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7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고후 4:7-10 영혼의 넠다운knock down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미국 서쪽 끝에 있는 도시인 로스엘젤스에서 동쪽 끝인 뉴욕에 까지 기차를 타고 가던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거리가 4천키로미터로 3박 4일을 꼬박 기차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놀랬다는 것입니다. 이 한국인들이 잠자고 먹는 시간 빼고 줄창 노래들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광뻐스를 타보면 그 견고한 버스가 들썩거리듯 노래들을 부릅니다. 아마도 많이 부르는 노래중에 <노랫가락 차차차>가 있습니다.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차차차”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대개 5060이상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일하느라 제대로 놀아본적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 나이들어 모처럼 관광뻐스 타고 꽃구경 가는데 “노세 노세 젊어서노세”를 흥겹게 노래 부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노래가 처음 불러진 때가 황정자라는 여가수가 1954년에 불렀습니다. 1954년이 언제입니까? 6.25전쟁이 끝난 직후입니다. 온 땅이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다치고 파괴와 가난이 철철 넘치던 그때입니다. 작은 하꼬방집 깡통집에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노래가 들려 나왔습니다. 참으로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하루 한끼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면서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논다고 노래 부르니 노는 일에 환장하지 않고서 어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아닙니다. 여기에 한국인의 우수한 민족성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먹고 놀자는 퇴폐적인 노래 같지만 뜻을 곰곰이 생각하면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러저런 굴곡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세월을 탓하고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인생을 즐겁게 기쁘게 살아가자는 용기와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지게지고 품팔이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며 희망을 꿈꾸었다는 것입니다. 늙어서는 일하지 못하니 젊어서 열심히 일하자는 의미를 반어법으로 놀자라는 말로 표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반어법으로 오히려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말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 중에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라”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말은 “人無十日好(인무십일호)요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인데 月滿卽虧(월만즉휴)이니 權不
十年(권불십년) 이니라.”라 즉 “사람의 좋은 일은 10일을 넘지 못하고 붉은 꽃의 아름다움도 10일을 넘지 못하는데 달도 차면 기우니 권력이 좋다한들 10년을 넘지 못 하느니라”라는 옛 글에서 온 말입니다. 즉, 모든 인생사는 좋은 일이 끝까지 영원토록인 것은 없으니 항상 분수에 맞게 살고, 권력 있다고 뽐 내지 말고 겸손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유병언씨의 잠적과 죽음에 대한 뉴스가 온통 TV를 점령하였습니다. 여길 돌려도 유병언 저기를 돌려도 유병언 그런데 급기야 그 유병언씨가 백골로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사건인지, 외국으로 밀항을 할 것이라, 어디 어디 숨었냐 머리카락 보일라 수 만명의 검경이 찾아다녔는데 결국 그가 숨어있었던 별장에서 2.5km떨어진 풀숲에 백골로 벌써 수십일 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동안 TV에서 유병언씨를 소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보여준 장면이 발길질하고 건장한 남자를 엎어치기하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는 모션을 보여주며 70 노익장을 과시하였습니다. 수천억 원의 재산을 가졌고 수만명의 교인들의 신격화 된 교주로 추앙을 받았던 그가 어찌하여 숲속에 구데기 밥이 되어 백골로 남아 있었었는지 화는 무 십일홍이요 인생의 무상함을 넘어 비참한 인생의 말로를 보게 되니 그야말로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바람에 먼지 날리듯 가버린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 김영랑은 모란꽃을 바라보며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 말하였는데 우리들의 인생이 바로 찬란한 슬픔의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결국에 가서는 슬픔의 인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란 중이 있었습니다. 이 중의 누이가 ‘부운(浮雲)’이란 다음과 같은 선시禪詩를 지었다고 합니다. (흔히 나옹선사가 지었다고도 합니다)
空手來 空手去 是人生 (공수래 공수거 시인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이것이 인생인데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태어남은 어디서 오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태어남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인데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함이 없으니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이와 같다네.
獨有一物常獨露 澹然不隨於生死 (독유일물상독로 담연불수어생사)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이 선시는 불교의 인생관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결국 한 조각 뜬 구름 같이 생겨났다 없어지는 인생이라. 그래서 인생은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없는 것이요 그것도 없는 것(非非無常處) 그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고해인대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닫게 되니 자연히 고통도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아재아재바라아재바라승아재모지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苦提娑婆訶 ’ 즉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고 매일같이 염불을 외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문제는 萬法唯心 모두 마음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달음의 장이라 열심히 마음을 수행함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깨달음이 오고 인생문제가 공허하다고 깨닫게 되면 인생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도 마음이 깨끗해져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행을 하고 고행을 한다 해도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러운 손으로 얼굴을 닦는 다고 얼굴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죄인 된 인생이 아무리 수행을 한다고 하여 그의 죄 한 옹큼이라도 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십 수백 년의 고행으로 모지사바하 염불 왼들 깨달음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인생문제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이 잘 되야 범사가 잘되고 육신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유병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 이단의 교주이지만 그는 영혼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구원론은 결국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바로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구원파 교주인 유병언은 육체도 구원받지 못하였으며 그의 영혼도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구원파에 속한 그 신도들 역시 영혼을 구원받지 못한 구원파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어떠하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합니까?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영혼에 성령이 얼마나 채워져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롬 8: 11“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37절에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에 성령이 없다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죽은 영혼입니다. 죽은 시체가 구데기 밥이라면 죽은 영혼은 마귀의 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을 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대체로 자동차의 부품수가 약 2만개라고 합니다. 몇일전 환화야구팀 선수인 김태균 선수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의 자동차가 슈퍼카포르쉐911이란 차로 차 값이 2억원이 넘는 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랍의 한 부호가 타고 다니는 자가용은 금으로 꾸며져 있는 데 무려 그 값이 5000억원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미친X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 한다하더라도 배터리가 없으면 그냥 고물차입니다. 배터리가 방전되어 충전이 안된다면 자동차는 꼼작도 안합니다. 신앙생활도 만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으면 그의 영혼은 죽은 영혼이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마귀의 손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의 밧데리는 충전되어 있습니까? 방전되어 경고등이 켜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영혼은 죽게 될 것이고 자동차가 멈추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비참한 슬픈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왜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바로 내 텅빈 영혼을 성령으로 충전하기 위함 입니다. 왜 열심히 찬송을 불러야 합니까? 그만큼 내 영혼에 성령이 충전되기 때문입니다. 왜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만큼 내 영혼에 성령이 충전되기 때문입니다. 왜 예물을 드리며 감사하며 십일조 헌금을 드립니까? 그만큼 내 영혼에 성령을 충전하기 위함입니다. 왜 말씀을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에 충전된 성령이 다 방전되어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 충만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성령을 방전 시켜 버린다면 여러분은 죽은 영혼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가 마귀와 함께 살 것입니다. 아니요 성령과 함께 행복한 인생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죽은 이에게 미안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유병언씨의 시신이 국과수에 들어가 온갖 검사를 다 하였다고 합니다. 그 시신은 그냥 검시관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령충만 받지 않는다면 죽은 영혼이라 마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살아 있는 영혼이라 능력이 있습니다.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의 권세를 이깁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성도들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어디 있는가 찾아보니, 풀숲에 누운 백골 인 냥 세상 가운데 시커멓게 누워있는 영혼들을 보게 됩니다.
왜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딤전 4:7에“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로 말씀하였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란 원어로 직역하면 ‘세속적이고 할머니 옛날이야기’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쓸데없는 말들을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즉 나의 영혼에 성령충만 하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이삭의 아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는데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짐승을 잡아왔지만, 요리를 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렌즈라는 붉은 콩으로 죽(나지드창25:29 팥죽이 아님)을 쑤고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그 죽을 나에게 달라" 고 합니다. 야곱이 못주겠다고 하면서 "너의 장자권을 나에게 주면 이 죽을 줄께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에서가 대답합니다. "그래, 그까짓 장자권이 뭐 대수냐?" 하면서 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바꾸었습니.
이 에서의 행동에 대해서 신약성경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5~17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망령된 것이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니 망령충만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실상 하나님의 축복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소낙비같이 내리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일에 그의 영안이 멀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죽 한 그릇만 못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관심으로 영혼이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왠 일인지 산지사방에서 수많은 사고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최근에 들어와 화재사건과 자동차사고는 말할 것도 없고 배가 가라앉고, 비행기가 떨어지고, 기차가 충돌하고, 전방 군대에서는 하극상 총기 사고가 일어나고, 사람들은 다니기가 무서워 여름에 휴가여행을 취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영적으로 들여다보면, 죄악의 역사요 사단마귀의 역사입니다. 위기는 바로 경건의 위기입니다. 전에는 성령충만 받기를 사모하였는데 요즈음 교인들 가운데 성령충만 사모하는 교인들이 찾기가 어렵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경건지수가 얼마나 됩니까? 지금 여러분의 영혼에 얼마나 성령이 채워져 있습니까? 충만히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요만큼 이라도 있나요?
어떤 사람이 호두과자를 샀습니다. 그런데 호두과자 속에 호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의를 하였습니다. 왜 호두과자 속에 호도가 없습니까? 장사꾼이 말하기를 붕어빵 속에 붕어가 있습니까? 빈대떡 속에 빈대가 있습니까? 총각김치를 총각으로 담았습니까? 세상적 욕망에 관심이 많으면 그의 영혼에 성령이 거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 심령에 성령이 없습니다.
룻소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10대는 먹을 것에 움직이고 20대는 사랑에 움직이고 30대는 쾌락에 움직이고 40대는 야심에 움직이고 50대는 탐욕에 움직이고 60대는 명예에 움직인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움직입니까? 성도는 나이를 불문하고 성령에 의해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이 내주하면 성령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축복받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죽 한 그릇이 없어서 배가 고프더라도, 병에 걸렸다 해도, 사업이 어려워도, 돈이 다 떨어져도 성령이 내안에 충만하면 두려움도 없고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시대의 위기는 바로 여러분의 영혼안에 성령의 역사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박밭에 수박이 큼지막하게 열렸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수박밭을 가꾸는 일은 농부의 일입니다. 내 영혼에 성령충만 주심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성령받기를 사모하는 일은, 경건을 연단하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의 축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가꾸지 않으면 움직이려하지도 않고 게으르게 살아 약해지고 병들게 되는 것은 자신의 문제입니다.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부지런히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열심히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중심의 영성이 생깁니다. 부지런히 전도하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성이 생깁니다.성령충만은 감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감 떨어지기를 바란다고 얻어질 수 없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불쑥 내 영혼에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받기를 간단없이 노력하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언행심사가 성령께서 내주하시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 성령받기를 일찍이 포기한 듯 자기 생각대로 세상과 어울리고 죄짓고 악을 행하는 일에 더욱 익숙해지니 슬픈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인 고린도후서 4장 8절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때때로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넘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세상의 일들로 힘들고 지치고 그래서 믿음이 넠다운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영혼이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혼이 넠아웉 되어서는 안됩니다. 넠다운은 다시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카운트에 들어갑니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권투시합에서 넠다운 되었을 때 심판이 카운트를 세듯이 내 영혼이 낙심하여 죄 가운데 쓰러졌을 때 성령께서 카운트를 셉니다. 열을 세기 전까지 일어나야 합니다. 에잍 나인 텐! 그래서 넠아웉이 선언되어 완전히 패배하듯 우리의 영혼이 구원의 반열에서 아주 지옥으로 떨어져 나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 기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그래서 영혼이 넠다운이 되었다 할지라도 결코 그대로 넠아웉 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삶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세상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쇠약하게 하며 온갖 마귀의 역사가 여러분을 미혹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영혼이여, 깨어나십시오! 그래서 이 시간 성령충만 받으시어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건강을 살피시고 여러분의 생업에 복주시며 여러분의 가정에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도록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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