 되셔서 양떼처럼 팔을 벌려 모아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 젖먹이는 어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이들에게는 주님이 계시기에 행복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만 우리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삶의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곤할 때 잠시 무엇인가에 등을 기대어 쉼을 얻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주님께 들어올리면 우리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임진생목사 지난 주일아침예배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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